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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부[參議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 항일무장투쟁단체

1924년

참의부 대표 이미지

한민 15호(군사위원회 임정 산하 군사단체 기사 사진)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개요

1924년 남만주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할부대로 설립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크게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중앙조직은 조직을 총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방조직은 압록강 변 한인사회를 관할지역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이후 유격전을 통한 국내진입작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관할지역 내의 한인사회를 보호·관할하는 민정 활동도 전개하였다. 1928년 이후 독립운동에 대한 방향성 등을 두고 분열되었고, 세력이 약화되었다.

2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속부대, 육군주만참의부

1922년 10월, 일제는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間島)로 보냈다. 그리고 간도 지방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했다. 이것을 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이라서 ‘간도참변(間島慘變)’ 혹은 경신년에 벌어진 일이라서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부른다. 독립군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독립군 진영을 재정비하고 효과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1922년 8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통의부 구성원들은 이념과 노선이 달랐다. 공화(共和)와 복벽(復辟) 등 이념적인 문제와 함께 군사력을 지휘하는 면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1923년 1월, 복벽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은 통의부를 탈퇴하고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설립하였다. 통의부와 대한의군부는 대립했다.

의용군 제1중대장 채찬(蔡燦) 및 김원상(金元常), 박응백(朴應伯) 등은 갈등을 빚고 있는 독립군 세력을 통합할 구심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주목하였다. 1923년 말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과 협의가 진행되었다. 1924년 4월, 통의부 의용군 1·2·3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소대의 대표들로 구성된 남만군인대표 78명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 포함된 ‘선언서’를 발표했다.

·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할(直轄)임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 우리는 대동 통일의 선봉이 된 것을 내외에 알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통일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힘쓴다.
·우리는 대한민국육군으로 내외 무장 각 단(團)의 가입을 권유하여 가입시킨다.

‘선언서’를 발표한 지 한 달 후인 1924년 5월, ‘선언서’에 참여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 이하 참의부)가 성립되었다. 같은 해 6월, 통의부 의용군 제5중대도 통의부를 탈퇴하고 참의부에 가담하였다.

3 참의부의 조직 형태

참의부 조직은 크게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중앙조직은 조직을 총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방조직은 압록강 변 한인사회를 관할지역으로 편성되었다.

참의부의 중앙조직은 무장투쟁에 초점을 맞춘 조직에서 자치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로 변해갔다. 이것은 내적, 외적 요인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참의부의 초기 조직과 주요 인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참의장 겸 제1중대장 채찬[蔡燦,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 김창천(金蒼天), 독립소대장 허운기(許雲起), 훈련대장 박응백, 중앙의회의장 백시관(白時觀), 민사부장 김소하(金筱廈)

참의부의 중앙조직은 부대 중심으로 편제가 되어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행정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는 부서로는 민사부가 유일했다. 민사부에서는 지방조직을 관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1924년 10월, 참의장 겸 제1중대장인 채찬(=백광운)이 통의부원들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조직이 개편되었다.

참의부 중앙조직이 크게 개편된 시기는 1925년이었다. 1925년 2월 27일, 참의장 최석순을 중심으로 참의부 간부들은 고마령(古馬嶺)에서 군사 회의를 진행했다. 이 소식은 첩자들을 통해 일본 경찰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회의가 열리던 고마령을 급습했다. 이때 참의장 최석순 이하 42명이 순국하고 말았다. 고마령에서 큰 피해를 입은 참의부원들은 조직을 정비하고 새로운 진로를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1925년 4월 명칭을 독판부(督瓣府) 또는 진동도독부(鎭東都督府)라 고쳤다. 참의부의 기본노선은 중앙조직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마령에서 입은 피해를 만회하고 단체 유지를 위해서는 한인사회를 위한 민정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5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특사가 파견되었고, 논의를 거쳐 독판부, 진동도독부라는 명칭을 다시 참의부로 한기로 결정하였다.

1925년 6월 26일, 중앙조직 편제가 개정되었다. 중앙의회는 참의장 1인을 두고 그 아래 군사위원 4명, 민사위원 4명을 둔다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8월 8일 윤성좌[尹聖佐, =윤세용(尹世茸)]를 참의장으로 하는 임원진이 발표되었다. 1927년 3월 이후, 김승학(金升學)이 참의장을 담당하게 되었다.

참의부의 중앙조직 산하에는 군사 조직으로 중대들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참의부 각 중대들은 주로 국내 진입에 유리한 압록강 인근 지역에 주둔했다. 제5중대 소속 부대들만 압록강에서 떨어진 통화현에 위치해 있었다.

참의부는 중앙조직과 함께 한인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한 지방조직을 갖추었다. 참의부의 관할지역은 집안(集安), 관전(寬甸), 환인(桓仁), 통화(通化), 무송(撫松), 장백(長白), 안도(安圖), 유하현(柳河縣)을 포함하는 압록강 부근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약 1만 5천 호 정도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설립 초기 참의부는 관할지역을 나누고 13개의 지방행정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후 행정위원회 별로 인구수를 측정하여 천호(千戶)를 단위로 백가장(百家長)을 임명했다. 백가장 밑에는 십가장(十家長)을 두었다. 한인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에 행정구를 설치하고 50여 명의 경호대 원을 배치했다. 이들은 치안 유지 및 한인들의 재산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백가장 밑에는 보험대(保險隊)라는 특수조직이 편성되었다. 보험대의 주된 업무는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통신 업무였다. 각 중대 및 소속 부대 간의 통신 및 독립군들이 국내 진입을 할 때 안내 역할을 담당했다. 다음으로 독립군의 활동을 위해 관할지역 내 한인들에게 의무금을 징수하는 것이었다. 1927년, 김승학이 참의장이 되면서 13개 지방행정위원회는 7개 행정구로 축소되었다. 각 구에는 행정위원 3명이 배치되었다.

4 항일무장투쟁과 민정 활동의 전개

참의부의 가장 주된 활동은 항일무장투쟁이었다. 참의부 각 중대는 국내 진입이 쉬운 압록강 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평안북도 초산(楚山), 위원(渭原), 만포진(滿浦鎭), 집안현은 참의부의 주요 군사 근거지이며 활동무대였다. 참의부 설립 초기 5개 중대 중 3개 중대가 집안현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부대는 환인현과 통화현에 위치했다. 각 중대는 140여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소속 소대들은 주변 여러 지역에 나누어져 배치되었다. 분산된 지역 사이에 있는 한인 마을에는 통신원을 파견하고 일정 기간 머무르게 했다. 주변 정세를 파악하고, 본부의 지시사항, 일본군의 동정 등을 보고하고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통신원들은 중대나 소대가 자신이 있는 마을에 들어오면 다음 통신원이 있는 지역까지 안내하였다. 통신원들의 안내는 유격대가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는 주요한 방안이었다.

참의부는 설립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국내 진입 작전을 시도했다. 통신원들의 안내로 압록강 변에 도착한 이후 유격대원들은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압록강을 건넌 후 국내 통신원의 집으로 향하였다. 이후 상황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였다.

참의부 소속 독립군들의 주된 국내 활동 지역은 평안북도의 위원, 자성(慈城), 구성(龜城), 강계(江界), 창성(昌城), 후성(厚昌) 등, 압록강과 접한 지역이었다. 참의부 독립군의 활동은 1924년 중반부터 1925년 말까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참의부 부대에서 전개한 항일무장투쟁 중 대표적인 것은 1924년 5월 19일, 압록강 변 마시탄에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공격한 것이다. 참의장 채찬 사이토가 압록강 변 국경수비대를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제2중대 1소대 대원 8명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였고, 평안북도 위원군 마시탄 골짜기에 매복시켰다. 사이토가 탄 경비선이 사격 거리에 들어오자 일제 사격이 개시되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사이토를 태운 국경 순시선은 도주하고 말았다.

1926년 이후 참의부의 국내 활동은 점차 감소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참의부는 신민부, 정의부와 함께 독립군 통합운동을 모색하면서 내부 결속 문제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1925년 6월 조선총독부와 만주 군벌 사이에서 ‘미쓰야 협약(三矢協約)’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1928년에는 재무위원장 한의제(韓義濟)가 친일 단체를 조직하고 참의부를 배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참의부에서는 유격전을 통한 국내 진입 작전 대신 만주 내에서 항일무장투쟁 및 친일파 척결에 초점을 맞추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참의부는 관할지역 내의 한인사회를 보호·관할하는 민정 활동도 전개하였다. 민정 활동의 대표적인 분야는 교육이었다. 먼저 학교를 세워 한인 2세들을 교육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참의부가 관할지역이 주로 산간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시설을 세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한인 마을 곳곳에 소규모 교육시설을 세워 초등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중국당국과 교섭하여 중국 중학교에 한인과(韓人科)를 만드는 데 합의하였다. 이와 함께 집안현 유수림자에 동흥병원, 화전자에 동화병원과 화전자병원, 통화현 대천안에 통동병원을 설치하였다. 한인들의 실업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정미소를 설립하였고, 이익금을 바탕으로 한인들의 영농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1928년경부터, 조직 내에 독립운동의 방향 등을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났다. 1929년, 참의부 일부 인사들은 국민부로 옮겼으며, 김승학을 중심으로 한 인사들은 혁신의회를 만들었다. 참의부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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