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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회[震檀學會]

근대적 아카데미즘을 추구한 조선인 학술단체

1934년

진단학회 대표 이미지

진단학보(제1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1920년대 중반 이후 식민지 조선의 학술지형은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 이 시기는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을 중심으로 관제역사학(官制歷史學)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는 동시에 경성제국대학과 일본 내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연구자가 배출되던 때였다. 일본의 아카데미즘을 체화한 조선인 연구자는 당시의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에 대응하면서 일본 학계와 학문적으로 경쟁하기 위해서는 학회와 학술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역사학, 국어국문학, 민속학 연구자들이 주를 이루어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설립하고, 『진단학보(震檀學報)』를 창간하였다. 회원들은 이를 통해 연구자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였다. 진단학회 회원은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 최고대학의 교수로 자리매김하는 등, 최고 엘리트 집단의 모체가 되었다.

2 조선인 연구자의 학회를 만들다

진단학회의 창립을 보려면, 1920년대 중반 이후 달라진 식민지 조선의 학계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식민지 관제역사학은 크게 세 가지 경로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는 조선사편수회로 대표되는 조선총독부 역사편찬기구의 정비이다. 조선사편수회는 1925년에 등장했으며, 이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편찬이 사료 수집-사료 편찬-『조선사』 편수로 이어지는 일련의 프로세스로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는 경성제국대학의 개교로 식민지 조선에 고등교육기관이 정착되었다는 점이다. 경성제대는 학문연구와 학문 후속세대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셋째, 관제역사학이 학회와 학회지를 통해 대중적 외연을 넓히고 있었다. 1930년에 조직된 청구학회(靑邱學會)가 대표적이다. 청구학회의 회원은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대 출신을 양 축으로 하였으며, 『청구학총』을 발간했다.

한편 조선인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 연구에도 세 가지 경향이 있었다. 첫째, 역사 연구를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경우이다. 안재홍(安在鴻), 정인보(鄭寅普), 문일평(文一平)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총독부의 식민사학에 맞서는 역사연구를 시도했다. 둘째,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들이 등장했다. 백남운(白南雲), 이청원(李淸源), 김광진(金光鎭)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들은 ‘조선 연구’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셋째, 일본 아카데미즘 속에서 공부한 연구자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구성한 학회가 바로 진단학회였다.

이 연구자들은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와세다(早稲田)대학을 비롯해 일본 내 유수의 대학에서 공부하며 일본의 아카데미즘을 체화하였다. 더불어 경성제대 출신도 적지 않았다. 1930년대에 이르면 일본의 대학과 경성제대의 졸업생들, 다시 말해 일본 학계의 아카데미즘을 경험하고 수련한 조선인 연구자가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단학회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몇 가지 조건들이 맞아떨어지며 결성될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1930년대 조선학운동이 발흥하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학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청구학회를 비롯한 관제역사학에 대응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는 이병도(李丙燾), 손진태(孫晋泰), 조윤제(趙潤濟), 이윤재(李允宰), 송석하(宋錫夏) 등, 역사학-국어국문학-민속학 연구자의 결합으로 진행되었다. 더불어 한성도서주식회사가 나서 『진단학보』의 발간을 맡음으로써 학회 창립의 가장 큰 걸림돌인 비용 문제도 해결되었다. 다만 한성도서주식회사는 창간호 이후 『진단학보』 발간에 나서지 않는다. 2호부터는 윤치호(尹致昊)·김성수(金性洙)·김연수(金埏洙)·윤보선(尹潽善)·방응모(方應謨)·윤치창(尹致昌)·최선익(崔善益)·이완영 등의 찬조회원과 이병도·이인영(李仁榮)·노익형(盧益亨)·최규동(崔奎東) 등의 사재(私財)로 발간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조건 속에서 1934년 5월, 24명의 발기인을 중심으로 진단학회가 창립되었다. 회칙 제2조와 제3조에 따라 “조선 및 인근 문화의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잡지를 간행하고 강연회 및 간담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사무소는 경성부 계동 98 이병도의 집이었다.

3 순수학술단체를 지향하다

창립 당시 발기인 24명은 다음과 같다.

고유섭(高裕燮), 김두헌(金斗憲), 김상기(金庠基), 김윤경(金允經), 김태준(金台俊), 김효경(金孝敬), 문일평(文一平), 박문규(朴文圭), 백낙준(白樂濬), 손진태, 송석하, 신석호(申奭鎬), 우호익(禹浩翊), 이병기(李秉岐), 이병도, 이상백(李相佰), 이선근(李瑄根), 이윤재, 이은상(李殷相), 이재욱(李在郁), 이희승(李熙昇), 조윤제, 최현배(崔鉉培), 홍순혁(洪淳赫)

최근의 한 연구는 진단학회의 구성원을 ‘적극회원’-찬조회원-신입 통상회원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적극회원은 총 36명으로 발기인 24명, 위원 17명, 『진단학보』의 논문투고자 21명 중에 중복된 인물을 정리한 숫자이다. 이들을 연구 분야로 분류하면 사학 11명, 국문학 6명, 국어학 5명, 민속학 3명, 고고학 2명, 미술사 1명, 사회학 1명, 불교사 1명, 베트남문학 1명, 일본문학 1명, 윤리학 1명, 종교 1명, 경제 1명, 철학 1명이다. 또한 대학별로 구분하면 경성제대 14명, 와세다대 10명, 도쿄제대 1명, 교토제대 1명, 다이쇼대(大正大) 1명 등이다. 미국 예일대 1명, 오스트리아 빈대 1명, 스위스 프리부르대 1명, 중국 베이징대 1명 등이다. 다시 말해 진단학회는 사학·국어국문학·민속학을 중심으로, 경성제대와 와세다대 출신 연구자가 핵심적으로 활동한 학회였다. 조선인 중에서 1930~40년대에 활동하던 최고의 엘리트 연구자가 모였다고 할 수 있다.

찬조회원은 41명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일보』의 사장이었던 김성수, 방응모, 여운형(呂運亨)을 비롯해 박승빈(朴勝彬), 유억겸(兪億兼), 이윤주(李潤柱) 등, 대표적인 조선인 사립학교의 교장들도 찬조회원이었다. 유명한 실업가와 자산가도 다수 참여하였다. 권덕규(權悳奎), 안확(安廓), 이극로(李克魯), 이능화(李能和), 최남선(崔南善), 황의돈(黃義敦) 등, 학자들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1930~40년대 조선사회와 문화계를 대표하는 저명인사로서 “당시 한국사회의 학술·문화계의 정수분자를 거의 망라한 셈”이다. 이들의 후원은 『진단학보』의 발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진단학보』의 「휘보」를 통해 파악되는 신입 통상회원은 모두 55명이다. 신입 통상회원은 거의 매년 늘어났다. 1935년 5명, 1936년 0명, 1937년 10명, 1938년 9명, 1939년 12명, 1940년 8명, 1941년 11명의 가입이 확인된다. 이들은 학문후속세대로서 진단학회의 예비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직업은 학교 교원, 전문학교 교수·강사, 대학 조수, 연구소 연구원·촉탁, 신문기자, 평론가, 사서, 서점주인 등으로 교육과 연구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다. 총동원체제로 전환되면서 식민권력의 단속과 검열이 철저했음에도 회원이 꾸준히 증가한 것은 진단학회가 대외적으로 ‘순수학술단체’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4 조선인 연구자가 일본 학계와 경쟁하다

진단학회 회원들은 대체로 국내외 대학에서 학문을 위한 훈련을 받고 ‘논문’ 작성 능력을 획득했다. 일본 제국 내에서 만들어진 아카데미즘을 통해 연구자가 되었으며, 연구자로서 일본의 학자들과 경쟁하거나 인정받고자 하였다. 따라서 일본 학계가 세운 아카데미즘의 기준을 철저하게 따랐으며, 실증주의를 신봉했다. 이 속에서 진단학회의 구성원은 스스로 연구자로서의 가능성을 시험하였다.

이들은 일본인 교수를 통해 일본 학계에 접근했다. 이병도는 자신의 학문에 영향을 준 인물로 와세다대의 은사인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도쿄제대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를 꼽았다. 그러나 일본의 대표적인 학술지 『사학잡지』, 『동양학보』, 『역사학연구』 등에 논문을 게재한 이병도, 이상백, 김영건, 손진태 등을 제외하면, 일본 학계가 조선인 연구자를 인정하는 일은 드물었다. 이러한 사정은 경성제대 출신 연구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경성제대 법문학부 산하의 각종 연구회의 잡지들을 이용했다. 이들 역시도 경성제대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이마니시 류(今西龍), 오다 쇼고(小田省吾) 등의 영향을 받았지만, 일본의 학문 사회로 진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제국의 수도에서 활동하는 일본 학회나 학술지와 겨룰 수 있는 수준으로 진단학회 및 『진단학보』를 끌어올리는 것을 지향했다.

한편 이들은 일본어로 학문의 방법을 배웠지만, 학회 활동은 모국어인 조선어로 진행하였다. 예를 들어 『진단학보』는 한글로 간행했으며, 학회명과 학회지명의 영문표기는 일본어가 아니라 한글 읽기가 기준이 되었다. 또한 발행지를 게이죠(京城/けいじょう, 서울의 일본식 표기 방법)이 아닌 서울로 표기했다. 이를 두고 진단학회 스스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민족적’이라고 규정하기도 하였다.

진단학회는 합법적인 학술단체였다. 따라서 활동의 성격은 식민권력에 대항적이지는 않았다. 회의를 진행할 때마다 반드시 사전에 신고하였으며, 형사가 배석하였다. 『진단학보』의 간행은 조선총독부의 사전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때문에 수양동우회 사건(1937), 흥업구락부 사건(1938) 등이 일어났을 때도 진단학회는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구성원들은 학문으로 식민사학을 극복하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진단학회의 학문은 일본의 아카데미즘과 조선학운동, 마르크스주의역사학이 교집합을 이루는 지점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5 해방 이후 최고 엘리트 집단의 모체가 되다

1942년 10월에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자 진단학회 회원인 이병기, 이윤재, 이희승이 투옥되었다. 학회 활동은 중지되었으며, 『진단학보』도 1941년 5월의 14호를 마지막으로 발간되지 않았다.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15일부터 학회 활동 재개를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튿날 열린 총회에서는 송석하를 위원장으로 하는 상임위원 18명이 개선되었다. 이후 국사교과서와 지리교과서 편찬을 미군정(美軍政)으로부터 위탁받아 1946년 5월에 『국사교본』을 간행하였다. 1947년 5월에는 『진단학보』를 복간하였으며, 1959년부터 1965년에 걸쳐 『한국사』 전7권을 출판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학회로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진단학회는 다양한 분과학문의 연구자로 구성되었지만, 한동안 한국사 중심 학회로 인식되고는 했다. 이는 한국전쟁 때 국어국문학, 민속학을 주도한 다수의 인물들이 사망하거나 납북(拉北)되었고, 한국사 연구자들도 상당수가 월북(越北)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의 한 연구는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진단학회 내부의 민속학, 국어국문학의 동력과 좌파적, 신민족주의적 흐름이 사라졌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한편 진단학회는 해방 후 남북한의 최고대학에서 교수직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학회였다. 이병도·손진태·이인영(이상 국사), 김상기(동양사), 이상백(사회학), 이희승·조윤제·이숭녕(국어국문학), 김두헌(윤리학) 등은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김석형·도유호·박문규·박시형·신남철·유응호·이여성·한흥수 등은 김일성대학 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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