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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협회

고종을 보위하라

미상

1 개요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엄한 감시와 위협 속에서 지냈던 고종은 러시아 공산관으로 피신함으로써(아관파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고종이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은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창립되었다. 독립협회는 초기에는 전현직 고위관료들이 주로 참여하고 있으면서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설하고 정부의 개화정책을 지지・보족하는 계몽단체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1898년에 접어들자 비관료출신, 청년들이 독립협회에서 전면적으로 등장하면서 정치운동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대한제국 정부가 러시아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과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에게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탄핵하였다. 1898년 여름부터는 한발 더 나아가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권력개편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급기야 1898년 10월에는 만민공동회가 개최되면서 정국의 주도권이 독립협회로 넘어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황국협회는 고종과 보수파 관료들을 이와 같은 독립협회를 견제하고 대한제국 정부를 보위시키려는 목적 하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2 황국협회의 결성

황국협회는 이기동(李基東), 고영근(高永根), 홍종우(洪鍾宇), 길영수(吉永洙) 등 소위 ‘황실파 관료’들이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다. 이들은 대한제국기 내장원경(內藏院卿) 및 전환국장(典圜局長), 탁지부대신 등을 역임하며 황실의 재정을 담당하였던 고종황제의 심복 이용익(李容翊)의 최측근세력이었다. 그밖에도 황국협회 발기인에는 을미사변 이후 의병에 관계한 허위(許蔿), 이상천(李相天), 이문화, 황보연, 이건중, 채광묵(蔡光默) 등 참여하였다. 또한 조병식, 심상훈, 민영기, 신기선, 한규설 등과 같은 정부고관들도 황국협회를 후원하였다.

황국협회는 1898년 6월 결성되어 7월 7일 옛 훈련원 자리에서 발회식을 거행하였다. 황국협회는 “나라를 문명부강케 하는 도리는 황실을 존중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는 큰 뜻을 밝힌다”라고 천명하고 ‘농상공 실업을 주의로 할 것’을 설립취지로 정하였다. 전 농상공부대신 정낙용(鄭洛鎔)을 초대회장으로, 이기동을 부회장으로 하고, 이하 총 107명의 임원을 두었다. 9월 정낙용이 사임한 이후 이기동과 고영근이 각각 회장과 부회장이 되었다.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칙임 간부를 총 17명이나 두었는데, 이는 황실에서 황국협회에 대한 영향력을 강하게 가지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구성원 대다수는 보부상들이었지만, 일반인들도 입회하고자 하는 자가 상당했다. 황국협회는 창설되자마자 급격히 세력이 확대되었다. 특히 창설 주도 멤버였던 이기동이 그해 10월 법부 협판이 되고, 그 외에도 중추원 의관 등 관직에 임명되는 자가 나타나면서 더욱 크게 확대되었다.

3 근대 보부상과 황국협회

황국협회에 참여한 주요세력 중 대다수는 보부상이었다. 이들이 황국협회의 주요세력이 된 데에는 고종 집권 이후에 형성된 보부상과 조선 왕실 사이의 밀월관계에 기인했다. 원래 보부상(褓負商)은 봇짐장수를 뜻하는 보상과 등짐장수를 뜻하는 부상을 합쳐 부르는 말로써 지방장시를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상품유통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이들의 수와 세력이 점차 증가했고 개항 이후에는 외국상품 수입되면서 개항장과 내지 사이의 중개인으로서 활약하였다.

19세기 초중반부터 보부상들이 집단행동을 하거나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는데,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행상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조직체를 형성하고 규칙을 제정하여 상거래의 분쟁을 방지하거나 상호 구제 및 경조사를 함께 하는 등 내부적으로 단결력을 높였다. 1868년(고종 5)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 대원군은 보부상들을 의병으로 동원하여 전투를 참여하게 했고, 이후 중앙정부와 보부상과의 관계가 밀접해지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의 하야 이후에는 보부상들이 민씨척족의 별동대로 활약하였다. 그런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 군민들이 민씨척족 및 개화파 관료를 공격하고 왕후 민씨가 도망가는 사태가 발생하자 보부상은 군란 진압에 참여하였다. 특히 보부상들은 충주의 장호원으로 피신한 왕후 민씨 측의 연락과 호위를 담당하였는데, 함경도 출신의 보부상이었던 이용익이 이후에 빠르게 출세하여 고종의 심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때의 활약이 계기가 되었다.

임오군란 시기 보부상 조직의 힘을 확인한 민씨정권은 이들을 군대로 편입시키려고 하여 1883년(고종 20) 4월 삼군부(三軍府)에서 통합적으로 보부상 조직을 관리하며 준군사조직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하였다. 하지만 보부상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상업에 있는 이상, 이들은 상업과 군사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조직의 성격을 갖추기를 희망하였다. 게다가 조선 정부가 청나라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 이후에는 그동안 개항장 안에서의 상업활동만 인정되었던 외국상인들이 제한적이지만 내륙통상권과 연안무역권을 갖게 되면서, 보부상들의 상업활동은 크게 제약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보부상은 정부 관할 아래 자신들의 명의로 상국(商局)을 설립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하였고, 결국 ‘혜상공국(惠商公局)’이 탄생하였다.

그런데 보부상들이 정부와 결탁하여 세력이 커지고 권한이 막강해지자 백성들을 침학하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1885년(고종 22) 8월 혜상공국을 내무부 소속으로 옮기면서 명칭을 상리국商理局)으로 고치고, 보부상들을 철저히 관리하게 하였다. 상리국 설치 이후에도 보부상들의 작폐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에게 여러 가지 특권, 그 중에서도 상업세를 징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는데, 여타 소상인들이나 농민들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했을 때 농민군의 요구조건에 보부상과 그 지방조직인 임방(任房)의 혁파가 포함되기도 하였다.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13조목의 청원서를 제출하는데, 그 중 하나가 보부상 조직의 혁파였다.

결국 보부상 조직은 갑오개혁이 진행되면서 개혁 대상에 오르게 되어 1895년(고종 32) 3월 상리국 및 산하 각 지방임방은 해체 결정을 받게 되었다. 보부상 조직들의 주요권한이었던 상업세 징수도 완전히 금지되었다. 보부상 조직에 대한 개혁은 고종의 왕권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포함된 것이었다. 이로써 보부상 조직들은 갑오・을미개혁기 동안 크게 위축되었다.

이와 같이 보부상 조직은 고종 대에 접어들면서 왕실과의 연계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고, 고종의 권력이 약해지면서 자신들의 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종이 왕권을 회복한 이후 활동이 재개될 수 있었고, 독립협회가 고종과 대한제국정부를 비판하고 나서게 되자 황국협회에 적극 가담하여 황실을 비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4 황국협회의 활동

황국협회는 고종과 대한제국을 현창하는 사업에 적극 나섰다. 이미 발회식 때부터 ‘충군애국’을 강조하였고, 주변에 태극기를 설치하여 만세를 불렀다. 또 대한제국 정부의 경축일 기념행사를 크게 거행하였는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한 개국기원절(음력 7월 16일), 고종의 생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 음력 7월 25일), 고종 즉위일인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음력 9월 17일) 등 경축일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등 충군애국을 강조하는 행사를 거행하였다.

독립협회가 한창 권력개편운동에 집중하고 있던 1898년 10월 12일에 황국협회는 「민선의원 설립의 건백서」를 제출하였다. 이것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대의원을 직접 뽑는 하의원을 건설하자는 의견서였다. 이것은 독립협회마저 대한제국의 백성들은 아직 교육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하의원 설치에 반대하고 있었다.

또한 하의원은 공화정을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마저 있었다. 그럼에도 황실을 보위하려는 성격이 강한 황국협회에서 이러한 건백서를 제출하게 된 것은 독립협회의 중추원 개편 운동에 대응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당시 독립협회의 중추원 개편 운동은 일종의 상원을 설치하려는 것이었는데,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자격을 갖춘 개화지식인, 그 중에서도 독립협회 회원들이 정치를 주도하려는 목적이 컸다. 독립협회와 달리 황국협회는 보부상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다양한 계층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하원 중심의 정치체제를 구상하여 독립협회에 대응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의견은 일반 백성들의 정치참여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황실과 정부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5 황국협회의 독립협회 습격과 해산

1898년 10월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은 한층 격화되어 보수파 대신들에 대한 규탄과 중추원 개편을 위한 상소시위가 잇달았다.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관민공동회’가 개최되고 ‘헌의 6조’를 의결하면서 독립협회는 열강으로의 이권 양여 금지, 재정의 일원화 및 정부 예결산 공개, 중죄인의 공개재판, 중추원 개편 등의 요구조건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수구파 대신들은 독립협회에서 군주제를 철폐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고 한다고 고종에게 모함하였다. 이에 고종이 11월 4일 독립협회 간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려, 독립협회 간부 총 17명이 체포되었다. 다음날인 5일에는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려졌다.

그러자 독립협회 회원들과 서울시민들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체포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을 하였다. 수천 명의 시민들은 자신들도 체포하라고 주장하며 시위를 계속하였고, 각지에서 의연금이나 물자를 보내며 응원하였으며, 시전 상인들도 철시를 단행하여 만민공동회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시민들의 참여도 점차 증가하였다. 정부는 만민공동회 해산시키기 위해서 무력사용도 고려하였으나, 외국공사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게다가 군대 동원 계획이 누설되어 오히려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시민들을 자극하기만 하였다. 11월 9일에는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국 고종황제는 민의의 압력에 굴복하여 11월 10일 수구파 대신들을 해임하고 고등재판소에서 체포한 독립회원 17명에 대해서 태형 40대로 가볍게 처벌하고 석방하였다.

하지만 만민공동회는 해산하지 않고 독립협회를 무고한 정부 대신들에 대한 탄핵과 독립협회 복설, 헌의6조의 철저한 시행을 위하여 시위를 계속하였다. 고종은 독립협회 복설을 허락하지 않는 대신에 관민공동회에 참석하여 결의안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던 관료들을 복직시켰고, 헌의6조의 시행을 약속하는 등으로 민심을 달래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민공동회가 계속되자 보수파 관료들은 보부상과 황국협회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보부상 무리들이 11월 13일 만민공동회 집회에 돌을 던지며 도전하였고, 길영수가 13도 부상 도반수(負商都班首)가 되어 이기동과 함께 보부상들을 훈련시켰다. 또 황국협회에서 홍종우 등이 중심이 되어 만민공동회를 규탄하는 편지를 만민공동회에 보내어 시민들을 격분시키기도 하였다. 11월 16일부터 본격적으로 보부상들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위하면서 만민공동회를 도발하였다. 황국협회에서는 전국의 보부상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11월 18, 19일에는 수천 명의 규모가 되었다. 11월 20일에는 경운궁 인화문 앞에서 만민공동회 시위가 벌어지고 종로에서는 황국협회 시위가 벌어지며 사태가 매우 험악하게 흘러갔다.

이날 저녁 황제가 칙령을 반포하여 독립협회를 무고한 보수파 관료에 대한 구속 조사와 독립협회의 복설, 정부 개혁 등을 약속하였으나, 만민공동회의 인민들은 정부가 이 약속을 실행한 것을 본 후에 물러가기로 결의하였다. 또 보부상들의 공격에 대한 대책도 정부에 요구하여 피격 방지를 거듭 약속받았다.

하지만 다음날인 21일 오전 10시쯤 몽둥이로 무장한 보부상 2,000여 명이 경운궁 앞의 만민공동회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때 피격 방지를 위해 만민공동회 주변에 배치되었던 시위대와 경무청 순검들은 비밀리에 황제로부터 칙령을 받아 보부상들이 진격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정부의 안전 보장 약속에 방어 대책을 세우지 않았던 만민공동회의 인민들은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하였고, 결국 만민공동회는 막대한 부상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하지만 보부상들의 만민공동회 습격 소식이 서울에 퍼지자 격분한 시민들이 모여 역으로 보부상들을 공격하여 도성 밖으로 격퇴시켰다. 만민공동회도 다시 개최되어 이전보다 몇 배 더 많은 규모의 시민들이 참가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과격화되었다. 이에 11월 23일 고종은 다시 한번 민의에 굴복하여 정부 고관 5인 및 황국협회 지도부 3인에 대한 처벌과 보부상 혁파, 대신의 공정한 인재 등용 등을 약속하였다. 만민공동회의 인민들은 보부상 조직과의 충돌이 정부의 무력탄압의 구실이 될 수 있다고 보아 이날 밤에 일시 해산하였다.

정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보부상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용익은 황국협회에 자금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등 보수파 관료들은 보부상들을 이용하여 독립협회 세력 및 만민공동회를 탄압하려고 하였다. 정부에서는 만민공동회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뜻으로 중추원 의관 50명을 새로 선임하였으나, 독립협회 계열은 겨우 17명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황국협회 계열 27명 등을 포함하여 황제 측근 세력이 33명에 이르렀다. 게다가 약속한 정부 개혁의 기미도 보이지 않자 만민공동회는 급진파의 주도하에 12월 6일 재개하기에 이르렀다.

독립협회 인사들은 중추원을 주도하며 11명의 개혁 인재를 정부 고관으로 선발해서 정부 개혁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11명의 개혁 인재 중에 박영효가 포함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박영효는 당시에 1895년 7월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에 망명하고 있었는데, 이때 독립협회 계열과 만민공동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복귀를 추진하고 있었다. 박영효의 복귀 운동은 고종 황제를 분노하게 하였다. 결국 정부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강경하게 대처하는 것으로 전환하여, 12월 23일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다. 이후 서울은 완전히 계엄상태에 들어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기 시작했고, 만민공동회를 완전히 불법화시켰다.

이때부터 황제권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지게 되어 정국은 고종황제가 완전히 장악했으며 황제권 중심의 개혁정책이 급속히 시행되었다. 비록 황국협회는 독립협회와 함께 해산되었으나 길영수가 농상공부 농상국장이 되는 등 보부상 간부들은 대한제국 정부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며 황제권을 지지・보족하였다. 게다가 1899년 3월에는 혁파되었던 상무소가 상무회사라는 이름으로 복설되어 보부상들은 정부의 후원 속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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