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현대
  • 미소공동위원회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실패로 끝난 미소(美蘇)의 합의 시도

1945년 ~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대표 이미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전경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미소공동위원회는 1945년 12월 발표된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반도 주둔 미소 양군 사령부 대표 간에 개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주요 임무는 모스크바 결정이 명시한 대로 조선에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해당 정부와 논의하여 한반도에 최장 5년간 4개국(미·영·중·소)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도록 건의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소 대표단이 1946년 1월부터 1947년 10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으나 임시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 대상 문제 등을 놓고 끝내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이는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이어졌고 이후 한국문제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유엔으로 이관되었다.

2 미소공동위원회의 설립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며 한국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종전 후 한국의 처리 방식은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연합국 수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등을 갖고 연합군 협력 방안과 함께 전후 세계 질서를 논의했으나 한국과 관련해서는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구두협의와 ‘적당한 절차’(in due course)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추상적인 선언 외에 구체적 처리 방침을 정하지 못했다.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해 보다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난 이후 개최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였다. 1945년 12월 6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 첫째, 한국에 민주임시정부 수립 둘째, 미소공동위원회 조직 셋째, 최대 5년 동안 4개국(미·소·영·중)의 신탁통치 넷째, 2주 내 미소양군 사령부 대표간의 회의 소집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모스크바 결정서가 발표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있던 미소 양군 사령부 대표 간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3 예비회담

미소공동위원회는 크게 예비회담, 1차회담, 2차회담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제 4항에 명시된 대로 남북한에 관련된 긴급한 제문제, 특히 경제와 행정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1946년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서울 덕수궁에서 개최되었다. 미소 분할점령으로 인위적인 38선이 생기며 남북한은 전력, 교통, 통신 등 많은 난제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미소의 입장 차이로 인해 실질적인 결실을 얻지 못하고 사실상 결렬되었다. 미국은 회담에서 정치적인 논의는 배제한 채 우선 38선을 철폐하고 전국을 하나의 경제적, 행정적 단위로 묶자는 입장으로 회담에 임하였으나 소련은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는 미소의 분할점령 이후 적용된 이원적 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더해 예비회담을 결렬로 몰고 간 것은 쌀 문제였다. 당시 열악했던 북한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련은 북한의 원자재 및 다른 상품과 교환조건으로 남한의 쌀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풍작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의 정책실패로 남한 역시 쌀 부족을 겪고 있던 터라 미국 측은 이에 응할 수 없었다. 그러자 소련 측은 쌀을 보내주지 않으면 전력을 포함한 교역문제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선언했다. 결국 2월 6일, 1개월 이내에 조선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인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은 사실상 결렬되었다.

4 1차 회담

미소공동위원회 1차 회담은 1946년 3월 20일부터 5월 9일까지 서울 덕수궁에서 열렸다. 미국 측 수석대표는 아놀드(Archibald Vincent Arnold) 소장, 소련 측 수석대표는 스티코프(Terenti Fomitch Stykov) 중장이었다. 미소 양측은 3월 말, 향후 회담의 작업 일정과 방법에 합의함으로써 회담 초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대상이 되는 정당·사회단체 선정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자 회담은 난관에 부딪쳤다. 문제는 당시 남한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던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가한 정당 및 단체들을 협의대상에 포함시킬 것인지였다. 소련 측은 회담 개막 연설부터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단체와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여야 한다고 천명하며 반탁운동을 벌인 정당 및 단체들을 협의대상에서 배제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민주주의를 근거로 제시하며 반탁운동 참여 유무가 협의대상을 정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며, 오히려 소련이 반동세력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고 본 우익단체인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을 협의위원회로 하여 임시정부 구성을 협의하자고 제의했다. 이처럼 양측이 반탁운동 단체의 협의대상 참여 여부 문제를 놓고 팽팽히 맞섬으로써 회담은 교착되었다.

회담이 난항을 계속하던 4월 5일, 소련 측은 과거에 반탁운동을 했더라도 향후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겠다고 성명하는 정당·사회단체들은 협의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양보안을 내놓으며 회담에 돌파구를 제공하였다. 이에 양측은 협상을 계속하였고, 결국 4월 18일,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기로 선언한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하겠다는 미소공동위원회 5호성명이 발표되었다.

미군정은 5호성명이 발표된 후, 미소공동위원회 참여의 정당성을 발표하는 담화를 발표하며 우익단체들을 5호성명에 서명하도록 적극 설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의원의 일부 의원들이 5호성명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자, 미군정 사령관 하지(John Leed Hodge)는 4월 27일, 5호성명에 서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표시는 아니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 결과, 끝까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를 거부하던 대부분의 우익정당 및 단체들이 5호성명에 서명했다. 그러나 소련과 협의되지 않은 미군정의 일방적인 담화 발표와 이로 인한 반탁단체들의 미소공동위원회 대거 참여는 소련을 자극하였고 이로 인해 돌파구를 찾은 듯 했던 1차회담은 결국 무기휴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5 2차 회담

무기휴회 되었던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움직임은 1946년 가을부터 활발해졌고 1947년 4월에는 미국의 마샬(Gorge Catlett Marshall) 국무장관과 소련 외상 몰로토프(Vyacheslav Mikhaylovich Molotov)간의 서신교환이 이루어지며 미소공동위원회는 휴회된 지 약 1년 만에 재개되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던 1차회담 때와는 달랐다. 2차회담은 결렬 후 정세의 지지부진함을 경험하고 난 뒤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통한 조속한 통일정부 수립을 염원하게 된 대중들의 큰 기대 속에 열렸다. 이러한 기대를 반영하여 한국민주당 등 기존에 미소공동위원회 불참을 선언했던 우익세력 일부도 참여를 선언하는 등 성공을 위한 보다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2차회담은 1947년 5월 21일부터 10월 18일까지 진행되었다. 2차회담은 1차회담 때와는 달리 별다른 대립 없이 빠르게 진행되어 6월 7일에는 협의대상 규정문제에 합의했다고 발표했으며, 6월 11일에는 1차회담에서 발표된 공동성명 5호를 상기시키는 공동성명 11호가 발표되었다. 6월 25일에는 미소공동위원회 양측 대표단과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이로써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공을 목전에 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회담은 7월 초순, 협의대상 정당·사회단체의 명부 작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단계에 접어들자 재차 난항을 겪었다. 소련 측은 정당 단체 중 친일파, 민족반역자, 유령단체, 그리고 반탁투쟁위원회에 가입하였던 단체들을 협의에서 제외할 것을 제의한 반면, 미국 측은 협의를 청원한 단체 전부를 협의대상으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협의대상 단체들 중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의 비율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미소공동위원회는 8월 경 실질적 결렬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샬 미 국무장관은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서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조치가 미소 간의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에도 9월 21일, 유엔총회 운영위원회는 한국문제의 유엔총회 상정안을 가결하였다. 이후, 미소공동위원회는 공식적인 결렬 수순을 밟았고 10월 21일, 소련대표 일행이 북한으로 떠남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