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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포리 서포항 유적

해방 이후 최초의 구석기 유적

미상

굴포리 서포항 유적 대표 이미지

굴포리 서포항 유적 전경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국립문화재연구소)

1 개요

굴포리 유적은 나선특별시(옛 행정구역명: 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서포항동에 있는 선사 시대 유적으로,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발굴되었다. 북한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1498호에 해당하며, 구석기 시대 2개 문화층과 신석기 시대 5개 문화층, 청동기 시대 2개 문화층 등 모두 9개의 선사 시대 문화층이 조사되었다. 특히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 출토된 석기의 수량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도 구석기 유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중요한 유적이었다.

2 유적의 발굴 경위

굴포리 유적은 두만강 하구로부터 서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서포항동 동쪽의 우암산에서 뻗어내리는 산기슭의 나지막한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해안선까지의 거리는 300~400m에 이른다. 유적의 남서쪽으로는 조산만의 해안이 펼쳐 있고, 북쪽으로 동번포와 서번포가 위치한다. 유적 앞에는 석호(潟湖)가 발달해 있고 뒤로는 산을 등지고 있어, 먹거리가 풍부하여 선사시대 이래로 살림살이에 알맞은 곳이다.

농장의 가축 사료로 쓰기 위하여 조개무지를 파내는 과정에서 알려진 굴포리 유적은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가 다섯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은 8개의 지구로 나뉘어 조사되었고, 구석기 시대 2개 문화층과 신석기 시대 5개 문화층, 청동기 시대 2개 문화층 등 모두 9개의 선사 시대 문화층이 있다고 보고되었다. 신석기 시대 문화층에서는 모두 21기의 집자리가 조사되었고, 다양한 토기와 함께 간석기, 뼈연모, 치레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 문화층에서는 9기의 집자리와 2기의 움무덤이 조사되었으며, 무문토기와 붉은간토기, 각종 간석기, 뼈연모, 치레걸이와 뼈피리 등 여러 예술품이 출토되었다.

한편 1962년 가을, 5지구 신석기 시대 문화층의 아랫부분에서 구석기 시대 석기로 추정되는 밀개 1점이 나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어 1963년 4월 그 자리를 확장 발굴하여 석영과 각혈암 등으로 제작된 뗀석기가 다시 출토되었다. 1962년 가을과 1963년 4월에 걸쳐 출토된 뗀석기는 약 6점이다. 비록 그 수량을 적은 편이었지만, 구석기 시대의 지층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발굴 성과는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이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이후 1963년 7~8월, 한 차례 더 발굴이 진행된 뒤, 그동안의 조사 결과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가 이루어졌다. 구석기 시대 퇴적층은 모두 7개 지층으로 나누었고, 이 가운데 석기가 출토된 VI지층을 굴포문화 I기층, V지층을 굴포문화 Ⅱ기층으로 구분하였다.

이어 1964년 6~7월에 이루어진 발굴은 이전에 조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6지구에 있는 굴포문화 Ⅰ기의 돌 시설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돌덩이와 돌무지의 배치 상황은 막집터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였다.

3 유적의 층위 및 출토 유물

구석기 시대 문화층이 확인된 굴포리 유적의 5지구는 지층의 전체 두께가 약 326cm에 이른다. 그리고 5지구의 동쪽 부분에 쌓인 퇴적층의 층위 단면을 보면, 구성 물질의 성질에 따라 자갈이 들어 있는 층(ㄷ-Ⅶ ~ ㄷ-Ⅵ층)과 자갈이 들어 있지 않는 층(ㄷ-V ~ ㄷ-Ⅰ층)으로 크게 구분된다. 그리고 위로부터 표토층(ㄷ-Ⅰ층, 두께 약 15㎝), 암갈색 잔모래층(ㄷ-Ⅱ층, 두께 약 40㎝), 조금 푸른 암갈색 모래질진흙층(ㄷ-Ⅲ층, 두께 약 25㎝), 산화철이 많이 포함된 진한황갈색 진흙층(ㄷ-Ⅳ층, 두께 약 6㎝), 암황색 진흙층(ㄷ-Ⅴ층, 두께 약40㎝), 모나거나 둥근 자갈이 섞인 진흙층(ㄷ-Ⅵ층, 두께 약90㎝), 모난 자갈과 진흙이 섞인 층(ㄷ-Ⅶ층, 두께 약 110㎝)으로 세분된다.

이들 지층 가운데 구석기 시대 석기가 출토된 곳은 ㄷ-Ⅵ층과 ㄷ-Ⅴ층이며, 나머지 퇴적층에서는 석기가 나오지 않았다. 발굴 보고에 나와 있는 유물은 많지 않아 ㄷ-VI층과 ㄷ-V층의 석기를 모두 합해도 20점이 되지 않는다. 석기의 종류는 찍개, 긁개, 밀개, 칼, 몸돌, 격지 등 비교적 단순하나, 형식 분류가 되지 못해 정확한 이름을 붙이지 못한 석기도 있다.

ㄷ-Ⅵ층과 ㄷ-Ⅴ층은 각각 굴포문화 Ⅰ기층과 굴포문화 Ⅱ기층으로 명명되었고, 석기의 암질과 제작 수법에 있어 서로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먼저 굴포문화 Ⅰ기층에서는 30~40㎡ 크기의 움막자리로 추정되는 돌 시설물(6지구)이 조사되었고, 차돌(석영)과 조정화강암을 돌감으로 하여 제작된 찍개, 속돌(몸돌), 격지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석기 제작에는 내리쳐깨기(모루떼기) 수법과 때려깨기(직접떼기) 수법이 적용되었고, 단면 또는 양면으로 잔손질이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굴포문화 Ⅱ기층에서는 대리석으로 만든 밀개와 각암(각혈암, hornfels)으로 만든 석기가 나왔다. 격지는 대고때리기(간접떼기) 수법에 의하여 제작되었고, 격지 날의 잔손질은 눌러뜯기(눌러떼기) 수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와 같은 굴포리 유적에서 확인된 서로 다른 구석기 시대 문화층의 석기에 대한 기술적인 분석은 유적의 연대 설정에 있어 기초 자료가 되었고, 이후 북한의 구석기학 연구의 기본 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4 유적의 시기와 연대

굴포문화 Ⅰ기와 Ⅱ기는 서로 다른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1964년 유적 보고에 따르면 층위를 달리하여 나온 굴포문화 Ⅰ기와 Ⅱ기는 석기 제작에 사용된 돌감과 손질 수법에서 서로 다른 차이를 지녔던 것으로 보았다. Ⅰ기의 돌감은 주로 석영인 반면에, Ⅱ기의 경우 각암(각혈암)이 석재로 대부분 이용되었다. I기에는 단면 손질이 우세하지만, Ⅱ기에는 양면 손질이 상당히 적용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연대는 I기층은 구석기 시대 전기(하단)의 말, Ⅱ기층은 2만 년 전후의 구석기 시대 후기(만기)에 각각 해당하는 유적으로 추정하였다.

이후 굴포리 유적의 전체 발굴 결과가 1972년 발표되었는데, 굴포문화 Ⅰ기층과 Ⅱ기층에 대한 시대와 연대가 다시 새롭게 설정되었다. 즉 석기의 형태 및 제작 기법상의 특징에 근거하여, 굴포문화 Ⅰ기층을 약 10만 년 전의 중기 구석기 시대, 굴포문화 2기층을 4만 ~ 3만 년 전의 후기 구석기 시대로 보았다.

그런데 석기의 형태와 제작 수법을 가지고 굴포문화의 시기와 연대를 설정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북한 학계의 견해는 연구 방법론적으로 여러 문제를 지니고 있다. 굴포문화 Ⅰ기층의 경우 중국 딩춘(丁村) 유적의 연대와 대응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Ⅰ기층과 정촌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의 돌감과 형태에서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또한 굴포문화 Ⅱ기의 연대를 후기 구석기 시대로 추정하는 이유로 대고때기기(간접떼기)와 눌러뜯기(눌러떼기)의 수법을 들고 있는데, 사실 굴포문화 Ⅱ기층에서 출토된 석기 가운데 이 두 가지 수법이 정확히 확인되지 않아, 석기 제작 기술의 발전 단계를 바탕으로 연대를 설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석기의 형식 분류와 제작 수법에 따른 현재 굴포리 유적의 시기와 연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며, 앞으로 유적의 위치와 퇴적층의 형성학적 접근법이 연대 설정에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5 유적의 의의

1963~1964년에 세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된 구석기 시대의 유적 및 유물을 바탕으로, 북한 학계에서는 굴포문화의 상한 연대를 10만 년 전으로 소급하였다. 그리고 한반도의 선사문화가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등을 거치며 자체 발전의 길을 명확하게 밟아온 것으로 인식하는 학술적 분위기가 굳어지게 되었다. 중기 구석기 시대인 굴포문화 Ⅰ기와 후기 구석기 시대인 굴포문화 Ⅱ기의 시기 변화에 따른 석기의 형태와 제작 수법에 대한 차이 분석은 북한의 구석기학 연구의 기본 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굴포문화로 명명한 굴포리 유적의 석기 연구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제작 수법으로 볼 때, 굴포문화 Ⅰ기층의 석기 분석에서 말한 내리쳐깨기(모루떼기) 수법을 분명하게 입증하기 위해서는 좀 더 자세한 분석 결과가 제시되어야 하며, Ⅱ기층의 경우에는 대고때리리(간접떼기)와 눌러뜯기(눌러떼기)의 기법이 실제로 적용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관찰된다. 1964년에 나온 굴포리 유적의 발굴 보고에서 굴포문화 Ⅰ기층의 석기를 중국의 정촌 문화와 비교하고 있으나, 두 유적 사이의 동질성이나 동 시대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대등한 유적으로 비교된 굴포문화 Ⅱ기층과 중국 산정동이나 연해주 지역의 구석기 시대 유적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굴포리 유적은 일제 강점기 이후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 유적이다. 따라서 굴포리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의 수량은 많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고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는 매우 크다. 굴포리 유적에서 얻은 발굴 성과는 한국에 구석기 유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석기의 제작 기법과 석기의 명칭 등에 사용된 한글식 용어는 이후 남한의 구석기학 연구에 영향을 주었다.

다시 말해 굴포리 서포항에서 발굴된 구석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한국의 선사 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다. 그동안 일제 관학자들의 잘못된 주장과 그 영향력의 그늘 속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한국 선사 시대의 구석기 문화가 뚜렷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한국 선사 문화의 상한도 구석기 시대로 올라가게 되었다. 더욱이 동북아시아의 구석기 문화 연구에서 하나의 공백 지대였던 한반도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을 발굴함으로써, 동북아시아 지역의 선사 문화를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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