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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연합군과 함께 일본에 맞서다!

1940년

한국광복군 대표 이미지

광복군 제2지대의 영문 약자(K.I.A. 2)를 그리는 지대원들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1940년 9월 15일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이다. 흔히 약칭해서 ‘광복군’이라고 불린다.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1940년 9월 15일 「한국광복군선언문」이 발표되었고, 9월 17일에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典禮式)이 거행되었다. 창설 당시 총사령은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은 이범석(李範奭)이 담당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1년 일본, 1945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방침에 따라 한국광복군은 영국군과 함께 인도, 미얀마 전선에 참여했다. 또한 미국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과 합작하여 국내에 침투 작전을 수행하려고 하였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미군정은 한반도 내에 어떤 정부나 군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광복군 소속 인사들은 개인 자격으로 국내로 들어와야 했다. 1946년 5월 16일 광복군총사령부가 ‘한국광복군복원선언’을 발표하면서 실질적으로 활동을 종료하게 되었다.

2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 창설을 위한 노력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군대를 창설한다는 계획은 1919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발표하였으며, 무관학교를 성립하고 만주 지역에 있는 독립군 부대를 관할 하에 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에서의 노선갈등, 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구체화되지 못하였다.

1932년 4월 상하이 흥커우 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尹奉吉義擧)’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國民黨)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934년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었고, 이곳에 있는 학생들은 군사간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수가 있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무장부대 건립을 시도했다. 하지만 일본의 중국 점령 지역이 확대되면서 본거지를 여러 곳으로 옮기게 되었고, 광복군 창설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3 한국광복군의 창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한국광복군 창설을 서둘렀다. 1940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광복군의 창립과 활동을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중국 총통 장제스(蔣介石)는 “한국광복군을 국민당군의 지휘 아래에 둔다”는 조건으로 군대 창설을 승인했다.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및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선언서에는 한국과 중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지 2일 후인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현지 한국 거류민, 중국 국방성에서 파견한 군관들이 참여한 가운데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典禮式)’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한국광복군을 이끌어갈 인물로 총사령 지청천(池靑天), 참모장 이범석(李範奭), 총무처장 최용덕(崔用德), 참모처장 채원개(蔡元凱), 부관처장에 황학수(黃學秀), 경리처장 겸 정훈처장 안훈(安勳), 훈련처장 송호(宋虎), 군무처장 유진동(劉振東)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산하에는 1, 2, 3지대가 편성되었다. 하지만 3지대가 문서상으로만 존재하였고, 1941년 1월 시안(西安)을 중심으로 공작 활동을 펴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제 5지대로 편입되면서 실질적으로 한국광복군은 1, 2, 5지대로 구성되었다.

1942년 5월 충칭(重慶)에 잔류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본부 병력 100여명이 제1지대로 편입되면서 광복군의 편제는 1, 2, 3지대로 개편되었다. 제1지대는 조선의용대 본부가 개편된 것이었으며 지대장은 김원봉(金元鳳)이 담당하였다. 제2지대는 이전 1, 2, 5지대를 통합한 부대였으며 지대장은 이범석이 맡았다. 제3지대는 안후이성(安徽省)과 푸양(阜陽)에서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설치했던 징모 제6분처를 개편한 것이었고, 지대장은 김학규(金學奎)가 임명되었다. 각 지대는 중국 전역에서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공작원을 파견하였다. 모집된 병력들은 중국 군관학교 분교에서 훈련을 받았고 이후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광복군 병력은 창설 당시 30여명에 불과했으나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1941년 11월 중국 군사위원회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9個準繩)」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국광복군 창설을 승인하는 대신 “한국광복군의 작전권, 인사권 등은 중국이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것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에게 지속적으로 광복군의 지휘통수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며, 1945년 4월 이것을 회수 할 수 있었다.

4 인면전구공작대의 활약과 한미공동작전 추진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2년 경 영국군과 중국군은 미얀마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영국군은 일본군에 대한 대적선전 및 첩보 수집을 위해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을 활용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군사합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43년 5월 김원봉과 영국군 대표 맥켄지(Colin Mackenzie)는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 조직계획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1943년 8월 말 인도주둔 영국군의 대일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대장 한지성(韓志成) 등 9명의 한국광복군으로 구성된 인면전구공작대가 인도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1943년 9월 9일 뉴델리에 도착하였고 12월 10일까지 약 3개월간 인도군총사령부에서 영어 및 방송기술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후 대원들은 영국군에 분산되어 배치되었다가 1944년 초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미얀마 접경지역인 임팔전선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는 날까지 영국군을 도와 일본군 포로 심문, 정보수집 등과 같은 활동을 펼쳤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 수뇌부는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북상하고 있던 미국의 존재에 주목하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대일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한인독립운동세력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일치하였고 그 결과 1945년 초부터 한국광복군과 미국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의 합작 훈련에 대한 교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45년 1월 31일 일제에 의해 징병되어 학병으로 끌려갔던 한인청년들이 탈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찾아왔다. 이들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사건은 중국, 미국 등 연합국의 주목을 받았다. 국내에서 중국으로 온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일본군에서도 복무하였기 때문에 정보원으로써 이들의 가치는 매우 컸다. OSS는 이들을 주목하였고, 한국광복군과 OSS의 합작교섭은 활기를 띄게 되었다.

1945년 2월 OSS에서는 한국광복군과 연계하여 작전을 편다는 내용의 ‘독수리작전’을 승인하였고, 중국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협의 하에 실행되게 되었다. 이 계획은 60여명의 요원을 선발하여 3개월 동안 정보수집ㆍ보고ㆍ통신 훈련을 실시 한 후 그 가운데 45명을 1945년 여름에 국내의 5개 전략지점에 나누어 침투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후 주요 시설을 파괴하거나 점령하게 한 후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하려고 하였다. 시안(西安)에 주둔한 광복군 제2지대를 중심으로 OSS에서 파견된 싸전트(Clyde, B.Sargent) 대위와 윔쓰(Clarence, N.Weems) 대위의 지휘 아래 1945년 봄부터 국내침투 공작 훈련이 시작되었다. 1945년 7월 말 제1기생 50명의 훈련이 종료되었으며, 8월 4일에는 38명이 수료를 하였다. 하지만 이틀 뒤인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일주일 뒤에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게 되면서 이 작전은 취소되었고 실시되지 못하였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김구는 그의 자서전인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라고 회상하였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고 국내잠입을 준비하던 광복군의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5 일본의 항복 이후 한국광복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에서 전후처리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 원칙은 현 체제를 유지한 상태로 국내로 돌아가고, 후에 민의에 따라 정부를 재조직한다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중국 측에 중국에 있던 일본군 중 한국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한국광복군으로 편입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을 한국광복군의 ‘확군(擴軍) 사업’이라고 부른다. 한국광복군 ‘확군 사업’의 목적은 규모를 확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귀국 후 군대를 창설하는 데 기초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주둔 일본군 소속 한적장병(韓籍將兵) 및 중국거주 교민들 중 한인청년들을 적극적으로 포섭 하려고 하였다.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고 일본군이 중국군에 항복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일본군에는 한국 국적을 가진 병사들의 많았고 이들에 대한 처리문제가 대두되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 이청천은 한적장병을 포용하기 위해 한국광복군 관할 지역에 있는 일본군 점령지역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중국의 주요도시에 광복군 잠편지대를 설치하도록 지시하였다. 1945년 10월 한구지대, 남경지대, 항주 지대, 상해 지대, 북경 지대, 광동 지대, 국내 지대 등 총 7개 잠편지대가 설치되었다.

한국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지대별로 훈련을 하며 귀국 할 시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군정은 한국광복군이 군으로써 귀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미군정의 이러한 방침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1945년 12월 한국광복군의 ‘확군 활동’을 금지하였고, 한국인들의 강제송환을 결정하였다. 한국광복군 전원은 교민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1946년 2월부터 6월까지 한국광복군의 귀환이 이루어졌다. 1946년 5월 16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는 ‘한국광복군복원선언’을 발표하였고, 결국 한국광복군의 활동은 실질적으로 종료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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