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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소소리 유적

당진 소소리 유적과 서해안 교역

미상

당진 소소리 유적 대표 이미지

당진 소소리 출토 일괄유물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우리나라에서 조석간만의 차가 가장 큰 아산만. 이곳 인근의 당진군 합덕면 소소리에서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발견되었다. 정식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장수 남양리, 부여 합송리 등지에서와 같이 잔무늬거울, 청동검 등과 함께 철로 만든 도끼와 끌이 출토된 것이다.

소소리 유적에서 확인된 유물은 총 13점으로, 세형동검, 칼끝장식, 꺾창, 잔무늬거울 등 마한계 청동기와 함께 도끼와 끌과 같은 전국 연나라 계통의 철기 그리고 중국 남방계 유리구슬로 구성되었다.

마한계에 속하는 유물들은 당진을 중심으로 한 아산만 일원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잔무늬거울과 같이 세밀한 문양을 가진 청동기의 제작은 한반도 서남부-아산만·금강·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제작집단과 관련이 깊다. 외래계에 속하는 철기와 유리는 각각 다른 출발지에서 보내졌다. 철기는 전국시대 연(燕)의 수도인 연하도(燕下都)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유리는 그보다는 훨씬 남쪽의 전국시대 초(楚) 혹은 그 남쪽 지역에서 지를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둘의 이동경로는 어떻게 될까?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철기와 유리의 출토 상황을 살펴보자.

2 한반도의 철기

한반도에서 처음 철기가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4~3세기 경이다. 이때는 아직 자체적으로 철기를 제작할 기술이 없어서 외부, 즉 전국시대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그런 모습은 당진 소소리 유적에서 엿볼 수 있는데, 유적에서 주로 철제 도끼나 끌과 같은 공구가 발견되며, 칼이나 화살촉 같은 무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첨단 기술로 제작된 철제 무기를 중국에서 통제하였기 때문이리라.

한반도에서 철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위만(衛滿)에게 왕위를 뺏긴 고조선의 준왕이 남하하는 기원전 2세기 경이다. 뒤이어 사천 늑도 유적 등지에서 발견되는 제철 관련 유구의 등장과 손칼로 대표되는 철기 사용의 일반화를 통해 한반도 남부에서도 철기 제작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울산 달천 광산에서는 일본 야요이시대의 토기 등이 발견되어 기원 전후한 시기 이전부터 이곳에서 철이 채광되고, 일본 등지로 수출되었음을 짐작게 한다. 이는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 등에 기록된 바와 같이 철을 매개로 하는 동아시아 교역권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철기가 걸어온 육로

당진 소소리 유적에서는 전국 연나라의 철기가 출토되었다.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 지금의 중국 북경(北京) 근처에는 연나라가 있었다. 전국시대 가장 동쪽에 있는 나라였다. 연나라의 수도는 연하도로 이곳에서는 거대한 성벽과 함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전국시대 연나라는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드는 주조철기의 강국이었으며, 산동(山東)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던 전국 제(齊)나라는 쇠를 불에 달구어 두드려 만드는 단조철기의 강국이었다. 그리고 이곳 당진 소소리에서 출토된 철기들은 주조철기로 전국시대 연나라의 철기이다. 당진 소소리를 비롯하여 부여 합송리, 장수 남양리, 완주 신풍 등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철기들은 모두 도끼, 끌, 새기개, 낫 등 농공구에 한정되는데 이와 같은 철기들은 위원 용연동, 영변 세죽리 유적 등 한반도 북부에서 전국시대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과 함께 출토된다.

연나라의 철기가 고조선에 유입된 것은 연나라 소왕(昭王, 재위: 기원전 311~279년) 시절 장군 진개(秦蓋)가 고조선에게서 서방 이천리의 땅을 빼앗은 기원전 3세기 전엽의 언저리로 생각된다. 결국 이 시기를 기준으로 철기가 한반도 남부의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이것을 한반도 남부에서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준왕(準王)이 남하하는 기원전 194년 언저리로 생각된다.

명도전과 함께 전국 연의 철기가 출토되는 사례는 중국 동북지역이나 한반도 북부에서는 꽤 많이 발견된다. 출토된 지역을 연결하면 연하도-능원(凌源)-조양(朝陽)-금주(錦州)-본계(本溪)-단동(丹東)-한반도(韓半島)로 이어지는 대략의 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이와 달리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되는 전국계 철기는 명도전과 함께 발견되는 사례가 없다. 또한 철기와 동반하는 유물들은 주로 세형동검, 잔무늬거울 등이며, 특이하게 한반도 서남부에서는 유리와 함께 발견되는 사례가 당진 소소리, 부여 합송리, 완주 갈동 등지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한반도 북부에서는 유리와 함께 출토되는 사례가 아직 확인된 바 없다.

4 유리가 전해진 해로

소소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은 납-바륨 유리로 생각된다. 유리를 만들 때는 녹는점을 낮추기 위해 납, 바륨, 포타쉬 등과 같은 성분을 넣는데, 이러한 첨가제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보통 납 유리군, 포타쉬 유리군, 소다 유리군, 알칼리 혼합 유리군 등으로 구분되며, 납-바륨 유리는 서양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아시아권 유리의 특징이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중국 동남부의 호남성(湖南省), 호북성(湖北省) 일대에 자리잡은 초(楚)나라와 중원에서 제작되었는데, 당진 소소리를 비롯하여 부여 합송리, 완주 갈동·신풍 등지에서 출토된 초기의 유리가 거의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한편 그보다 남쪽에 위치한 전국 월(越)나라에서는 칼륨 함량이 높은 포타쉬 유리가 주로 제작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검에 장식되어 있는 유리가 있다. 이후 포타쉬 유리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제작되며 기원전 1세기 이후, 한반도 서남부의 연천 학곡리, 평택 마무리 등지에서도 확인된다.

중국 동남부 계통의 납-바륨 유리에서 중국 남부-동남아 계통의 포타쉬 유리로의 변화는 기원전 111년 중국 한나라의 침공으로 남월국이 멸망하고 현재의 북베트남과 중국 남서부 일대에 영남구군(嶺南九郡)이 설치되면서 한나라와 베트남 간의 물적 교류가 증가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나라에 동남아시아의 문물이 급속도로 전파되고, 그러한 영향이 한반도 남부에까지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5 대동강유역에서 한반도 서남부로

육로를 통해 들어온 철기와 해로를 타고 들어온 유리가 만난 곳은 대동강 유역이다. 이곳에서 다시 한반도 서남부로 전해지던 주요한 교통로는 육로였을까 해로였을까? 이와 관련해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원전 194년 즈음에 위만에게 조선을 빼앗기고 한으로 옮긴 준왕에 대한 기록이다. 후한대(後漢代) 왕부(王符)가 지은 『잠부론(潛夫論)』과 280년대에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준왕이 바다를 건너 한지로 옮겨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급박한 상황이었고, 좀 더 빨리, 좀 더 멀리 가기 위해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나아가 기원전 2세기에 한반도 서북부와 한반도 서남부를 잇는 해상 교역로가 존재하였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전국계 철기와 유리의 분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국계 철기는 그 분포 범위가 장수 남양리와 같이 내륙 깊숙한 곳으로도 유입되고 있다. 이에 반해 유리는 당진 소소리의 아산만 문화권, 공주 수촌리의 금강 문화권, 전주 원장동, 완주 신풍·갈동의 만경강 문화권, 함평 초포리의 영산강 문화권 등 큰 강이나 바닷가에 집중된다. 결국 물자나 문화의 이동이 바다라는 대동맥에서 강이라는 모세혈관을 타고 내륙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또한 유리는 전국계 철기와 달리 내륙 깊숙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이는 기존의 벽옥제 관옥이라는 대체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 예로 잔무늬거울이 출토된 청주 오송 유적의 경우 출토되는 구슬은 모두 유리가 아닌 광물제이다. 이러한 양상은 유리가 출토되는 지역에서도 동일한 양상이어서 영산강가에 위치한 화순 백암리 유적의 경우도 광물제의 관옥을 부장하였다. 결국 선진지일수록 더 귀한 유리구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6 해상교역의 실태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인데 해상 교류가 가장 빈번한 곳은 한반도 남부와 일본 규슈(九州)이다. 그 이유는 거리가 가깝고 양 지역 사이에 쓰시마(對馬島), 이키시마(壱岐島) 등의 섬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해는 중국과의 해상 교류의 중심지로 산동반도(山東半島)와 대련(大連)을 가로지르면 한반도로 아주 쉽게 이동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부터 많은 문화교류가 있었고 그런 과정 속에서 유리라는 새로운 소재가 멀리서부터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아산만 일대를 주름잡던 당진 소소리의 지배자는 자신들의 청동기·석기·토기 문화를 기반으로 중국 동북부 연나라의 철기, 중국 남부 초나라의 유리와 같은 신문물을 해상교역을 통해 받아들여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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