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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崗上]·러우상[樓上] 돌무지무덤

우리가 발굴한 고조선 사람들의 안식처

미상

강상[崗上]·러우상[樓上] 돌무지무덤 대표 이미지

강상무덤 배치도

『雙砣子與崗上』, 中國社會科學院 考古硏究所, 1996

1 위치와 발굴조사

랴오닝성[遼寜省] 다렌시[大連市] 간징쯔구[甘井子區] 인청쯔향[營城子鄕] 허우무청이촌[後牧城驛村]에 위치한다. 강상 무덤은 허우무청이에서 북쪽으로 4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러우상 무덤은 동쪽으로 100m쯤 되는 거리에 있다. 그리고 강상 무덤에서 북쪽으로 2㎞쯤 떨어진 바닷가 옆에는 솽퉈즈[雙砣子] 유적이 자리한다.

허우무청이촌에는 독립된 4개의 작은 구릉(언덕)이 있는데 가장 서쪽 것을 “강상[崗上]”, 동남쪽 끝에서 두 번째 것을 “러우상[樓上]”이라고 부른다. 강상과 러우상은 450m 거리를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러우상 무덤은 1958년 처음 찾아졌는데 1960년 뤼순박물관에서 수습 조사를 하여 3기의 무덤방을 발굴하였다. 그 이후 1964년 북한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와 중국 고고연구소가 공동으로 ‘조·중 공동 고고학 발굴대’를 구성하여 강상과 러우상 무덤에 대한 발굴을 실시하게 되었다.

2 유적의 입지와 무덤의 구조

강상과 러우상 무덤은 각각 작은 언덕의 가운데를 평평하게 만든 후 가장자리는 돌을 쌓아 구획을 하고 그 안에 무덤방을 축조하였다.

강상 무덤은 길이 100m 되는 구릉에 동서 28m, 남북 20m 되게 자갈이 섞인 노랑 흙을 깔아 묘역(墓域)을 마련하였다. 1차로 모 줄인 네모꼴의 묘역(19×20m)을 축조한 다음 서쪽으로 2번에 걸쳐 보축을 하여 확장한 것이다. 묘역의 가장자리에 쌓은 돌담을 기준으로 보면 크게 3구역으로 구분되는데 동쪽이 맨 첫 번째 묘역이고 가운데가 1차, 서쪽이 2차 확장 구역이다. 돌담은 너비 3~5m이고 30~50㎝되는 석회암을 똑바로 쌓아 올렸다. 묘역에서 확인된 무덤방은 모두 23기이며 처음에 17기, 1차 확장 때 5기, 그 다음 1기를 축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10호는 돌담 위에 위치하고 있어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동쪽 묘역의 중앙에는 지름 7~8m 되는 돌담이 있는데 그 중심에 7호 무덤방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것을 기준으로 부채살 모습처럼 뻗은 8~16줄의 돌담 사이에 무덤방이 만들어졌다. 무덤방의 긴 방향은 대체로 남북쪽으로 일관성이 있으며, 7호를 중심으로 나란히 있는 6·19호 무덤방만 다른 것과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덤방은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위치하지만 9호와 23호는 유일하게 서로 겹쳐 있다.

무덤방은 축조에 이용한 재질과 만든 방법에 따라 크게 5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20~30㎝ 두께의 잔자갈 위에 넓적한 판자돌을 놓고 그 위에 화장된 뼈를 둔 다음 판자돌을 얹어 뚜껑돌처럼 사용한 무덤방(6·7·10호)이다. 둘째는 판자돌을 가지고 무덤방의 벽을 만든 돌널 구조가 있다. 여기에는 4·5·11·14·15호 무덤방이 해당된다. 셋째는 무덤방의 바닥에 짚 같은 식물 줄기가 섞여 있는 불탄 흙이 깔려 있는 것이다(1·10호). 식물 줄기가 섞인 흙은 바닥에 깔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다. 넷째는 자갈이 섞인 노란 흙 위에 잔자갈을 다시 깔아 무덤방 바닥을 만든 것(2·3·8·9·12·13·16~18·20~22호)이다. 강상 무덤에서 가장 많이 조사된 무덤방의 구조로 볼 수 있는데 화장의 영향을 받은 불 자국 범위로 무덤방 크기를 알 수 있다. 끝으로 맨땅을 파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움무덤의 무덤방이 23호에서 조사되었다.

7호 무덤방은 바닥을 파고 그 위에 30㎝쯤 자갈돌을 깐 다음 판자돌(310×170×10~15㎝)을 놓았는데 강상 무덤에서 가장 크다. 그리고 그 판자돌 가운데에 주검 받침돌[屍床石]처럼 길이 170㎝, 너비 104㎝ 되는 납작한 돌이 있었는데 여기에 불탄 사람 뼈와 유리질의 돌덩어리, 여러 가지 껴묻거리 등이 놓여 있었다.

러우상 무덤이 위치한 언덕은 타원형으로 상당히 큰 규모였으나 마을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흙을 파 일상 생활에 사용한 결과 서쪽과 남쪽은 낭떠러지가 되었다. 발굴 당시 언덕은 동서 34m, 남북 24.2m, 높이 6.8m의 크기였다. 여기에 석회암을 놓거나 쌓아서 모 줄인 네모꼴의 묘역을 마련하였는데 그 크기는 동서 21.9m, 남북 21.4m이다. 돌담은 부분적으로 파괴가 심한 상태이며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모습이다.

묘역 안에서는 10기의 무덤방이 발굴되었는데 짜임새와 사용한 돌에 따라 3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판자돌을 가지고 무덤방의 벽과 바닥을 만든 것인데 묘역의 중심에 위치한다. 1~3호 무덤이 여기에 해당하며 대체로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1호를 보면 무덤방은 320×205㎝ 크기이고 가운데 놓인 주검 받침돌 위에 성인 남자와 또 다른 사람 뼈가 있어 부부 어울무덤[合葬墓]으로 보인다. 무덤방의 바닥에 넓적한 판자돌을 깐 경우도 있는데 4·9호가 여기에 해당한다. 9호 무덤은 13개체의 화장한 뼈를 바닥돌 위에 놓았는데 남쪽과 북쪽에 모두 머리뼈가 섞여 있어 일정한 방향성은 없다. 다음은 무덤방의 바닥에 작은 자갈돌이 섞인 검은 흙을 깐 것으로 5~8·10호가 있다. 이러한 무덤은 크기가 비교적 작은 편이다. 6호는 15개체의 화장된 사람 뼈를 서로 겹치게 쌓아 놓았는데 어른 8개체와 어린이 7개체이다.

3 돌무지무덤에는 어떻게 묻었을까?

강상과 러우상 무덤의 여러 무덤방에는 한 사람만 묻는 홑무덤보다 여러 사람을 함께 묻는 것이 일반적인 묻기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강상 무덤에서는 23기의 무덤방에 모두 144명이 묻힌 것으로 밝혀졌는데 3호와 20호 무덤방에는 2명이 묻혔지만 19호에는 18명이나 묻혀 있었다. 또한 러우상 무덤의 6호 무덤방에서도 15명이 조사되었다. 이처럼 한 무덤방에 여러 사람을 묻은 것은 당시의 장례 습속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이러한 돌무지무덤은 다원화된 사회 발전 단계에서 나타나는 집단 무덤의 성격을 잘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어른은 물론 어린 아이도 묻힌 것으로 밝혀져 사회 구성원 전체의 공동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이들 무덤에서는 화장이 보편화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강상 무덤의 2·12·23호 무덤방을 제외한 모든 무덤방과 러우상 무덤에서는 화장의 흔적이 조사되었다.

화장은 선사시대부터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유행한 묻기의 한 행위로 당시 사회 구조나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재의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신석기 후기부터 나타나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 상당히 널리 유행하였던 것 같다. 더불어 중국의 옛 자료인 『묵자(墨子)』 「절장하(節葬下)」, 『여씨춘추(呂氏春秋)』, 『열자(列子)』 등에 이에 대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강상과 러우상 무덤에서는 화장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특히 무덤방에 주검과 함께 껴묻기된 청동기나 토기가 화장에 의한 불의 영향으로 제 모습을 잃고 변형된 상태로 조사되었다. 이렇게 많은 비용이 필요하고 복잡한 절차가 있었던 화장을 바로 그 자리에서 한 것은 뼈의 보존을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발굴조사 결과, 불의 온도가 일정하지 않아 주검에 따라 화장의 정도 차이가 있다. 누상 6호 무덤방에서는 화장된 뼈가 6층 정도 쌓여 있는 것으로 밝혀져 주검을 모아 한꺼번에 화장을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화장 행위는 주변에 있는 투룽즈[土龍子], 왕바오산[王寶山], 워롱첸[臥龍泉] 돌무지무덤에서도 조사되고 있어 당시에 요동반도 지역에서 성행하였던 묻기로 보인다.

러우상 무덤에서는 묻기 과정에 있었던 제의 행위가 조사되었다. 그 행위로 여겨지는 것은 토기를 깨뜨려 무덤방 주변에 흩어 놓은 것인데 이것은 의도적으로 한 것으로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사회적 공인 행위로 해석된다. 또한 러우상 무덤의 7호 무덤방에서는 붉은색의 자갈돌이 조사되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붉은색 돌을 장례 의식에 이용한 것은 영생(永生)이나 죽은 사람으로부터 받게 될 위험을 멀리 하는 벽사(辟邪)의 의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4 어떤 유물들을 껴묻기 하였을까?

강상과 러우상 무덤에는 다양한 성격의 여러 유물들이 껴묻기 되어 있었다. 강상 무덤의 15·22호와 러우상 무덤의 7·8호에는 껴묻거리가 없었고 나머지 무덤방에서는 종류와 수량에 차이는 있지만 묻힌 사람과 관련 있는 유물이 찾아졌다. 무덤방에서 제자리 화장을 하였기 때문에 청동기나 토기는 원형을 잃고 변형된 것도 있다. 껴묻거리는 청동기, 석기, 토기, 꾸미개 등으로 구분된다.

청동기는 비파형동검을 비롯하여 화살촉, 창 끝, 팔찌, 단추, 비녀, 검자루 끝장식 등이 있다. 비파형동검은 6점이 조사되었는데 화장에 따른 불의 영향으로 변형된 것이 있다. 돌기부나 등대, 마디 끝으로 볼 때 시기 차이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검자루 끝장식은 강상 7호 무덤방에서 출토되었는데 둥근 고리 모양이고 네모난 돌기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런 것이 근래 김해 연지리 고인돌과 광주 역동 돌덧널무덤에서도 찾아져 비교된다.

토기는 고운 찰흙을 이용하여 손으로 만들었는데 대부분 홍갈색이다. 항아리[罐], 단지[壺], 사발[碗], 굽접시[豆] 등이 있는데 간혹 몸통에 혹 모양 손잡이[瘤耳]나 몸과 어깨 부분에 그물무늬[網狀紋]가 있는 것들이 나타난다.

석기는 돌도끼, 화살촉, 달도끼, 가락바퀴 그리고 거푸집 등이 있다. 거푸집은 청동기 제작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강상 16호 무덤방에서 한꺼번에 4점이 찾아졌다. 청동 도끼, 끌, 꾸미개를 만들 수 있는 것으로 활석을 돌감으로 이용하였다. 거푸집이 무덤에 껴묻기 되었다는 것은 전문 장인의 등장, 계층화, 잉여 생산물이 있는 당시 사회 성격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며 더불어 묻힌 사람의 신분이나 직업을 추론해 볼 수 있게 한다.

꾸미개는 돌, 유리, 뼈, 흙으로 만든 구슬이 대부분이고 조가비를 가지고 만든 것도 있다.

5 강상과 러우상 무덤은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

강상과 러우상 돌무지무덤은 고조선 시기의 장제로 널리 알려져 있던 화장을 하였고,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이와 관련된 여러 청동기가 발굴되었다. 묻기와 껴묻거리를 보면 고조선 사람들의 장례 의식이나 생활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들 무덤은 랴오둥반도를 중심으로 한 랴오난[遼南] 지역의 고조선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이들 무덤은 큰 돌무지 안에 비교적 정교하게 축조된 수 십 기의 무덤방이 있고 그 안에서 비파형동검과 같은 무기류가 출토된 까닭에 북한 학계 등에서 노예제 사회의 순장무덤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묘역이 3차에 걸쳐 조성된 것에 주목하여 집단무덤으로 이해하고 있다.

무덤의 축조 연대는 절대연대 측정 자료가 없기 때문에 랴오둥반도 청동기문화의 표준 유적인 솽터즈 3기 문화와 비교되며 그 연대는 서기전 10세기 경으로 볼 수 있다. 두 무덤의 선후 관계는 껴묻거리와 무덤의 구조로 보아 누상 무덤이 조금 늦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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