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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

수도 서울에 전찻길과 전깃불을 보급하다

1898년(고종 35)

한성전기회사 대표 이미지

한성전기회사

한국전력공사 전기박물관

1 개요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란, 1898년 1월 황실 자본을 토대로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설립된 전기회사로, 대한제국기 전력산업진흥을 도맡았다. 주로 서울 시내의 전차 및 전등 부설사업을 수행하였다. 1880년대부터 꾸준히 표출된 전력산업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한성전기회사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전력사업 자체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산업발전 및 근대화의 방식을 둘러싸고 이견을 보였던 국내 정치 세력은 갈등과 대립을 거치며 결국 회사 경영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성전기회사는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극에 치달았던 국제정세 속에서 한미합자회사로 개편되었다가, 1909년 일본의 민간자본가가 설립한 가스회사에 인수되었다.

2 ‘도깨비불’, 건청궁(乾淸宮)의 밤을 밝히다

1887년 이른 봄, 건청궁의 밤이 환하게 밝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경복궁 후원인 향원정(香遠亭) 주변은 그 광경을 보려고 모인 사람들로 북적였다. 1878년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에디슨전등회사(Edison Electric Light Campany)를 설립하고 백열전등을 상용화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전깃불이 조선의 밤을 밝혔던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이른 전등 도입이었다.

조선 정부가 추진한 전등 도입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고종은 1870년대 후반부터 1880년대 초반에 걸쳐 다른 나라의 근대화 과정을 살피고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일본, 중국, 미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중 1883년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는 당시 전등 및 전차 사업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미국의 전력산업 발전현황을 직접 체험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보빙사의 보고를 토대로 조선 정부는 미국에서 전등시설을 수입하고자 했으나 그 계획은 곧 잠정 중단되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결국 2년 뒤인 1886년 말 에디슨전등회사에서 전등설비를 구입하여, 1887년 초 경복궁 내 건청궁에 백열전등 750등 규모의 전등소(電燈所)를 설립하였다. 당시 건청궁을 밝혔던 전깃불은 ‘도깨비불’이라고도 불렸다. 발전기에서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전등이 자꾸 깜빡거려 생긴 별명이었다.

이후 고종은 전등을 민간에 확대 공급하고, 한성 시내에 전차를 운행하는 등 전력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였다. 그 결과 1898년 1월에 설립된 것이 바로 한성전기회사였다. 이후 한성전기회사는 전차, 전등, 전화 등 대한제국기 근대산업육성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전력개발 사업을 도맡았다.

3 대한제국기 전력산업의 형성 : 한성전기회사의 설립과 운영

전력산업은 근대 상공업 발전에 필수적인 조명과 동력을 제공하는 기반이자 기초산업(basic industry)으로, 산업혁명에서 공업화의 발전을 이끄는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전기는 석유등, 증기기관, 마차철도, 취사·난방기구 등 기존의 생활용품을 대체하면서 근대 도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 앞서 보았듯, 조선 정부에서도 일찍부터 이러한 전력산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제 중심의 정국 운영이 가능해지자, 철도, 광산 등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근대산업육성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전력개발 또한 그 일환이었다. 이를 담당했던 한성전기회사의 설립과정을 살펴보자.

주조선미국공사관 서기관(書記官) 알렌(Horace Newton Allen)에 따르면, 전차 부설 요청이 제기된 것은 1896년 말경이었다. 대한제국에서는 한성판윤(漢城判尹) 이채연(李采淵)이 전차 부설을 위한 중개역할을 맡았다. 이채연은 주미공사관에 근무한 경험이 있어 영어에 능통했으며, 알렌을 비롯한 미국인들과도 친밀했던 친미개화파의 핵심인물이었다. 그에 더해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여러 민간회사의 설립과 경영에 나선 경험도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다. 알렌은 전차 부설 사업을 맡을 미국인 기업가로 콜브란(Henry Collbran)을 추천했다. 콜브란은 미국에서 철도회사의 총지배인, 사장 등을 역임한 철도 부설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당시 경인철도 부설사업의 도급공사를 맡아 한국에 진출한 상태였다.

1897년 말, 이채연과 콜브란은 전기회사 설립의 구체적인 안을 마련했다. 광무황제의 내탕금 10만 원과 경인철도회사(콜브란측)로부터 받은 차관 10만 원을 합쳐 20만 원의 자본금으로 전기회사를 설립하여 한성부 내에 전차, 전등, 전화를 공급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즉, 황실과 미국 자본이 파트너십을 체결하여 한국 내 전력개발을 추진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황실이 미국 자본과 결합하여 전기회사를 설립하는 일은,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러시아의 방해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한성전기회사가 황실과 미국인의 투자를 숨기고, 민간회사의 틀을 빌려 설립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1898년 1월 18일, 이근배(李根培)와 김두승(金斗昇)은 농상공부에 한성전기회사의 설립을 청원하였다. 이 청원은 곧 승인되어 1월 26일 농상공부의 회사 설립 인가를 받았다. 민간인을 설립청원인으로 내세웠지만, 사실상 고종이 단독 출자한 자본금(황실 자본)을 토대로 미국의 기술을 도입한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이후 계약 체결을 주도한 이채연이 한성전기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서울 시내 전차 부설사업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본선, 청량리선, 용산선 등 전차 부설사업은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전등 공급사업 또한 전등설비 설치 계약 등을 체결하면서 공사 착수일을 조정해나갔다.

한성전기회사의 운영 방식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당시 콜브란 측은 형식적으로 한성전기회사의 공사를 수주받은 건설청부업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회사의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성전기회사가 전차부설 공사에 들어간 자금 41만여 엔 중 착수금을 제외한 나머지 중도금과 잔금 등을 결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899년 8월 22일, 한성전기회사와 콜브란 측 사이에 ‘저당권 설정계약’이 체결되었다. 기한 내 채무를 청산하지 못하면 저당권자인 콜브란 측이 회사의 재산을 임의로 처분하는 것에 합의한 것이다. 콜브란측은 이러한 부채를 빌미로 저당계약과 운영계약을 체결하여 회사의 재산과 특허권을 저당하고, 부채가 상환될 때까지 운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한성전기회사는 명목상으로는 한국인 민간회사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실 기업이었다. 그 성격은 황실과 미국 자본의 파트너십에 가까웠다. 이러한 회사 운영 방식은 당시 개화파의 ‘민간 중심적 상공업 진흥정책’에서 비롯되었다. ‘민간 중심적 상공업 진흥정책’이란, 정부가 주도하기보다는 민간자본을 활용한 회사 설립과 산업발전을 지향하는 상공업 진흥정책이다. 만일 민간자본만으로 사업 진행에 한계가 있을 경우, 해외자본의 직접투자를 유치하여 이를 타개하는 것이 주요 방식이었다. 한성전기회사는 전력산업 개발에 대한 고종의 관심과 해외자본 유치를 통한 산업개발이라는 개화파의 정책 구상이 만나 이루어진 합작품이었다.

4 한성전기회사에서 한미전기회사로, 결국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로

한성전기회사의 전력공급사업은 순항 중이었지만 회사 안팎으로는 갈등이 속출했다. 갈등의 주요 원인은 한국 내 정파 간의 권력쟁탈전이었다. 당시 한국 정계는 이용익(李容翊)을 위시한 황실 측근파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콜브란 측의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던 친미개화파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면을 맞이했다. 결국 이용익은 1899년 독립협회 해산을 계기로 황실과 정부의 재정을 장악하며, 황실 산하 궁내부 주도로 각종 근대산업육성정책을 추진해나갔다. 이렇듯 이용익과 친미개화파의 갈등은 단순한 권력다툼이 아닌, 근본적으로 군주권 중심의 ‘정부 주도’ 혹은 군주권 제약의 ‘민간 주도’라는 근대화의 방법에 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890년대 말의 복잡한 정국에서, 친미파의 거두였던 한성전기회사 사장 이채연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어 독살설이 퍼졌다. 그 배후에 이용익이 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이후 이용익은 한성전기회사의 임원으로 들어가 회사에 대한 자금 지원을 철저히 통제하는 한편, 콜브란 측의 사업 확장계획을 철저히 봉쇄해나갔다. 콜브란 측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철도 부설사업과 관련한 채무상환을 독촉하며 이용익을 압박해나갔다. 이용익은 콜브란 측의 청구권이 과다하게 부풀려졌다는 내용의 ‘브라운 보고서(Brown Paper)’를 기반으로 콜브란 측의 채무상환 요청을 반박하며, 채무분규를 장기전으로 만들었다. 여기에는 한성전기회사의 경영권을 독자적으로 장악하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903년 9월, 한 소년이 전차에 치여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차 승차를 거부하는 군중시위가 발생하는 등 전차운영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해결될 기미가 없이 길어지는 채무분규, 국내의 여론 악화 등의 상황이 겹치자 결국 콜브란 측은 한국 내에서 전력사업의 철수를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뜻밖에도 이러한 이용익과 콜브란 측의 갈등은 1903년 말에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이는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고조되던 국제정세의 변화에 발맞춘 것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한반도 중립화를 추진하면서 전시국외중립선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약소국의 중립화 정책 추진에는 다른 열강의 지지와 협력이 필요했다. 그중 미국은 주요한 협력대상국이었다. 고종은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콜브란 측과의 채무분규 타결을 서둘렀다.

1904년 2월 19일, 한성전기회사의 채무분규를 타결 짓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고종이 현금과 어음을 합쳐 75만 엔을 지급하는 대신 양측 간의 모든 요구를 상호 철회하며,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를 설립하여 모든 권리와 자산을 인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미전기회사의 경영권은 콜브란 측이 갖고, 회사 주식의 절반은 고종이 인수하여 대주주로서 회사 경영에 관여하는 방식이었다. 이로써 콜브란 측은 합법적으로 한성전기회사의 경영권과 소유권을 장악할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제1차 한일협약의 체결과 함께 대한제국에서 시정개선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는 그동안 대한제국이 자주적으로 추진했던 각종 개혁사업을 흡수, 해체, 장악하는 과정이었다. 근대 상공업 발전의 기초산업인 전력산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콜브란 측과의 분쟁을 피하면서 원만하게 대한제국의 전력산업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한미전기회사의 권리를 매수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전면에 나설 수 없었던 상황에서, 등장한 것은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오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과 같은 민간자본가들이었다. 이들 민간자본가는 통감부, 특히 조선통감(朝鮮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일한와사주식회사(日韓瓦斯株式會社)라고 하는 가스회사를 세워 한미전기회사의 영업에 압박을 가하고 궁극적으로 이를 매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한와사회사는 창립 이후 한미전기회사의 매수 협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결국 1909년 6월, 콜브란 측과의 협상을 거쳐 일한와사회사에서 한미주식회사의 자산과 권리를 모두 인수하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회사 이름은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日韓瓦斯電氣株式會社)로 변경되었다. 이로써 일한와사전기회사는 한국의 수도 서울에 전기, 전차, 가스를 독점 공급하는 독점기업으로서의 기반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일한와사전기회사의 설립 과정은 곧 한국의 전력산업이 식민지경제구조 속으로 포섭되어 가는 사전 단계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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