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상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1905년 11월 9일 당시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천황의 특사로 파견하여 ‘동양의 평화와 조선의 안전’을 구실삼아 보호조약 체결을 대한제국 정부에 강요했다. 형식상이지만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내각회의를 거쳐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제2차 한일협약)이 통과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됨과 동시에 통감정치가 시작되었다.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의 아래에 1명의 통감을 두며,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주재하면서 직접 한국 황제를 만나볼 권리를 가진다. 또한 각 개항장과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방에 이사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밑에 종래의 일본 영사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을 집행하며 동시에 본 협약의 조항을 실행하는 데 일체 사무를 처리한다"는 내용으로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이 통감에게 있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1906년 2월 1일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였다. 그는 한국 수비군을 지휘하는 원수의 자격도 겸임했다. 통감부 체제의 실시로 한반도에는 명목상이지만 내정은 대한제국이, 외교는 통감부가 관할하는 일종의 ‘이원국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통감부를 ‘조선의 국가유신을 실현하기 위한 기관’으로 부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감부를 통해 대한제국의 내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려 하였다.
헤이그특사사건을 핑계로 일제는 노골적으로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공작에 들어갔다. 우선 1907년 7월 25일에 체결한 한일신협약(이른바 정미칠조약)으로 통감의 권한을 크게 강화시켰다. 통감 부재를 대비하여 친임관 급이 담당하는 부통감제(副統監制)를 신설하여, 죠슈벌(長州閥)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부통감에 임명되었다. 또한 차관을 비롯하여 고위관직에 일본인을 고용하여 내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차관정치도 실시되었다.
고종(高宗)의 양위와 군대해산 등으로 조선인의 저항이 거세지자 군대를 증파하여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가는 한편, 신문지법(1907.7.24.)과 보안법(1907.7.27.)을 공표하여 언론을 봉쇄하였다. 1909년 7월에는 한국의 사법 및 감옥에 관한 사무를 장악하는 데 이어 경찰사무위탁에 관한 각서교환을 통해 경찰권마저 통감부로 귀속시켰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친 뒤 명실상부한 ‘병합’을 실현하기 위해 1910년 5월 30일 일본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게(寺內正毅)가 한국통감에 임명되었다. 7월 23일 경성에 들어온 신임 통감은 ‘병합’을 서둘러 8월 29일에 마무리했고, 일본은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관제를 공포했다. 조선총독을 수장으로 하고 1관방 5부(총무부, 내무부, 농상공부, 사법부, 탁지부)로 구성된 조선총독부의 중앙 관제 조직은 10월 1일자로 공식 출범했다. 지방관제 및 중추원 관제를 비롯하여 경찰, 체신, 전매, 철도 등 식민 통치에 필요한 각종 직제와 집무에 관한 규정이 제정 발포되었다. 총독 테라우치,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를 비롯하여 식민 통치를 담당할 인물들도 대거 임명되었다. 이로써 통감부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05년 11월 22일 통감부 및 이사청을 설치하는 건(일본국 칙령 제240호)이 공포되어, 통감부를 서울에, 이사청을 서울, 인천, 부산, 원산, 진남포, 목포, 마산 기타 필요한 곳에 두어 ‘을사조약’에 따른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12월 20일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일본국 칙령 제267호)가 전 33조로서 반포되었다.
1906년 2월 1일 통감부와 부속 관청을 개설할 당시에는 통감 이토를 비롯하여 총무장관에 스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 , 농상공무총장에 기우치 쥬지로(木內重四郞), 경무총장에 오카(岡喜七郞)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통감부 설치 이전 일본 정부의 추천을 받아 된 한국 정부의 고문은 통감의 감독을 받게 되고, 보좌관·교관 등의 이름으로 각 부(部)에 배속되었다. 이 가운데 재무와 경무에는 많은 일본인을 고용 배치하여 마치 일본 내각처럼 만들었다. 이렇게 일본은 통감부를 통해 한국의 각 부와 국에 일본을 임용해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여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통감부는 출범 당시 3부 16과 체제였다. 총무부에 비서과, 서무과, 외사과, 내사과, 법제과, 회계과, 토목 및 철도과 등 7과, 농상공부에는 상공과, 농무과, 광무과, 수산과, 산림과 등 5과, 경무부에는 고등경찰과, 경무과. 보안과, 위생과 등 3과가 편재되었다. 1907년 10월 9일 통감부사무분장규정개정(통감부 훈령 21호)으로 통감부는 총무부의 맥을 잇는 통감관방과 감사부, 지방부 등 신설된 부서와 외무부를 합쳐 4부 체제가 되었다.
총무부는 통감을 보좌하는 업무를 위주로 하며, 시기와 필요에 따라 소속과를 개편하면서 그 임무를 수행했다. 비서과는 기밀문서 및 전신 업무를 취급했고, 서무과는 관리들의 진퇴 및 서훈 등과 관련 인사문제를 다루었다. 나머지 부서들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데 필요한 임무인 정보수집, 사법제도의 개편, 철도 및 도로 건설 등을 담당했다. 통감관방은 문서, 인사, 회계 3과 체제였다. 문서과는 주로 문서접수 및 기밀문서 등을, 인사과는 관리 촉탁원 및 고용원들의 진퇴 및 서훈 및 서훈에 관한 것을, 회계과는 재정운영을 담당했다. 총무부의 업무를 계승하면서 주로 총독을 보좌하는 비서의 기능이 강화된 것이다.
외무부는 1907년 3월 5일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개정(일본 칙령 제15호)」 때 외교 업무를 전담하는 외무총장직이 생기면서 설치되었다. 그리고 통감부외무총장 임용에 관한 건(일본 칙령 제18호)에 따라 외교관직에 있는 자 가운데 문관고등시험위원의 전형을 경유하여 임용했다. 이어 통감부사무분장규정(1907.4.27.)으로 외무부가 출범하면서 한국과와 외국과를 두었다. 한국과는 한국정부와의 교섭에 관한 사항, 외국인에 관한 사항, 알현 및 서훈에 관한 사항을 담당했고, 외국과는 각국 영사관과의 교섭에 관한 사항, 외국인에 관한 사항, 조약 및 취극서(取極書)에 관한 사항을 맡았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체결되고 이어 통감부 조직 개편이 이뤄지면서 외무부 조직도 개편된다. 통감부사무분장규정 개정(1907.10.9.) 때 과 단위가 폐지되고 외무부 단일 직제로 바뀌었다. 1909년 10월에는 외무부의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영사관 및 외국인과 한국인의 심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외무부는 1910년 8월 합방 때까지 유지되었고, 조선총독부 관제가 공포되면서 외사업무는 총무부 외사국(外事局)으로 변경되었다.
농상공부는 1906년 2월 1일에 설치되었으며 한국의 농상공무(農商工務)를 관장하는 칙임관 또는 주임관으로 농상공무 총장을 두었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체결로 외무, 농상공무, 경무 3총장을 폐지하고 대신 각 부장이 총무장관 또는 참여관이 되어 각기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농상공부는 대한제국의 지배를 위해 개발 가능한 재원을 조사할 목적으로 설립되어 연초와 인삼, 농지와 개간지, 광산, 어업 등 한국의 경제상황과 재원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실시하였다.
경무부도 1906년 2월 1일 총무부, 농상공부와 함께 설치되었다. 설립 당시 경무부는 고등경찰과, 경무과, 보안과, 위생과로 조직되었다. 한일신협약의 체결로 경무부가 폐지되었다. 통감부는 1907년 7월 27일 경무청 관제를 개정하여 경무청을 경시청으로 경무사를 경시총감으로 개칭하고, 경무고문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가 경시총감으로, 마츠이 시게루(松井茂)가 내부 경무국장으로 임명되어 한국 내 경찰권을 장악했다. 1910년 6월에는 한국의 경찰사무를 위탁하는 한일약정각서를 체결, 이어 경시청 관제를 폐지하면서 7월 13일 통감부 경무총감부 분과규정을 공포하였다. 이 규정으로 경무총감부에 총장관방, 기밀과, 경무과, 보안과를 두어 한국의 경찰조직을 식민통치기구로 편입시켰다. 1910년 8월 29일 합병조약 이후에는 헌병사령관이 경무총감을 겸임하여 조선 전체의 경찰사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감사부(監査部)는 통감부사무분장규정 개정(1907.10.9.)으로 통감관방(統監官房), 외무부, 지방부와 함께 설치되어 ‘합방’ 때까지 유지되었다. 주요 기능은 법령 및 처분의 심사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국정 전반의 감사 특히 재정 감사 업무를 담당하였다.
일제는 통감부 설치와 함께 한국의 각 지방에서 일본인들의 활동과 이익을 보장하고, 지방행정을 장악하기 위해 이사청을 설치, 운용하였다. 1906년 1월 부산·마산·군산·목포·경성·인천·평양·진남포·원산·성진 등 10개소에 이사청이 설립되었다. 과거 개항장으로 영사관이 설치된 곳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8월에는 대구, 11월에는 신의주, 1907년 12월에는 청진에도 이사청이 설치되어 전국의 이사청은 총 13개소가 되었다. 이사청은 1910년까지 존속했으며 지방행정을 직접 감독·감시하는 역할보다는 조선 거주 일본인들을 지원·통제하는 업무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1910년 1월, 일본 내각 총리와 통감은 이사청과 지방행정을 통합함으로써 지방행정을 일원화한다는 방침에 합의했다. ‘병합’ 이후 지방제도 정비를 통해 이사청은 폐지되고, 이사청 소재지에는 부(府)가 설치되었으며, 일본인들로 구성된 이사청의 이사관(理事官)들은 부를 대표하는 부윤이 되었다.
이사청은 통감부 직속기관으로 통감부와 함께 국권 침탈의 선봉에 선 기관이었다. 이사청은 이전의 공사관·영사관 업무를 대신하여 조선 거주 일본인이나 일본인 관헌과 관련된 사항을 총괄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강화된 권한으로 해당 지방 관헌을 지휘·감독하고 사무의 집행을 감시했다. 이사청은 소재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각종 활동을 보장했으며 이사청 소재지뿐만 아니라 관할지역 내 주요 지역에 거류민단, 거류민회, 일본인회 등의 설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일본인들의 증가와 함께 일본인을 위한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조합이 설립되고 해당 이사청의 이사관 책임으로 학교조합을 운영했다. 이사청은 이사청령(理事廳令)을 발하여 이사청 소재지에서 시행하기도 했다. 이사청령으로 정한 사항은 ‘병합’ 이후 이사청이 폐지되면서 도령(道令)으로 계승되었다.
이사청의 주요 업무는 조선 식민지화를 보조하는 조선 거주 일본 민간인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일본인에게 사업권이나 광업권을 허가하는 등 특혜를 주었고, 의병운동으로부터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 조치를 강구했다. 이사관은 ‘안녕질서를 위해 긴급할 시’에는 통감의 명령 없이도 직접 지방 주재 일본군 사령관에게 출병을 요청할 수 있었으며 이사청에 배치된 경시, 경부, 순사들에 대한 지휘권을 가졌다.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1906년에는 이사청령으로 의병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총기 소지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각 이사청에서는 신문 발매를 금지하거나 압수하는 등으로 한국인의 언론활동을 탄압했다. 이사청은 초기 식민지화의 첨병으로 치안 유지와 시정 개선의 명목으로 식민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는 기구였다고 할 수 있다.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에 따르면 통감은 일본 천황에게 직접 예속하는 친임관(親任官)으로 일본정부를 대표하며, 필요시에는 언제든지 한국 황제를 알현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통감은 한국의 외교에 관해서는 일본 외무대신을 거쳐 내각 총리대신을, 기타 사무는 내각 총리대신을 거쳐 상주하여 재가를 받게 되어 있었다(제2조). 통감은 한국에 대해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일본주차 외국 대표자를 제외한 한국에서의 외국 영사관 및 외국인에 관한 사무를 통할하고, 한국에서의 일본관리 및 관청이 시행하는 여러 업무를 감독하는 지위였다(제3조). 아울러 통감은 한국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한국 수비군 사령관에게 병력 사용을 명령할 수 있으며(제4조), 통감부령을 발하고 금고 1년 이하 또는 벌금 200원 이내의 벌칙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제7조). 그리고 이사청의 위치 및 관할구역을 정하는 것도 통감의 직무였다(제22조). 통감 유고시에는 한국 수비군 사령관 또는 총무장관이 임시통감의 직무를 대행하였다(제13조).
한일신협약으로 종전의 ‘고문정치’는 ‘차관정치’로 전환되었다. 이를 계기로 통감은 한국의 시정을 직접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통감은 통감관저에서 한국정부 대신들을 소집하여 시정개선협의회를 열었고, 또 통감부 총무장관 및 각 참여관과 한국정부 각부의 일본인 차관들이 참여하는 참여관 회의를 소집하여 직접 중요사무를 심의하고 집행을 지시했다. 한국정부는 법령 제정 및 주요한 행정 처분을 내릴 때 그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칙령·법률을 제정하려면 먼저 내각 또는 각부의 초안을 내각회의에서 논의한 후 황제에게 결재를 청하는 문안을 만들어 통감부에 넘기고, 통감의 승인이 나면 황제에게 상주하여 결재를 받아 반포했다. 한국 고위 관리의 임명과 면직 과정에도 통감의 동의는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외국인은 통감의 동의 없이는 관리로 임용할 수 없었다.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관리로 임용해야만 했다. 또 이 조약에 부수되었던 비밀각서에 의거하여 일본인이 한국 내각의 차관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군대는 해산되었고, 다수의 일본인들이 사법과 경찰 분야에 진출하게 되었다. 통감은 외교권뿐만 아니라 사법권, 경찰권, 행정권 등 한국의 정무 전반에 걸쳐 정책을 관철시킬 권한을 갖게 됨으로써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