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고령 장기리 암각화

고령 장기리 암각화[高靈 場基里 岩刻畫]

하늘과 사람을 잇는 바위

미상

고령 장기리 암각화 대표 이미지

고령 장기리 암각화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보물 제605호로 지정된 고령 장기리 암각화(高靈 場基里 岩刻畫)는 경상북도 고령군 아래알터길 15-5에 위치한다. 알터 마을 입구에 높이 3m, 너비 6m의 암벽에 새겨져 있으며 동심원, 십자형, 가면 모양 등이 확인된다. 농경사회의 신앙과 관련된 제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근처에서 출토된 석기와 토기 등을 통해 청동기 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암각화로 보고 있다.

2 암각화의 발견과 주변 환경

고령 장기리 암각화는 1971년에 발견되어 그해 4월 24일~29일에 걸쳐 조사되었다. 발견 당시 양전동 알터 암각화로 불렸는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암각화에 이어 세 번째로 발견된 암각화이다. 그림은 너비 6m, 높이 3m의 바위면 한가운데와 좌우에 여러 겹의 동그라미가 있고(3점) 그 주위의 바위 전면에 29점의 방패형 신상 그림이 새겨져 있다. 크기는 18~20cm 내외이며, 이 밖에 불분명한 사각형 내부에 열십자형의 그림 한 점이 있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 전방 270여 미터 지점에 회천이 흐르고 있다. 이 회천이 감아 도는 북쪽 언덕 알터 마을이 암각화가 있는 곳이며, 본래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는 앞의 하천과 접한 상태였으나 물길이 바뀌면서 현재는 강과 떨어져 있다.

장기리 암각화는 그 위치로 보아 울주 반구대, 천전리 암각화가 하천변에 위치하는 것이나 시베리아 지역의 암각화가 물가에 있는 것과 흡사하다. 따라서 이들 암각화가 의례를 진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새겨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장기리 암각화 역시 의례를 위해 그려졌다고 봐도 될 것이다.

장기리 암각화의 발견 이후 1989년부터 비슷한 유형의 암각화들이 경상북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영주 가흥동, 영일 칠포리, 영천 보성리, 경주 석장동 등에서 확인된 바 있다. 장기리 암각화의 방패 문양과 유사한 문양을 가진 암각화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고령의 장기리 암각화가 상당히 발달한 단계의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장기리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 문화를 가진 집단의 제단 유적으로서 의례를 거행하는 신성한 공간이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3 암각화가 알려주는 지모신(地母神) 신앙

장기리 암각화의 주요 모티브는 몇 겹으로 그려진 동심원이다. 이것이 곧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이라는 견해가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울산 천전리와 함안 도항리 유적 등에서도 동심원 암각화가 발견된 바 있다. 동심원이 태양을 상징한다면 결국 주술적 요소로서 태양신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유적은 청동기 시대 이래로 성행되어 온 태양 숭배 사상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농경사회를 바탕으로 한 한반도의 경우 농사의 풍요를 기원함과 동시에 계절의 순환을 의미하는 상징으로서 원을 신앙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작물을 심어 기르고 수확물을 얻는 일련의 과정이 계절의 순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재생 관념과 농경 의례를 결부시켜 이해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동심원을 북방계 천신족(天神族)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아 토착민에 대한 선민의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것이 나중에 부족 상징의 의미가 소멸하면서 동심원이 상징하는 의미도 변화하여 해당 집단의 소원이 신에게 닿기를 소망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새겨졌을 것이라 본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동심원은 대체로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동심원이 태양과 관계가 있다면, 암각화 유적지 인근의 자연적 입지 조건이 뜻하는 의미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유적의 입지는 건립 주체의 문화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심원이 바라보고 있는 정면에는 대체로 개천이나 강이 있다. 이는 동심원 암각화가 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동심원의 표현은 물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동심원을 그리게 된 제작 동기는 기후 의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해볼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기우제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비가 내리지 않아 물이 부족하게 된 인간이 그 고통을 해소하고 현상을 극복하고자 진행하였던 의례였다. 이러한 행위는 자연재해나 국가대사와 같은 사건을 겪을 때마다 일어났으므로, 의례의 상징성 등을 생각할 때 장기리 암각화 역시 오래전부터 고령지역에서 물과 관련된 의례를 통해 하늘에 기원하는 매개이자 장소로서 기능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암각화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 태양을 의미하는 동심원이고, 그것이 물과 관련된 의례에 있어서 기원의 대상이라고 할 때, 그다음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의례 진행 주체의 표현 여부일 것이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의 경우 수많은 동물 사이에 샤먼으로 지목되는 인물의 형상이 확인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장기리 암각화에도 그러한 존재가 표현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때 주목된 것이 동심원 주위에 그려진 검파형(劍把形, 칼자루 모양) 무늬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문양은 돌칼이나 청동검의 손잡이와 같은 형태인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장기리 암각화만 봐서는 알기 어렵다. 그런데 이 도상과 관련된 선행 연구들에서는 외국 암각화의 사례와의 비교·검토를 통해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있어 관심이 간다.

이러한 연구에서는 시베리아 연해주의 사카치 아리안(Sakachi Aryan) 암각화에는 가면을 중심으로 머리털 또는 빛줄기 모양의 직선이 둘러져 있는데, 장기리 암각화에도 검파형 무늬 주위에 이러한 직선이 둘러져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에 사카치 아리안 암각화의 그것이 가면으로 이해되고 있는 점에 착안하여, 장기리 암각화의 검파형 무늬 역시 가면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장기리 암각화의 검파형 무늬가 사람의 얼굴을 형상화한 가면의 표현인가 하는 점일 텐데, 이 문제 역시 시베리아-알타이 지역의 여러 암각화에 나타난 가면의 사례를 통해 비교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가면을 나타내는 그림은 대개 샤먼의 얼굴을 표현한 것이며, 주술의 진행자라는 특성상 얼굴이 신이적, 기하학적으로 형상화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샤먼의 얼굴에는 신이 의인화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서 숭배대상이 되는 신은 조상신이거나 이를 돕는 존재로서 동물의 정령이 등장하는 사례도 확인된다. 이러한 영혼들이 샤먼의 영혼과 결합하면 인간세계에서 볼 수 없는 신이한 모습으로서 나타나고, 그것이 암각화에서 기이한 모양으로 표현되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연구에서는 시베리아-알타이 지역의 원주민들의 이동 경로를 염두에 둔다면 알타이 지역에서 보이는 가면 문양의 암각화가 아무르강을 거쳐 연해주의 사카치 아리안 암각화로 이어지고, 이들이 동해안을 따라 한반도 남부로 내려와 영일 칠포리의 암각화를 남겨, 장기리 암각화에 이르렀다고 파악한다.

장기리 암각화의 조성연대를 고려할 때, 제작 주체는 고령지역에 살았던 청동기 시대의 씨족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설명했듯 암각화의 위치나 동심원의 의미로 보아 이곳은 벼농사의 풍요를 비는 농경의례의 거행장소였을 것이다. 검파형 문양이 샤먼의 신이한 얼굴을 표현한 것이라면, 당시 종교와 정치가 미분리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의례의 거행자는 씨족의 지배자이자 제사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그는 의례를 진행하는 제사장의 위치에서 암각화를 그렸을 것이므로 여기에는 그와 관련된 인식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주목되는 것은 암각화가 위치한 지역이 ‘알터’라고 불린다는 점이다. 지명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장기리 암각화에는 난생신화(卵生神話) 내지 그와 같은 유형의 신화와 전설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이 지역은 한국의 고대국가 중에서도 대가야의 근거지였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경상도(慶尙道) 고령현(高靈縣) 건치연혁(建置沿革) 조 에는 정견모주(正見母主)와 관련된 신화가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되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뇌질주일(惱窒朱日)이 대가야를, 둘째 뇌질청예(惱窒靑裔)가 금관가야를 건국했다고 한다. 또한 암각화가 위치한 장기리 알터 마을과 관련된 민간전승 역시 가야산신이 하늘에 감응하여 두 개의 알을 낳았다고 전한다.

이로 보아 장기리 암각화는 가야산신 정견모주로 표현되는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일 가능성이 있다. 고대의 신화에서 여신은 남신의 역할이 없어도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령 일대의 집단은 여신을 숭배하며 이를 통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여신숭배가 지모신(地母神)에 대한 숭배로 인식되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였다는 점 역시 참고가 된다. 또한 암각화가 상대적으로 지상에서 높은 지점에 자리한다는 점으로 볼 때, 이는 하늘을 향한 곳 내지 하늘과 만날 수 있는 곳을 의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장기리 암각화의 입지와 바위에 그려진 그림의 의미는 천신에 감응하여 알을 낳은 지모신이 거처하는 곳으로서 주변에 있는 집단들이 농경의 풍요와 자손의 번영을 기원할 수 있도록 조영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암각화에 새겨진 문화의 이동과 관련하여 본다면, 동심원과 검파형 문양은 청동기 시대에 연해주 지역 암각화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지역마다 다소의 문양 차이 등이 나타나는 것은 암각화를 새긴 주체들이 당시에 처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드러나게 된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씨족집단의 수장이기도 하였던 제사장이 지모신과 결합하여 천신에 감응하는 일련의 의식은 암각화에서 하늘을 의미하는 동심원과 숭배대상과 결합한 얼굴로서 검파형 무늬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의례의 구조는 보다 후대의 고대 신화들과의 접점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고구려에서 하백(河伯)의 딸이었던 수신(隧神, 水神) 유화가 신으로 숭배되었던 것,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배우자 알영(閼英)이 용의 몸에서 나와 물로 몸을 씻었던 것, 가야 김수로(金首露)의 배우자 허황옥(許黃玉)이 배를 타고 온 것 등은 여신과 물이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동시에 이러한 신화적 구조가 현재 알려진 것보다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점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