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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皇城新聞]

국한문혼용을 통해 옛것과 새것의 조화를 주창하다

1898년(고종 35)

황성신문 대표 이미지

황성신문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황성신문(皇城新聞)』은 『경성신문(京城新聞)』과 『대한황성신문(大韓皇城新聞)』을 인수하여 1898년(고종 35) 창간된 민간신문이다. 당시 순한글 신문이 유행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국한문혼용체로 발행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곧 신문이 설정하고 있던 주요 독자층이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소양을 갖춘 지식인 계층이었음을 드러낸다. 황성신문의 논조는 광무정권(光武政權)의 점진적인 개혁노선을 지지하면서도 당대 사회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정부에 비판적이었으며, 민중을 계몽하려는 기조를 유지하였다. 황성신문 이외에도 『매일신문(每日新聞)』, 『제국신문(帝國新聞)』 등 세 가지의 민간지가 창간되었던 1898년은 한국 언론사에서 중요한 해로 평가받고 있다.

2 황성신문의 전신, 경성신문과 대한황성신문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일을 뜻함)을 계기로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이끌던 친일개화파(親日開化派) 내각이 몰락하고, 새로운 개혁구상세력이 등장했다. 당시 권력을 잡은 세력은 김병시(金炳始), 조병세(趙秉世) 등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 군주라는 단일 개체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통치하는 정부 형태) 강화를 추진하던 보수적 개명관료(開明官僚)들이었으나, 초기에는 서재필(徐載弼), 김가진(金嘉鎭),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등 독립협회(獨立協會) 세력 또한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추가한다는 의미)’을 기치로 내건 광무정권의 개혁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1897년에 들어서면서 친 러시아 경향이 강해지는 광무정권과 이를 반대하면서 국가의 자주권을 보존하고자 하는 독립협회세력 사이의 대립은 점차 심화되었다. 자연히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독립신문(獨立新聞)』은 폐간 위기에 부딪혔다. 입지가 좁아진 독립협회 세력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특히 『독립신문』의 발간을 이끌던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그들은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여 민중에게 독립 유지를 위한 투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동시에 관리를 비롯한 지배층을 지지 세력으로 규합하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황성신문』이었다.

『황성신문』의 창간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신문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출발은 『경성신문』이었다. 『경성신문』은 순한글 체제로 1898년 3월 2일에 창간호를 발행하고, 3월 8일에 농상공부(農商工部)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창간보다 정식 인가가 늦었던 이유는, 신문지법이 없었던 당시에는 신문을 발행하기 위한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성신문』이 농상공부의 인가를 받은 것은 신문 배달의 편의를 얻기 위해서였다. 경성신문사의 사장은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였으며, 사옥 또한 윤치호의 집이었다. 『경성신문』은 8명의 주주가 80원의 자본금으로 설립한 영세한 규모였는데, 주주 가운데 이승만(李承晩), 양홍묵(梁弘默), 정교(鄭喬) 등이 윤치호를 사장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신문 경영은 윤치호의 사촌인 윤치소(尹致昭)가 맡았다.

『경성신문』은 발간된 지 약 한 달만인 1898년 4월 6일 『대한황성신문』으로 신문명을 바꾸고 발행호수를 이어 11호로 발행되었다. 『경성신문』이 이름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황성신문』 4월 6일 자에 따르면, ‘우리나라 자주독립한 후에 세계 각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도 신문하는 줄을 알게’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논설, 『대한황성신문』, 1898년 4월 6일.] 이는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래로 한국이 자주독립하였음을 강조하고, 한국인 스스로도 주체적으로 신문을 발간하고 있음을 알리겠다는 뜻이었다.

얼마 뒤 대한황성신문사는 회사의 체제를 고본제(股本制), 즉 주식제로 변경하였다. 『경성신문』에 비해 더 많은 사람을 신문사의 구성원으로 참여시켜 재정난을 타개하고 그 저변(底邊)을 넓히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식 한 주(株)의 가격은 10원으로, 총 200장이 발행되었다. 자본금이 모여 회사의 재정이 어느 정도 튼튼해지자 『대한황성신문』은 보다 체계적으로 신문 발행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주 2회 발간하던 신문의 발간 주기를 줄이기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일본에서 새로운 인쇄 기계를 도입하고, 사옥 또한 확장 이전하였다. 그러다 8월에 인쇄시설 준비의 명목으로 얼마간 휴간한 뒤 1898년 9월 5일 제호를 황성신문으로 바꾸고 국한문혼용체, 일간 발행 등 편집과 운영 방식의 변화를 담아 제1호를 발행하였다. 그렇다면 『대한황성신문』과 황성신문의 차이는 무엇이고,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3 황성신문의 창간

『황성신문』의 창간 및 국한문혼용으로의 체제 변화와 관련하여 기존 연구는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신문의 실질적인 판매량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던 민간지인 『독립신문』, 『협성회회보(協成會會報)』 등은 모두 순 한글로 쓰여졌다. 『대한황성신문』의 관계자가 대부분 독립협회 회원이었으므로, 『독립신문』과 논조가 비슷한 『대한황성신문』이 계속 순한글로 간행된다면 다른 신문과 비교해 판매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신문 구매층을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지식인 계층으로 상정하여 국한문혼용의 『황성신문』을 창간한 것이었다.

둘째, 개혁에 완고한 여론 형성층을 개명(開明)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는 『황성신문』의 창간이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창간호의 사설에 따르면, 『황성신문』은 정부의 개혁노선에 실천적으로 솔선수범할 뜻을 밝히며 갑오개혁 이래 정부 개혁정책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구본신참’을 지향할 뜻을 밝혔다. 즉, 신문이 기본적으로 취하고 있던 자세는 갑오개혁의 이념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것이었다. 이때 개혁의 의미는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당시의 내각의 그것과 같이 변혁적이라기보다는, 광무정권의 입장을 반영한 변통(變通)적 성격이 강했다. 『황성신문』의 창간이념은 기존 체제의 틀이 흔들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당시 사회가 지닌 모순을 개혁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황성신문』은 개혁에 비판적이었던 유림을 비롯한 보수 지배층을 독자층으로 설정하여, 그들에게 익숙한 문체와 필법을 이용해 그들을 개명시키고자 하였다. 『대한황성신문』이 『황성신문』으로 변경될 당시 장지연(張志淵), 박은식(朴殷植) 등의 한학자가 『황성신문』의 초기 편집인으로 참여하였던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독립협회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1898년 5월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당시 독립협회의 부회장 겸 회장대리이자 경성신문사의 사장이기도 했던 윤치호가 『독립신문』의 간행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윤치호는 업무가 과도해지자 협회 내의 다른 인사에게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남궁억(南宮檍)을 필두로 나수연(羅壽淵), 이상재, 류근(柳槿), 장지연, 강화석(姜華錫) 등이 새롭게 대한황성신문사의 운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신문의 이름을 바꾸는 동시에 일간 발행, 국한문혼용체의 도입 등 신문의 체제 변화를 이끌었다. 장지연을 제외한 나머지 운영진들은 모두 독립협회와 관련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기존 권력 구조를 인정한 채 새로운 법의 준수를 지향했던 온건 노선자로 확인된다. 독립협회 온건 노선자들은 정부와 타협하여 협회의 해산을 강행하는 동시에 『독립신문』, 『매일신문』 등 협회와 관련이 있던 매체를 폐간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은 이들 온건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매체로 자리 잡았다.

4 신문의 특징과 성격

이렇게 창간된 『황성신문』의 특징과 성격은 어떠했을까. 신문의 지면 구성과 신문사의 인적 기반을 살피면서 그 성격에 접근해보자. 『황성신문』은 기사, 독자 투고, 광고 신청 등이 늘어남에 따라 1899년과 1905년 그리고 1906년, 총 3차례의 신문지 확장개량 작업을 거쳤다. 지면 구성은 크게 논설(論說), 별보(別報), 관보(官報), 잡보(雜報), 외보(外報), 광고로 이루어졌다.

이 중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논설이었다. 논설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군사,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정부와 관리가 개혁하고 반성해야 할 점을 제시하였다. 또한 자주, 평등, 인권 등의 서구 근대적 사상을 소개하는 한편 한국 사회의 폐단을 지적하여 일반 민중을 계몽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설로는 1905년 11월 20일 자의 신문에서 장지연이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 체결을 규탄하였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황성신문은 정간(停刊)을 당하기도 하였다.

논설 대신 간혹 별보가 실리기도 했다. 별보는 국내외의 특기할 만한 사건을 보도하는 특별 기사였다. 관보란에는 정부의 칙령(勅令, 황제가 구두로 내리는 명령으로 법적 효력이 발생함), 정책 결정 사항, 관리의 임면(任免, 임명과 해임) 등 정부가 지방 관서(官署)나 민에게 고시(告示)하는 사항을 담아 발행하는 관보 중 주요 내용을 매일 거의 1개 면에 걸쳐 보도하였다. 관보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는 점, 그리고 1899년 12월 25일부터는 신문의 가장 앞부분에 관보를 게재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황성신문과 정부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해볼 수 있다. 외보란에서는 정치, 군사 분야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소식을 전했다. 1900년 1월 5일자부터는 외보에 통신원(通信員)을 표기하여 기사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도 했다.

신문사의 인적 기반과 관련해서는 앞서 설명했듯, 『황성신문』의 주요 운영진이었던 남궁억, 나수연, 류근, 이상재, 강화석 등은 독립협회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지향하는 온건세력이었다. 이들은 전통 유학을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서양 강대국이 재편하는 세계질서를 철저하게 인식하여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고, 왕권 중심의 기존 지배체제 속에서 국권 수호와 문명 부강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기조가 반영된 황성신문의 논조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황성신문의 국권 수호 의지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일본이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기 위해 강제로 제공한 차관(借款)을 민의 힘으로 갚자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와 더불어 『황성신문』의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구성원들이 대부분 관인(官人) 출신이거나 관인이라는 점은 『황성신문』의 성격을 규정하는 또 다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강화석은 외부참서관(外部參書官)과 농상공부서기관(農商工部書記官)을, 나수연은 표훈원주부(表勳院主簿)를, 남궁억은 군수(郡守)와 내부국장(內部局長)을, 장지연은 내부주사(內部主事)를, 현영운(玄映運)은 궁내부관리(宮內府官吏)와 군부국장(軍部局長), 농상공부서리대신(農商工部署理大臣) 등을 지냈다. 이들은 기존 체제의 이익집단으로서 기본적으로는 체제 유지를 전제한 개혁을 추구하였다. 『황성신문』은 비록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의 분야에서의 평등을 주창하고 민권 신장을 외쳤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지배체제의 공고한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5 운영난과 황성신문의 폐간

『황성신문』은 발행 1년 만에 발행 부수가 3천 부에 이르렀고, 창간 4년 반이 되는 1903년 2월 당시의 부수는 약 1만 3천여 부였다. 『독립신문』이 폐간된 후 『황성신문』으로 넘어온 구독자도 있었을 것이고, 신문에 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결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양적인 성장과는 다르게 신문사는 자금 부족에서 기인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황성신문』의 재원(財源)은 두 가지로, 주식을 판매하여 마련한 자본금과 신문 구독료였다. 그러나 구독료가 체납되는 상황이 빈번하여 신문사는 늘 적자 운영을 면하지 못했다. 1900년 9월 이후 신문에는 끊임없이 연체 구독료 납부를 요청하는 기사가 실렸다. 정부에서는 신문사에 일정액의 보조금을 지원해주거나 각 지방 관청에 밀린 구독료를 납부하라는 훈령(訓令)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신문사의 운영난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았다. 1903년 이후 정간(停刊)과 속간(續刊)을 반복하던 『황성신문』은 결국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 이후 『한성신문(漢城新聞)』이라는 이름으로 2주간 발행되다가 9월 14일에 형식상 자진 폐간되었다. 『경성신문』부터 『한성신문』까지, 12년 6개월 만의 폐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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