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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석장리 유적

우리나라 구석기학의 밑바탕이 되다

미상

공주 석장리 유적 대표 이미지

공주 석장리 유적 전경

연세대학교 박물관

1 개요

공주 석장리 유적은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동의 금강 북쪽 강변에 바로 인접해 있는 구석기 시대 유적이다. 남한에서 최초로 발굴 조사된 구석기 유적으로, 1964년 처음으로 조사된 이후 13차례에 걸쳐 발굴이 진행되었다. 사적 제334호로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의 존재를 입증해준 기념비적인 유적이며, 층위를 따른 여러 문화층이 존재하여 시기에 따른 구석기문화의 변화상을 밝혀주었다. 발굴 과정에서 다양한 자연과학 분석 방법을 도입하여, 한국 구석기 연구의 기초적인 체계를 확립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 유적의 발굴 경위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석기 문화의 존재가 확인된 곳으로, 현재까지 모두 13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미국의 고고학자 앨버트 모어(Albert D. Mohr)와 릴리 샘플(Lillie L. Sample) 부부는 1963년 홍수로 무너져 내린 금강 유역에서 뗀석기를 채집하였고, 1964년 5월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와 함께 석기가 채집된 현장을 답사하여 새로운 석기를 찾게 되었다. 이에 연세대학교 발굴팀이 구성되어, 1964년 11월 석장리 구석기 유적의 첫 번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뒤 1974년까지 10차에 걸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고, 1990년과 1992년 11~12차 발굴 조사가, 2010년에 13차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석장리 구석기 유적은 1지구와 2지구로 나뉘어 발굴되었다. 두 지구는 15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금강 하류 방향의 서쪽 부분은 1지구, 그리고 상류 방향의 동쪽 부분은 2지구에 해당한다. 두 지구에서 조사된 각 발굴 구덩은 남북 및 동서 방향에 입각한 기준선을 적용하며 구획되었다. 이어 1969년(6차, 1지구)부터는 바둑판식 칸 나누기 방법을 적용하여, 일정한 범위 내에 분포한 문화층과 비문화층 또는 퇴적 지층의 상호 관계를 빠른 시간 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1~4차 발굴까지는 금강에 인접한 2지구의 1~4구덩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후 5~6차 발굴에서 5~13구덩으로 조사가 확대되었다. 그 결과 2지구에서 조사된 퇴적층의 전체적인 흐름이 북쪽에서 남쪽 그리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기운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모두 27개의 세부 지층을 파악할 수 있었다.

1지구의 조사는 6차 발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는 주로 4지층과 5지층을 중심으로 조사가 진행되었고, 후기 구석기 시대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일부 구덩의 경우, 6지층 아랫부분이 발굴되기도 하였지만, 출토 유물의 수는 매우 적었다. 6차 발굴에서는 후기 구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새기개·밀개 문화층이 5지층을 중심으로 1지구의 여러 구덩에서 확인되었다.

이후 7~9차 발굴에서는 51구덩의 5지층에 대한 조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져, 집자리를 확인하였고, 후기 구석기 시대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8차 발굴에서는 1지구와 2지구의 층위 연결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두 지구의 5지층 및 첫 번째 석층인 6지층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양상이 조사 확인되었다.

10차 발굴에서는 51구덩의 북쪽에 자리한 61~64구덩을 중심으로 발굴이 진행되었고, 4~5지층에서 역시 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가 많이 수습되었다.

11~12차 발굴에서는 81구덩을 중심으로 하여, 앞서 조사된 1지구 북쪽 구덩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1지구의 전체적인 층위 구성과 토양 쐐기 상부층에서 새로운 문화층을 확인하였다.

이상과 같이 12차례에 걸쳐 조사된 구덩 가운데 특히 3개 구덩은 석장리 유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먼저 2지구 1구덩으로 1964년의 1차 발굴에서 한국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굴되었다. 석장리 유적에서 보고된 전기 및 중기 구석기 시대의 유물은 대부분 이 지점을 중심으로 출토하였으며, 학계에 널리 알려진 석장리 유적의 대표 단면도 이곳에서 이루어진 발굴(1965~66년) 자료를 토대도 작성되었다. 이 대표 단면(전체 두께: 약 11m)은 석장리 유적의 지층과 문화층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다음으로 1지구 51구덩이다. 이곳에서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집자리를 비롯하여, 돌날 및 좀돌날 석기, 슴베찌르개 등을 포함한 다양한 석기 종류가 출토하였다. 이와 같은 유구와 유물은 한국에서 가장 처음 찾은 것들이었다. 마지막은 1지구 81구덩과 그 인접 구덩이다. 암갈색 찰흙층(첫 번째 토양 쐐기 구조 포함층) 위에 놓인 명갈색 찰흙층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 늦은 시기의 집자리, 좀돌날 석기 등이 발굴되었다. 이 구덩의 대표 단면과 함께,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는 석장리 후기 구석기 시대 문화의 전개 과정과 더불어 1지구와 2지구의 퇴적 양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3 유적의 층위와 출토 유물

석장리 유적에 퇴적된 층위 양상을 1지구 81구덩의 발굴 결과를 중심으로 볼 때, 1지구의 층위는 기반암-강바닥 퇴적층-강가 퇴적층-홍수 퇴적층-비탈 퇴적층으로 나누어져, 2지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래쪽으로부터 크게 기반암, 수성 퇴적층, 비탈 퇴적층으로 구분된다. 비탈 퇴적층의 하부와 상부에서 각각 중기와 후기 구석기 시대의 문화층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1~10차 발굴로 확인된 1지구와 2지구의 문화상과 유사하다. 기준 구덩의 층위와 절대 연대 측정 자료들을 가지고 살펴보면, 유적의 층위는 크게 3번에 걸친 퇴적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반암 바로 위에 쌓인 수성 퇴적들은 마지막 빙기 이전의 간빙기 동안에 쌓인 층이고, 그 위에 쌓인 비탈 퇴적은 마지막 빙기 동안에 쌓인 층이며, 찰흙층은 마지막 빙하기 후기에 쌓인 것으로 나타난다.

전기 구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문화층에서는 찍개, 주먹괭이, 자르개, 주먹대패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 시기 문화층의 존재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다. 사실 9문화층 아래에서는 발굴 면적이 좁고 출토 유물도 많지 않기 때문에, 아직 뚜렷한 성격을 말하기는 어렵다. 11~12차 발굴에서는 1지구 81구덩에서 기반암까지 발굴하여, 2지구 1구덩과 지층이 서로 연결되는 양상을 확인하였고, 기반암 위에 놓인 강가 퇴적층에서 외날찍개를 비롯한 몇 점의 석기를 발굴하였다. 하지만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강물이 흘러들어와 넓은 면적을 발굴할 수 없어, 그 이상의 문화 성격을 확실히 파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른 시기의 퇴적층에서 석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전기 구석기 시대 문화층의 존재는 아직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중기 구석기 시대 문화층에서는 주먹도끼, 찍개를 비롯하여 긁개, 밀개, 뚜르개, 찌르개 등이 조사되었는데, 전기 구석기 시대 문화층보다 다양한 암질의 돌감이 사용되었고, 격지 석기의 제작 기술과 함께 잔손질 기술이 발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0지층 9문화층에서는 반암 자갈돌을 돌감으로 한 몸돌이 다수 확인되었고, 활발한 격지 생산과 함께 밀개, 긁개 등 잔손질된 격지석기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후기 구석기 시대 문화층의 경우 1지구 51구덩에서 확인된 1호 집자리를 중심으로 많은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돌날석기의 제작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식의 좀돌날몸돌과 좀돌날이 조사된 사실로 볼 때, 좀돌날 석기의 제작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돌감으로는 석영 이외에 반암, 응회암, 유문암 등이 사용되었으며, 흑요석도 확인되었다. 잔손질된 석기로는 밀개, 긁개를 비롯하여 슴베찌르개, 새기개, 나뭇잎모양찌르개 등 후기 구석기 시대의 전형적인 석기가 다양하게 조사되었다.

4 자연과학 분석의 적용과 의의

1지구 51구덩 후기 구석기 시대 문화층의 집자리에서 수습한 숯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20,830±1,880 BP로 나왔다.(BP는 Before Present의 약자로 ‘years before present’, 즉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을 의미한다)

이 연대값은 다른 지점에서도 관찰되는 첫 번째 토양쐐기의 형성 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그리고 찰흙층 아래에 있는 8지층과 12지층 모난돌 포함층에서는 각각 30,690±3,000BP와 >50,270BP의 연대가 나왔다. 이러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는 몇 가지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후기 구석기 시대 문화층의 연대 설정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었다. 둘째, 측정 결과는 유적의 여러 지층이 서로 다른 시기에 층을 이루며 퇴적되었음을 반영한다. 셋째, 약 3만 년으로 측정된 지층의 아랫부분에 놓인 퇴적층은 후기 구석기 시대보다 앞선 시기에 형성되었음을 알려준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이외에 석장리 유적에서는 자연과학 분석을 통한 고환경 연구가 크게 두 가지 접근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퇴적물의 낟알 크기 분석이며, 다른 하나는 식물 유체 분석이다. 꽃가루 분석과 나무 숯의 수종 감정에 의하여 식물 유체가 분석되었다. 꽃가루 분석 결과, 11가지 종류의 꽃가루와 포자 등이 검출되었다.

이와 같이 석장리 유적에서는 인공 유물뿐만 아니라 토양이나 식물 유체와 같은 자연 유물에 대한 분석 성과가 축적되었고, 석장리 구석기문화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종합적인 연구 체계가 구체적으로 확립되었다. 다시 말해 토양의 낟알 크기 분석, 식물 유체 분석,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등은 우리나라 구석기 고고학 연구에 있어, 자연과학과의 공동 연구가 매우 필요하다는 점을 알리고, 고고과학의 기초적인 체계를 세우는 밑거름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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