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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민족 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라

1913년

흥사단 대표 이미지

흥사단 제5회 대회 기념사진(1918)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개요

흥사단(興士團)은 1913년 민족부흥을 위한 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무실역행(務實力行 :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함)’과 ‘충의용감(忠義勇敢)’의 정신을 수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흥사단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기 1913~1919년 미주에서만 활동한 기간. 2기 1920~1931년 중국의 원동위원부와 국내의 수양동우회 등을 통해 조직 활동이 확장된 기간. 3기 1932~1945년 만주 사변,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의 여파로 중국과 국내 조직이 해산되면서 활동이 사실상 중단된 기간. 4기 1945~61년 해방 이후 미주의 본부를 국내로 옮겨오고 중국의 원동위원부가 이에 합류하여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기간. 5기 1963년~현재까지 5·16 쿠데타로 단체등록이 취소되었다가 1963년 새롭게 등록을 완료하고 재출발한 이후의 기간.

2 안창호의 미주 흥사단 설립

흥사단의 설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도산 안창호이다. 20세 청년으로 독립협회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미국유학의 길을 떠났던 안창호는, 러일 전쟁 무렵 정세의 급박함을 염려하여 급거 본국으로 돌아와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구국운동을 일으켰다. 비밀결사 신민회는 전국유세 강연을 하는 외에, 대성(大成)학교, 태극서관, 자기회사 등 교육, 실업기관과 더불어 흥사단의 전신인 청년학우회를 설립하였다. 청년학우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청년 단체로서 1909년 2월에 창립되었는데, 처음에는 안창호와 최남선이 중앙총무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 병합으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곧이어 신민회 관련자들이 105인 사건으로 대거 검거되면서, 청년학우회는 해산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당시 중국에 있었던 안창호는 1911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동포의 인격수양과 생활향상을 위한 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안창호는 국민회 같은 대중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으로서는 민족운동의 핵심적 정수분자(精粹分子 : 가장 우수하고 기본적이며 핵심이 되는 사람)를 양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과거 국내에서 만든 청년학우회와 같은 새로운 조직을 구상하였다. 이것이 바로 ‘흥사단’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청년학우회가 신민회의 산하단체임에 반해, 흥사단은 국민회의 산하단체가 아니라 모든 단체나 일반 사회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젊은 정수분자를 양성하는 기관이라는 점에 있었다.

1912년 안창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맨 먼저 송종익에게 ‘흥사단 약법’ 초안을 보인 후, 흥사단 창립위원으로 8도 대표를 선임하였다. 당시 8도 대표는 홍언(경기도), 조병옥(충청도), 송종익(경상도), 정원도(전라도), 강영소(평안도), 김종림(함경도), 민찬호(황해도), 염만석(강원도) 등이었다. 그리고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 강영소의 집에서 발기인 25명으로 흥사단 창립총회가 열렸다. ‘흥사단’이란 명칭은 원래 한일 병합 이전 유길준이 조직한 애국단체의 이름이었다. 흥사단이라는 명칭에서 ‘사(士)’는 문사와 무사를 병칭하는 뜻으로, 안창호는 진정한 애국자를 일으키겠다는 의미에서 이 단체명을 썼다고 한다. 흥사단의 영어명은 ‘Young Korea Academy’였는데, 이는 이미 만들어졌던 ‘청년학우회’와 통하는 이름이다.

‘흥사단 약법’에 따르면, 단원들은 예비단원, 통상단원, 특별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흥사단은 매우 신중하게 단원을 모집했다. 우선 무실역행할 만한 인물로 지목된 자에게 흥사단 약법과 정신을 알리고 흥사단의 설립 취지와 목적이 설명되었다. 인물에 대한 심사과정을 거친 자들은 입단 문답을 거쳐야 했다. 일단 심사에 합격한 이는 예비단원이 되었고, 예비단원으로 2개월 이상 의무를 수행한 후 문답식과 맹약예를 거치면 통상단원이 되었다. 단원 입단 등록을 위해서는 우선 단원 2명 이상의 추천서를 받아야 했고, 이력서와 지원서와 추천자의 보증서에 입단금을 첨부해 소재 지방단우회에 제출하여야 했다. 그러면 흥사단에서는 단원 번호를 교부하고 단원으로 등록하였다. 통상단원들은 흥사단이 요구하는 동맹독서, 동맹저금, 동맹체육의 의무와 통상보고의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이들 의무사항을 6개월 이상 이행하지 않은 사람은 출단 조처 되었다.

3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설립과 활동

미주의 흥사단이 각 인물들의 인격개조에 힘쓰고 실력을 양성해 민족운동에 투신할 수 있는 기초 실력을 키우는 일에 주력했다면, 중국에서는 민족개선의 기초운동과 아울러 조선 독립을 최고 목표로 한 독립운동의 실천에 주력했다. 미주와 대비해 ‘원동’이라 지칭된 중국을 중심으로 한 흥사단운동은 안창호가 1920년 1월 미주에 있는 흥사단원 박선제와 김환작을 상해로 오게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기초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독립운동 일선에 투입되어 활약해 줄 청년 인재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결성되기 전부터 상해 주요 인사들에게 흥사단 약법을 인쇄, 배포하면서 흥사단의 주의와 취지를 선전했다. 특히 유망 청년들에게 흥사단의 이념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펼치며 단원 가입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이에 많은 청년들이 1920년 2월부터 흥사단에 입단하기 시작했고, 1920년 12월 흥사단 제7회 대회를 상해에서 개최한 것을 계기로 원동위원부의 활동이 표면화되었다.

이처럼 단원들의 입단이 먼저 이루어진 후 국내와 중국, 연해주, 일본 지역을 관할하는 미주 흥사단의 지부조직으로서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1920년 9월 정식 발족하였다. 이후 흥사단 원동위원부는 중국 대륙이 공산화하기 이전인 1949년까지 중국에서 존속했다. 그동안 190여 명의 단원들이 가입, 활동했는데 이들 중 서북출신과 기독교인의 비중이 높았다.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은 장기적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이상촌건설운동과,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을 협의체로 통일하고자 했던 민족 유일당 운동을 꼽을 수 있다. 많은 어려움과 한계가 있었지만 민족 유일당 운동은 결국 한국 독립당 결성으로 이어졌으며, 흥사단 원동위원부는 이 정당에 대한 재정적 후원을 담당했다.

4 수양동우회의 설립과 활동

흥사단 원동위원부 단원들 중 일부는 흥사단 운동이 국외보다도 다수의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국내에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국내 조직 결성을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 김종덕은 1920년 5월 일본 동경에 건너가 백관수와 유억겸 등을 단원으로 포섭한 뒤 이듬해인 1921년 5월 국내로 들어왔다. 이보다 앞서 1921년 3월에는 이광수와 박현환이 중국에서 국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들은 1922년 2월 흥사단의 국내 조직으로 ‘수양동맹회’를 발기했다. 이 조직에는 기존 흥사단원인 곽용주, 김열진, 이환진과 국내에서 새로 입단한 안창기, 김기전, 김윤경, 원달호, 홍사용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수양동맹회의 규약은 ‘흥사단 약법’ 중 흥사단을 수양동맹회로, 충의를 신의로 고치고,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을 ‘조선 신문화 건설의 기초를 준비함’으로 고쳤지만, 그 외의 내용은 흥사단 약법과 동일했다. 더불어 이광수는 상해에서 돌아오자마자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1922년 5월 흥사단의 노선을 반영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했고, 그해 9월 조선총독과 면담하여 ‘수양동맹안’이라는 계획을 제출하기도 했다.

1922년 봄부터 평양에서도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의 교사였던 김동원과, 김성업, 조명식, 이제학, 김영윤, 김광신, 김형식, 김병연 등 대성학교 출신 상공인들을 중심으로,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동우구락부’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1923년 1월 창립대회를 연 동우구락부는 흥사단의 핵심주의인 ‘무실역행’을 역시 자신들의 주의로 내걸었다.

중국에 있던 안창호는 국내에서 성격이 유사한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동시에 조직되자 두 단체의 합동을 적극 권유했다. 이에 1923년 3월 안창호를 만나고 돌아온 이광수는 그해 4월에 평양에서 김동원을 만나 정식으로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의 합동을 제안했다. 이후 두 단체의 합동 시도는 난항을 거듭하다가, 1925년 9월 이후 급진전을 보여 1925년 10월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합동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1926년 1월 통합조직 ‘수양동우회’를 탄생시켰다. 이로써 흥사단의 국내 조직은 ‘수양동우회’로 일원화되었다. 수양동우회 회원들은 지식인층과 자산가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서북지역 출신으로서 외국유학을 다녀온 고학력층이었으며,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한말의 자강 운동과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에 가담하였고, 3·1 운동과 임시 정부에서도 많은 활약을 한 바 있었다.

수양동우회는 실력양성론에 입각하여 ‘조선 신문화 건설의 기초를 준비’하는데 목적을 두었지만, 실제 활동은 회원들만을 대상으로 교양과 수양동우회의 이론을 선전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이는 수양동우회가 스스로를 정치와 시사에 간여하지 않는 ‘수양’ 단체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초기 수양동우회가 역점을 기울인 사업은 기관지 발행이었다. 1925년 흥사단 원동위원부는 흥사단의 정신을 조선인들에게 보다 널리 전파하기 위해 기관지를 국내에서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수양동우회는 1926년 5월부터 잡지 『동광(東光)』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동광』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던 국내에서 발행되었던 만큼 정치성을 띤 시사, 정론 등의 기사를 싣지 못한 채, 학술, 기예, 통계, 광고 등의 기사만으로 발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여러 차례 휴간과 복간을 반복하다가 1933년 1월까지 총권 40회를 내고 종간되고 말았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고, 국내에서 좌우합작으로 신간회가 조직되면서, 흥사단 미주본부에서는 흥사단을 혁명단체로 개조하여 정치운동을 전개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흥사단 원동위원부에서는 흥사단을 사회주의단체로 개조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국내에서도 수양동우회가 흥사단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병옥과 주요한은 1926년 연정회 조직 시도가 무산되자, 수양동우회를 민족주의자의 거두를 망라한 정치단체로 개조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수양동우회 안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이광수는 ‘실력양성에 의해 조선독립의 목적을 주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수양동우회를 직접적인 정치투쟁 단체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를 표명했다. 안창호 역시 1927년 9월 주요한을 상해로 불러들여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간부들과 수양동우회를 정치단체로 전환하는 문제를 논의하면서, 이에 반대하고 ‘혁명당’은 별도로 조직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즉 수양동우회는 수양기관인 채로 존속해야 하고, 정치운동 단체는 ‘통일적 대독립당’의 형태로 분리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안창호는 수양동우회가 ‘수양단’으로 흘러서도 안되지만, 이와 함께 ‘혁명을 중심으로 하여 투사의 자격을 훈련하는 혁명훈련 단체’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보았다.

안창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병옥과 주요한은 수양동우회를 중심으로 합법적인 민족주의단체 건설을 모색했으나, 이는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단, 1929년 11월 제7회 의사회에서 조직의 명칭을 ‘수양동우회’에서 ‘수양’을 삭제하여 ‘동우회’로 하기로 결정하고, ‘조선의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을 회의 목적으로 명기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동우회 내부에서 정치적 독립이나 사회변혁에 대한 의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사실상 동우회는 다시 수양단체의 모습으로 침잠해 들어갔고,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세력은 개별적으로 신간회에 참여했다. 특히 주요한을 중심으로 하는 평양지역 회원들이 신간회에 적극 참여했다.

1930년대 동우회 회원들이 주도한 운동 중 대표적인 것은 브나로드 운동이었다. 이미 1920년대부터 수양동우회는 통속교육보급운동을 통해 황무지개간으로 농축산 진흥을 이루고 농사기술을 보급하는 한편, 문자교육과 생활개선에도 힘쓰며, 더 나아가서는 협동조합을 조직하여 농촌문화의 향상과 농민사회의 조직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방침은 1930년대 전반기 동아일보사에서 주도한 브나로드 운동에서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 역시 비정치성과 타협성을 드러내면서 한계에 봉착했고 1934년에 이르면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탄압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1937년 6월 조선총독부는 동우회 회원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에 착수하여, 1938년 3월까지 모두 18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하였고 이 중 41명을 정식으로 기소하였다. 전시체제기에 들어서면서 동우회가 직접적인 탄압을 받게 된 이유는 첫째, 이들이 미국의 한인사회와 연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안창호가 국내에 들어와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했던 사람들이 귀국과 함께 동우회에 가담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미국 흥사단과 국내 동우회의 연계활동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둘째, 동우회가 조선의 기독교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교세가 강했던 장로교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 입장에서 기독교는 신사참배 거부의 명분이 될 뿐만 아니라, 미국 선교사들과 연결되어 커다란 위협 요소로 인식되었다. 셋째, 동우회 회원들이 갖고 있는 강력한 사회문화적 영향력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전향시켜 대륙침략에 조선인들을 총동원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려 하였다. 실제로 동우회 사건 이후 많은 회원들이 공개적으로 전향을 발표하면서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반면 동우회원 중 조선어학회나 여운형의 조선 건국 동맹에 가담하면서 지속적인 민족운동을 벌인 경우도 있었다.

5 해방 후 흥사단의 재편과 활동

1945년 8·15 해방 후 흥사단은 1946년 국내위원부를 설치하고, 그해 9월 제1차 국내대회를 열어, 동우회 사건과 안창호 사후 위축된 조직의 재정비에 착수하였다. 1948년에는 그동안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던 흥사단 본부를 서울로 이전하였다. 당시 흥사단의 단세는 국내외에 걸쳐 대략 1천여 명에 이르렀다.

흥사단 관련 인사들은 해방 직후부터 미군정에 대거 참여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례로 미군정 관료나 공직자로 재직한 흥사단원은 40명 이상이었고,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의 중앙행정기구 13부 가운데 5부의 부장이 흥사단 관련자였다. 이는 흥사단원 중에서 미국 유학자들이 많아 이들의 영어 구사력이 미군정 하 ‘통역정치’에 적합했고, 이들이 미군정의 인사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선교사들과 가까웠으며, 관서(평안도) 인맥으로 엮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하지 사령관의 통역관이었던 이묘묵과 미군정의 인사를 담당한 정일형의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미군정 아래서 각 부처장을 지낸 흥사단 관련 인사들은 대다수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이후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식민지 시기부터 이어진 안창호의 흥사단과 이승만의 동지회 사이의 경쟁과 대립이 해방과 정부수립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는 국가에 대한 개인, 시민사회의 우위를 전제하면서 정당정치를 중시한 흥사단의 자유민주주의와,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권위주의적 대중동원 체계를 구축하고자 한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사이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다.

1950년대까지 이승만 정부 하에서 권력에서 배제된 흥사단은 ‘금요강좌’나 잡지 『새벽』 발간 등을 통해 사회교육에 진력했다. 그러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붕괴하고 새롭게 제2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와 국회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흥사단은 1961년 5월부터 1963년 7월까지 활동을 중지 당했다. 이후 1963년 7월에 가서 다시 사회단체 등록이 가능해져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때부터 흥사단은 청년, 대학생, 고등학생 등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각종 ‘아카데미’와 지역 분회들을 만들어 조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특히 1970년대에 이르러 흥사단의 각종 아카데미는 전성기를 구가했고, 이 중 대학생 아카데미는 민주화운동을 지향하는 대학 동아리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 말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흥사단은 시민운동으로 외연을 확장하면서 오늘날까지 다양한 대중사업들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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