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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조양동 유적

경주 조양동 38호 널무덤과 신라 건국

미상

경주 조양동 유적 대표 이미지

경주 조양동 38호 널무덤 출토 와질토기와 중국거울

국립경주박물관

1 개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신라 건국은 기원전 57년이다. 그렇기에 신라를 천년왕국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정확히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건국되었다는 기록은 과연 얼마나 믿을만한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 경주 조양동 유적 의 발굴이었다. 이 유적이 발굴되면서 신라가 건국되었다는 기원전 57년의 연대가 그리 거짓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2 경주 조양동 유적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울산을 잇는 7번 국도 상에 위치한 조양동 유적은 변진한 특유의 토기인 와질토기의 존재를 알린 첫 번째 유적이다. 모두 39기의 널무덤과 덧널무덤 13기, 돌덧널무덤 8기, 독무덤 20기 등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무덤들이 모여 있는데, 특히 무늬가 없는 청동거울이 출토된 5호와 중국 한나라의 청동거울이 출토된 38호 널무덤, 그리고 널무덤의 마지막 단계로 호랑이장식 허리띠가 출토된 60호 널무덤이 유명하다.

조양동 5호 널무덤에서는 한반도 서남부에서 주로 발견된 다뉴경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무늬가 사라진 퇴화형 청동거울이 출토되었다. 아울러 말방울을 비롯하여 철로 만든 꺾창, 철칼, 유리목걸이 등이 덧띠토기와 와질토기의 중간 단계 토기들도 함께 발견되었다. 다음 단계에 속하는 조양동 38호 널무덤에서는 쇠뿔손잡이단지, 주머니항아리 등 소위 ‘와질토기’와 함께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중국 한나라의 거울이 출토되었다. 이 무덤의 발굴을 통해 이전까지 안개 속에 파묻혀 있던 기원 전후한 시기의 토기문화를 선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기존 일본인 학자들이 주장한 ‘김해시대’와 ‘김해식 토기’를 부정하는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김해시대란 삼국시대에 바로 앞선 시대로, 김해 회현동 조개무지의 발굴조사에서 중국 신나라 화폐인 화천(貨泉)을 근거로 상정되었다. 하지만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토기는 4~6세기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개무지에서 발견되면 1~3세기 김해시대의 것, 무덤에서 발견되면 4~6세기 삼국시대의 것이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양동 발굴을 근거로 김해식토기는 4~6세기의 것이고, 1~3세기의 토기는 기와와 같이 손으로 문지르면 묻어나는 ‘와질토기’임이 확인된 것이다.

또한 조양동 유적의 발굴자는 무덤 관을 이루던 목재가 썩어 없어져 단순히 움무덤으로 이야기되던 것들을, 처음으로 흙이 쌓인 토층(土層)의 분석을 통해 판재식 나무널이 있었음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3 와질토기 논쟁

와질토기는 한군현 설치 이후 중국의 토기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만들어진 한반도 남부 최초의 회색토기이다. 이전까지는 갈색토기였는데, 야외의 가마에서 토기를 굽다 보니 산소에 계속 노출되어 산화가 일어나 철녹과 같은 색깔을 띠게 되었던 까닭이다. 회색토기는 밀폐된 가마에서 구워 산소가 모두 사라지고 환원되면서 만들어진다. 즉 와질토기는 한반도 남부에서 최초로 밀폐된 가마에서 제작된 것이다. 밀폐되었기 때문에 더 높은 온도로 토기를 구울 수 있게 되었지만, 뒷날 개발되는 도자기 가마와 같이 경사를 가진 등요(登窯)에서 제작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로 토기가 구워졌다. 그래서 이름 그대로 기와와 같이 무르며, 손으로 문지르면 묻어날 정도로 표면이 약하다. 또한 와질토기는 제작 과정에서 회전판과 같은 물레를 사용하여 더 얇고 둥글게 만들어졌는데, 이는 같은 시기 일본의 경우 회전판은 사용하지만 아직도 갈색의 야요이토기를 만들고 환원염의 회색 토기를 만들지 못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이런 와질토기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에는 조양동 38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주머니항아리와 쇠뿔손잡이단지가 대표적이며, 후기에는 주머니항아리와 쇠뿔손잡이가 사라지고 토기에 다리가 붙는 화로모양토기 등의 형태로 바뀐다. 이러한 변화는 무덤 제작의 변화와도 연계되어 전기는 널무덤, 후기는 덧널무덤이 만들어졌다.

와질토기가 사용되던 시대에도 갈색의 산화염으로 만들어진 토기는 존재한다. 또한 와질토기가 발견된 범위는 경상도의 변진한에 한정되며 충북지역에서 일부 확인될 뿐이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 전역을 포괄하는 토기문화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토기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 와질토기가 변진한을 대표하는 토기로서, 이전까지 모호했던 기원전 1세기 전후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기문화를 밝힌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경주 조양동 38호 널무덤은 이러한 와질토기의 존재를 처음 알리고, 나아가 기원 전후한 시기의 문화가 어떤 것인지를 밝힌 귀중한 자료이다.

4 철의 길

경주 조양동 유적 이 위치한 곳은 경주 시내에서 벗어나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변이다. 이 7번 국도를 따라 한국식 청동기문화의 청동유물과 중국 한나라의 청동거울 등이 출토되는 유명한 유적들이 이어진다. 이런 유적들의 연대는 공교롭게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건국의 연대인 기원전 57년 즈음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는 와질토기문화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이 기간 동안 각 지역마다 나무널무덤들이 나무덧널무덤을 거쳐 돌덧널무덤 등으로 발전해간다. 즉 무덤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는데, 이를 통해 지역 정치세력의 연속적인 성장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고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삼국시대에 앞선 시기라는 의미로 원삼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기원전 57년 신라의 건국 기사를 인정한다면 삼국시대의 시작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원전 57년 무렵 나타나는 모습으로 삼한화를 들 수 있다. 그 이전까지 마한을 중심으로 잔무늬거울 문화가 중심이 되고 있었는데, 이 시점을 기점으로 진한에서 삼한의 청동거울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외부 문화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변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이전 일본인 학자들이 중국 거울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며 ‘본뜬거울’(倣製鏡)이라 불렀던 청동거울이, 사실은 중국 청동거울의 수입량이 부족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삼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다뉴경과 같은 전통적인 청동거울과 결합하여 새롭게 탄생시킨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중국의 전한시대 청동거울[前漢鏡]이 출토된 유적을 살펴보면 대구 지산동·평리동, 경산 양지리·임당·신대리, 영천 어은동·용전리, 포항 성곡동, 경주 탑동·조양동, 울산 농소 유적 등이 있다. 즉 기원전 57년 즈음에는 지역 집단의 성장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데, 이 시기 한군현과의 교류를 통해 성장한 지배자의 무덤이 지역적으로 확인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신라의 중심세력인 경주를 중심으로 위계적인 지배체제가 만들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런 중국 한나라의 문물이 수입되지만 출토된 무덤들 간에 그리 큰 격차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목되는 것이 경주세력의 성장과 울산세력과의 관계이다. 주지하다시피 울산에는 철광석을 채취하는 유명한 달천 광산이 있다. 이 달천 광산에서 채광된 철광석이 경주로 운반되어 황성동 등지에서 제련, 정련되어 철기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달천 광산의 철은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한전조(魏書 東夷傳 韓傳條)에 기록된 바와 같이 무역의 대상품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장악하는 것은 정치제의 흥망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울산 농소 유적의 존재로 보아 기원전 1세기 중후엽에는 토착 집단이 달천 광산을 장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달천 광산에서 채광된 철광석은 현재의 7번 국도를 타고 경주로 운반되어졌을 것이다. 현재 울산과 경주를 잇는 7번 국도를 기준으로 울산 달천-농소-중산-경주 구어리-입실리-죽동리-구정동-조양동-탑동-경주 시내를 이어주고 있었을 것이다. 이 길목을 통제하는 세력들의 성장 배경은 아마도 달천 광산에서 채광한 철광석을 정련과 제련을 위해 경주 시내로 운반하면서 이루어진 교역에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연결통로를 ‘철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기원전 57년경 한반도 남부

신라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진한에서는 경주와 울산 세력이 철광석의 채취와 철기의 제작이라는 분업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 가야의 전신인 변한에서도 창원 다호리 1호 널무덤과 같이 많은 철기와 중국 한나라의 문물을 가진 무덤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진한에 비하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며, 진한에서는 조양동 38호 널무덤과 같이 여러 개의 중국 한나라 청동거울을 가진 무덤들이 존재하지만 같은 시기 변한의 무덤에서는 하나의 청동거울만 출토될 뿐이다. 다만 진한에서는 모두 무덤에서만 발견되지만, 변한에서는 사천 늑도 유적의 경우 집자리에서, 김해 회현동 유적의 경우 조개무지에서 중국 한나라의 청동거울 파편이 출토된다는 점이 다르다. 한군현에서 일본을 잇는 교역의 길은 내륙의 육로와 해안을 따라 가는 해로로 크게 나뉘었는데, 육로는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길로서 그 중심에는 진한의 경산-경주 세력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무덤에서 많은 양의 완전한 형태의 중국 한나라 문물이 발견된다. 이에 반해 해로는 서해를 따라 내려와 남해의 김해까지를 잇는데, 완전한 형태의 청동거울도 발견되지만 앞서 살핀 것처럼 청동거울의 파편도 많이 확인된다. 그런 해로의 중심에는 변한의 김해가 있었다. 신라가 건국된 시점에는 변진한에서는 철을 중심으로 교역을 하며 성장한 정치세력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전의 중심이었던 마한에서는 이 시기 뚜렷한 지배자의 무덤이 확인되지 않는다. 삼한 중 가장 강력했던 마한과 백제의 기원 전후한 지배자는 아직 모호하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내려와 이룬 6촌에서 시작한다.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 이즈음을 경계로 와질토기나 중국 한나라의 문화 등이 한반도 남부, 그중에서도 변진한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기원전 57년 신라 건국 기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기원후 280년대에 쓰여진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동이전에는 고구려가 등장하지만 신라나 백제, 가야는 보이지 않고 삼한이 확인될 뿐이다. 하지만 경주 조양동 38호 널무덤은 기원전 57년 즈음 경주에서 울산 달천광산의 철을 중심으로 중국 한나라와 교역하는 거대한 정치세력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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