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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원[中樞院]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자문기관

1910년(순종 4)

중추원 대표 이미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갑오개혁 때 관직을 잃은 고위 관료의 불만이 많아지자 갑오정권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내각의 자문기관(諮問機關)으로서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였다. 광무정권(光武政權)을 거쳐 통감부(統監府) 시기에 들어서면서 중추원의 위상은 조금씩 변화했지만, 헤이그밀사 이후에는 거의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침략에 협력한 조선인 중에 관료가 되지 못한 이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이들의 명망을 조선통치에 활용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중추원을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남겨두었다. 1910년대에 중추원은 ‘조선반도사’ 편찬과 구관 조사 등을 담당했지만, 자문사항을 검토하는 정례회의는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3·1 운동 이후 1년에 1회 정례회의가 정착되었으며, 다양한 안건에 자문이 이루어졌다. 중추원 인사는 기본적으로 친일적인 인사였으며, 1920, 30년대의 자치운동이나 참정권 청원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활동을 많이 하였다.

2 식민통치를 위해 자문기관을 만들다

중추원은 1894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중추원은 “실직(實職)이 없는 자헌(資憲, 정2품 아래의 문무관) 이상의 인사를 단망(單望, 조선시대의 관리임용제도로 왕의 재가를 받을 때 1명만 추천하는 것)으로 선정한 기관”이었다. 이때는 갑오개혁으로 인한 정치변동이 활발했고, 관료 중에는 “실직이 없는 자헌 이상의 인사”가 다수 나오고 있었다. 중추원은 이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설치된 내각의 자문기관이다.

1895년 3월 25일 칙령 제40호로 「중추원관제 및 사무장정」이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중추원의 기능과 권한은 이전에 비해 매우 체계화된다. 중추원은 기본적으로 자문기관의 성격을 유지하였지만, 법률이나 칙령(勅令) 등을 심사하고 관련 사항을 정부에 건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1898년 11월 2일 칙령 제36호로 공포된 관제는 중추원을 의회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였지만, 정부 내 수구파(守舊派)의 반대로 진행되지는 못했다. 이후 몇 차례의 관제 개정을 거치면서 기관의 권한이 강화되어 1904년에는 정책을 의결하고 심사할 수 있는 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07년의 ‘헤이그밀사 사건’을 거치면서 중추원의 권한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미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한 중추원을 통치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1910년 9월 30일에 공포된 「조선총독부중추원관제」(칙령 제355호, 이하 「중추원관제」)는 중추원 존속을 통한 식민권력의 전략을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중추원은 일본의 조선 침략에 협력하였던 조선인 유력자 중에 조선총독부 관료가 되지 못한 인사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그들로 하여금 통치를 보조하는 데 활용되었던 것이다.

「중추원관제」 제1조에도 잘 나와 있듯이 중추원은 “조선총독에 隷하여 조선총독의 咨詢에 응함”을 목적으로 했다. 의장, 부의장, 고문, 찬의(贊議), 부찬의(副贊議)의 기본 조직도를 바탕으로 서기관장과 서기관, 통역관을 실무 관료로 두었다. 의장은 역대 정무총감(政務總監)이 당연직으로 겸임한다. 부의장 1명, 고문 15명, 찬의 20명, 부찬의 35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조선인이다. 부의장은 친임대우, 고문과 찬의는 칙임대우이며, 부찬의는 주임대우였다.

중추원관제는 식민지 기간 동안 모두 7번 개정된다. 그 중에 1915년과 1921년의 개정이 중요하다. 1915년 4월 30일 칙령 제62호의 「관제」 개정은 중추원의 업무에 “조선의 옛 관습과 제도조사”를 추가시켰다. 이는 종래 취조국의 업무였던 ‘구관 및 제도에 관한 조사’를 중추원이 맡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핵심은 『조선반도사』 편찬 업무를 맡았다는 것이다. 이후 1918년 1월 19일 「조선총독부중추원사무분장규정」(조선총독부훈령 제3호, 이하 「사무규정」)이 공포되어 조사과와 편찬과가 신설되었다.

1922년 10월 28일 「사무규정」이 개정되면서 편찬과가 폐지되고 그 업무가 조사과로 이관된다. 1925년 6월 8일의 개정은 조사과의 ‘사료 수집과 편찬’ 기능을 삭제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 역사편찬기구가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로 개편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중추원의 『조선반도사』 편찬 업무는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편수사업으로 흡수되었다.

3 식민통치에 자문을 하다

3·1 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이전보다 중추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위에서도 언급한 1921년의 개정은 이와 매우 밀접하다. 이로 인해 중추원의 직제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고문을 15명에서 5명으로 하는 대신에 친임대우로 격이 높아졌다. 또한 찬의와 부찬의는 명칭이 참의(參議)로 통일되었고, 65명으로 늘어났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표 1〉 중추원 직제의 변화
  1910년   1921년
의장(정무총감) 1명 의장(정무총감) 1명
부의장(친임대우) 1명 부의장(친임대우) 1명
고문(칙임대우) 1명 고문(칙임대우) 5명
찬의(칙임대우) 20명 참의(칙임 및 주임대우) 65명
부찬의(주임대우) 35명    
서기관장(칙임관) 1명 서기관장(칙임관) 1명
서기관(주임관) 2명 서기관(주임관) 1명
통역관(주임관) 2명 통역관(주임관) 1명
속, 통역생(판임관) 8명 속, 통역생(판임관) 10명
〈표 1〉 중추원 직제의 변화

중추원 의관을 맡은 조선인은 당시의 최고 유력자들이었다. 1910년대에는 김윤식(金允植)과 이완용(李完用)이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이완용은 「중추원관제」 개정 이후에도 중추원에 깊숙이 관여하여 1921년부터 1927년까지 부의장을 맡았다. 1927년부터 1939년까지는 박영효가 부의장이었다. 1942년의 이진호(李軫鎬)와 1945년의 박중양(朴重陽)도 주목할 만하다. 이외에도 고문 이하의 직책에 송병준, 이하영, 윤덕영, 이지용, 권중현 등이 참여하였다.

1910년대에는 중추원의 자문기능이 거의 발휘되지 않았다. 이따금 총독의 훈시를 조선인 사회에 선전하기 위해 임시회의를 열 뿐이었다. 실제로 중추원의 공식적인 제1회 회의는 1919년 9월에 처음 열린다. 이때부터 1년에 1회씩 이루어진 정례회의에는 다양한 안건이 상정되었다. 중추원은 회의의 진행을 위해 총독부의 정책 설명을 들을 수 있었으며, 국·부·과장과 소속관서의 장에게 출석을 요구할 수 있었다. 자문 사항은 거의 매년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제1회 회의에서는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 개정의 건’을 논의하였다. 1921년 12월 제4회 회의에서는 ‘남자는 만 17세, 여자는 만 15세가 되지 않으면 혼인할 수 없다는 규정을 설정하는 건’을 논의하였다. 1935년 4월에는 ‘반도(半島)의 상황에 비추어 민중에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주는 가장 적당한 신앙심의 부흥책’을 논의하였다. 1940년 10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실황과 강화 철저를 도모하기 위한 방책’을, 1945년 7월의 마지막 정례회의에서는 ‘시국에 비추어 전의(戰意)를 앙양하는 대책’을 논의하였다.

한편 중추원은 『중추원통신』을 통해 자문활동을 대내외에 선전하였다. 1934년 7월 18일에 발행인가를 받았으며, 이후 발행 주기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1937년 1월부터 1938년 12월까지는 매월 발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중추원 개혁’ 논의가 일어나다

한편 1920년대 후반부터는 ‘중추원 개혁’과 관련된 여러 가지 논의가 등장한다. 당시 조선사회에는 ‘참정권 청원운동’과 ‘자치운동’으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정치운동’의 흐름이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중추원 내에서도 재현된다. 참정권 논의는 1927~1933년에 걸쳐 매년 중추원 회의에서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1928년 제8회 중추원 회의에서 이병렬은 ‘조선에 참정권을 부여하는 시기를 분명히 밝혀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제국신민(帝國臣民)이라는 자각을 촉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중추원의 역할을 강조했다. 자치운동 역시 중추원 내의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예를 들어 현준호는 1932년 중추원 회의에서 ‘중추원을 조선의회로 바꾸고 조선통치에 관한 중요사항을 의결·협찬하게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논의는 30년대 중반부터 40년대에 걸쳐서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때는 총독부가 직접 ‘중추원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1930년대의 사회적 혼란을 무마하기 위해 ①중추원의 실질적인 심의권을 확장하고, ②내지인 참의를 임명하며, ③참의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④중추원에 건의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이는 ‘조선의회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조선인 사회의 기대를 받기에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총독부의 개혁안은 그대로 실행되지 못하였으며, 참의를 대폭 교체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또한 수요회, 시정연구회, 목요예회(木曜例會) 등의 여러 가지 모임과 논의기구가 만들어지면서 중추원 운영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이후 개혁안은 아베 노부유키(阿部伸行) 총독 시기에 일본 내무성을 통해 제출되었다. 내무성은 중추원을 시정심의회(施政審議會)로 개편하는 안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조선인의 전면적인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중추원을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 개혁안은 ①의원 자격을 일본인에게까지 확대하고, ②중요시책에 민의를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 있는 기관으로 삼으며, ③의원 수를 80인으로 늘리고, ④총독부의 입법과 행정 각 분야에 대한 자문과 건의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일본의 패망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개혁안은 기본적으로 중추원이 일제의 식민정책에 매우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중추원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전쟁 협력은 특기할 만하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 예를 들어 중일전쟁 직후에 중추원은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의 요청에 따라 시국강연회를 열기로 하고 9명을 각 지방에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한상룡은 경성·인천, 신석린은 개성·수원, 한규복은 청주·충주·대전, 최린은 전주·군산·남원에 파견되었다. 또한 김명준은 대구·안동·부산, 김사연은 신의주·정주·강계, 유진순은 춘천·철원, 현은은 종성·청진·회령 등에 파견되었다. 또한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国昭)의 요청에 부응하여 윤치호는 육군지원병제도의 의의에 대해 강연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중추원 참여자들은 국방헌금과 국방병기의 헌납, 황군위문단과 북지시찰단 활동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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