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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산 유적

우리나라 중서부 지역의 신석기 문화 실체를 밝히다

미상

궁산 유적 대표 이미지

궁산 유적 전경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국립문화재연구소)

1 개요

궁산 유적은 남포특별시(舊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에 위치한다. 발굴 당시에는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궁산리에 속해 있었다. 유적은 평양의 서남쪽 광양만에 인접한 궁산 부락에 위치한 자그마한 구릉 지역인 소궁산의 동남 쪽 경사면에 형성되었다. 유적 일대는 발굴 당시 해안선에서 직선거리 약 2㎞ 떨어진 위치였으나, 유적 형성 당시에는 해안이나 섬이었을 것이다.

궁산 유적은 1949년 봄에 간단한 시굴 조사로 조개더미 유적으로 확인하였고, 1950년 4월 13일에서 5월 30일까지 48일간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는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의 고고학부에서 진행하였고, 중앙역사박물관 학술부원들도 참여하였다. 유물이 조사된 범위는 약 5,000㎡에 걸쳐 있는데, 그중 발굴 면적은 총 150㎡에 달한다. 총 6개의 지점에서 50㎡ 구덩이 하나와 10∼30㎡ 구덩이 5개를 발굴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신석기 시대의 집자리 5기와 움구덩 3기가 확인되었다.

2 궁산 유적의 발굴과 출토 유물

궁산 유적은 조개더미 유적으로, 유적의 층위는 표토층인 부식토층이 20㎝ 두께로 유적 전반에 걸쳐 덮여 있고, 그 아래 30㎝ 미만의 조개더미층이 형성되어 있다. 발굴 당시 동쪽 골짜기는 이미 흙을 파내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는데, 그 단면에 조개더미층이 노출되어 있어, 이곳부터 발굴이 진행되었다.

궁산 조개더미 유적은 총 6개 지점(1호~6호 구덩이)에서 일정한 범위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1호 발굴 조사 구덩이는 1949년 조사되었는데, 표토층 아래 60∼80㎝ 두께의 조개더미층이 동서 4m에 걸쳐 노출되었다. 조개더미층은 굴, 백합, 새합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조개더미층이 끝난 지점에서 토기를 거꾸로 박아 놓은 시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시설은 대체로 집자리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유물은 빗살무늬토기편과 갈돌, 그물추, 가락바퀴, 원반상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2호 발굴조사 구덩이는 1호 발굴 조사 구덩이의 동쪽으로 6m 떨어진 지점에서 노출된 단면에 설치하였는데, 표토층 밑에 약 65㎝의 조개류와 흙이 섞인 층이 확인되었다. 그 아래에는 15∼20㎝의 재가 섞인 회색 점토층이 확인되었고, 그 아래는 풍화 암반층이었다. 여기서는 바닥이 상대적으로 편평하고 양 측면이 급한 경사로 이루어진 움구덩이 조사되었다. 내부에서는 빗살무늬토기편과 갈돌, 돌도끼, 뼈바늘 등 총 9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3호 발굴 조사 구덩이는 1호 발굴조사 구덩이의 서북쪽으로 25m 떨어진 지점으로, 표토층 아래 백합과 굴이 대부분인 조개더미층(100㎝)이 확인되었고, 그 아래는 10㎝의 회색 점토층, 암반 풍화면이 차례로 노출되었다. 이 구덩이에서는 지름 5.6∼5.8m의 원형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집자리에서는 중앙에서 화덕자리와 토기를 거꾸로 박아놓은 시설이 확인되었고, 주위에는 원형으로 배치된 기둥 구멍이 안쪽으로 경사지게 설치되어 있었다. 집자리의 화덕자리는 78×90㎝의 타원형으로 주위에 갈판 조각을 둘러놓은 형태이다. 화덕자리 옆의 토기를 거꾸로 박아놓은 시설 내부에서는 30㎝ 두께의 재층이 있고, 그 아래 5㎝ 두께의 굳은 녹색 점토층이 퇴적되어 있었다. 출토 유물로는 빗살무늬토편과 석촉, 석창, 찔개살, 돌도끼, 돌자귀, 그물추, 갈돌, 숫돌 등이 있다. 뼈 도구로는 사슴뿔로 만든 뒤지개가 많았고, 송곳, 예쇄, 뼈 바늘과 삿바늘 등이 있다. 뼈 바늘의 경우는 베실이 그대로 달려있는 상태로 출토되었다. 장식품으로 관옥 1점이 확인되었다. 이외에 사슴, 멧돼지, 개, 물소 뼈 등이 출토되었다. 한국전쟁 때 도면 전부와 야장 일부를 분실하여 궁산 유적 보고서에 도면이 실려 있지 않다.

4호 발굴 조사 구덩이는 3호 발굴 조사 구덩이의 서남쪽으로 60m 떨어진 지점에 해당되며, 표토층 아래 약 1m의 두터운 조개더미층이 노출되었다. 조개더미층은 동서 4m, 남북 5m의 범위 안에 형성되어 있었다. 조개더미층 내에서는 점선물결무늬 빗살무늬토기편이 많이 출토되었고, 소형의 흙구슬, 가락바퀴도 각각 20점, 10점이 조사되었다. 이외에 송곳, 석창, 그물추, 도끼, 갈돌 등이 출토되었다.

5호 발굴 조사 구덩이는 3호 발굴 조사 구덩이의 서북쪽으로 5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표토층 아래 약 110㎝ 두께의 조개더미층이 있고, 그 아래는 풍화 암반층이다. 조개더미층은 중간의 얇은 점토층을 경계로 상하 양층으로 구분되는데, 대합조개가 중심인 50㎝ 두께의 상층과, 굴이 중심인 60㎝ 두께의 하층으로 구분된다. 상층 아래에는 3㎝ 정도의 얇은 점토층이 있고, 여기서 점토로 둘러싸인 방형의 화덕자리가 설치된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화덕자리는 동서 75㎝, 남북 80㎝, 깊이 13㎝ 크기이며, 내부에 재가 퇴적되어 있었다. 화덕자리 동편에는 주먹 크기의 자갈돌이 100여 개가 깔려 있었고, 주변에서는 큰 기둥 구멍도 1개가 확인되었다. 하층의 아래는 5㎝ 두께의 녹색 점토층이 깔려 있었는데, 여기서 화덕자리와 기둥 구멍이 확인된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출토된 유물 중에서 상층 상부에서 작은 옥도끼가 한 점 나와 주목된다. 또한 석촉이 50여 점이나 출토되었다. 이 중 반제품 22점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5호 발굴 조사 구덩이 상층이 동북쪽으로 계속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굴 조사 범위를 확장해 조사한 결과, 이곳의 조개더미층 아래의 점토층에서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집자리의 중앙에서 화덕자리가 확인되었고, 화덕자리 곁에 토기를 거꾸로 박은 시설이 조사되었다. 화덕자리는 지름 85㎝, 깊이 20㎝이며, 벽돌만한 크기의 자연석을 둘러놓은 돌두름식으로 2개가 확인되었다. 토기를 거꾸로 박은 시설은 위에 넓적한 돌이 덮인 채 조사되었으며, 내부에서는 조개 부스러기와 뼈도 확인되었다. 집자리 바닥에는 유기물이 썩은 듯한 녹색 점토층이 5㎝ 두께로 깔려 있었다. 이외에도 80여 개의 많은 기둥 구멍이 확인되었다. 일부 기둥 구멍의 바닥에서는 자갈돌 2∼3개가 깔려 있어, 원시적인 주춧돌일 가능성이 있다.

6호 발굴 조사 구덩이는 1호 발굴 조사 구덩이의 서남쪽 평탄지에 위치하며, 발굴 지점 중 가장 남쪽에 해당된다. 표토층 아래에 약 50㎝ 두께의 조개와 흙이 섞인 층이 확인되었으며,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집자리에서는 점토로 둘러진 화덕자리가 확인되었고, 주위에서 14개의 크고 작은 기둥 구멍이 조사되었다. 화덕자리는 70×100㎝의 타원형이며, 깊이 35㎝이다. 화덕자리 주위에는 불에 구워진 점토가 5∼20㎝ 너비로 둘려져 있었다. 출토된 유물 중에서 멧돼지 송곳니로 만든 낫, 뼈로 만든 무늬 새기개, 관옥과 유사한 뼈 구슬, 물소 뿔 등이 주목된다.

3 궁산 유적의 발굴 의의

궁산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한국전쟁 중에 분실되어, 전체의 30%만이 남아 있다. 빗살무늬토기의 문양은 토기의 부위에 따라 무늬를 다르게 새긴 빗살무늬토기가 많다. 그 입술 부분에 점이나 짧은 빗금의 찍거나 누른 무늬를 가로 방향으로 연속해서 여러 줄의 넣은 무늬(점열문)를 배치하고, 몸통 부분에는 세로 방향의 물고기 뼈 무늬(종주어골문)가 새겨져 있으며, 그 사이에 가로 방향의 물고기 뼈 무늬가(횡주어골문) 새겨진 형태의 토기가 가장 많다. 바닥 부분에는 긴 사선무늬를 새긴 빗살무늬토기나 무늬를 새기지 않은 토기도 있다. 이외에 봉산 지탑리 유적의 집자리 퇴적층에서도 조사된 입술 부분과 몸통 사이의 구획 내에 격자문을 채워 넣은 빗살무늬토기와 점선물결무늬로 몸통 부분을 장식한 토기 등이 나왔다. 이 두 종류의 빗살무늬토기는 주로 1·2·4호 발굴 조사 구덩이에서 출토되어, 3·5·6호 발굴 조사 구덩이와 유물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궁산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 뼈는 중국과학원 고척추동물연구실에서 감정하였다. 발굴 유물 중 절반만이 남았지만, 사슴, 영양, 멧돼지의 수량이 가장 많았고, 이외에 물소, 개, 삵, 노루 등이 확인되었다. 사슴이나 영양, 멧돼지의 아래턱 뼈는 남아 있는 것만 해도 100여 점에 이른다. 어류는 상어, 대구, 경골어류 등이 있고, 조개류는 굴, 백합, 섭, 동죽 등이 있다.

궁산 유적 출토 유물은 현재 북한 지역의 신석기 문화 중 궁산 문화의 상대 편년(1~4기)에서는 궁산 1기와 3기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5·6호 발굴 조사 구덩이와 같이 집자리가 확인된 지점에서는 주로 입술 부분에 점열문, 몸통 부분에 세로 방향의 물고기 뼈 무늬가 새겨진 빗살무늬토기 위주로 나왔다. 반면에 1·2·4호 발굴 조사 구덩이에서는 집자리도 확인되지 않았고, 토기에서도 입술 부분과 몸통 사이의 구획 내에 격자문을 채워 넣은 빗살무늬토기와 점선물결무늬로 몸통 부분을 장식한 토기 등이 주로 조사되어 차이가 난다. 이 중 1·2·4호 발굴 조사 구덩이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토기들을 궁산 3기로 편년하는 것이 현재 북한의 공식 편년관이다. 그러나 남한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견이 존재하며, 이러한 토기를 궁산 1기와 2기 사이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어쨌든 궁산 유적은 중서부 지역의 신석기 시대 이른 시기에서 중기에 해당하는 신석기 시대 편년을 구분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궁산 유적은 북한에서 신석기 시대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최초로 ‘궁산문화’라는 명칭을 부여한 유적으로, 학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1949∼50년이라는 매우 이른 시기에 중서부 지역의 선사문화를 파악하기 위해 학술 조사한 유적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크다. 게다가 유구나 유물 면에서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한 대부분의 조개더미 유적이 일반적인 집자리를 공반하지 않고 인공 및 자연 유물도 매우 빈약한 것에 비해, 궁산 유적에서는 다섯 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조개더미층 내에서도 다량의 포유류 및 어류 뼈가 조사되어, 남해안 지역 패총과 유사하여 서해안 지역에서는 매우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궁산 유적 발굴 이후에 북한에서는 이러한 성격의 유적들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고자 하는 계획 속에서 지탑리, 평양 금탄리 유적 등이 조사되었다. 이들 유적에 대한 조사 결과 북한의 궁산 문화 편년관이 확립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궁산 유적의 발굴이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문화 연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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