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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괴정동 유적

대전 괴정동 유적과 이형동기

미상

대전 괴정동 유적 대표 이미지

대전 괴정동 무덤 출토 이형동기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한반도에서 가장 잘 만든 청동기를 꼽자면 역시 잔무늬거울이다. 그리고 가장 특이한 형태의 청동기를 들자면 바로 방패모양 청동기, 대쪽모양 청동기, 나팔모양 청동기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청동기는 당시에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기술력을 보여준다. 청동기에 달린 고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짚풀로 꼬아서 만든 것처럼 정교한 것에 놀라게 된다. 이런 기술만큼이나 궁금한 것은 바로 무엇 때문에 만들어서 어떻게 썼는가이다.

1967년 대전 괴정동의 산기슭에서 밭을 갈던 중에 우연히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청동검을 비롯해 거친무늬 거울, 대쪽모양 청동기, 방패모양 청동기 등 이전에는 보지 못한 새로운 청동기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청동기시대 엄청난 크기의 돌로 만든 고인돌은 정작 내부 부장품이 토기나 간돌칼 정도로 부실하지만, 이런 널무덤의 경우 비록 외형은 작을지언정 내부에서는 다양한 청동기가 출토되어 개인에게 정치권력이 집중된 것을 보여준다.

2 괴정동 무덤에서 출토된 것들

아쉽게도 괴정동 무덤은 정식조사에 의해 발굴된 것은 아니다. 비록 전체를 조사하진 못했지만 파괴된 일부라도 조사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었다. 조사된 내용과 처음 발견한 이의 기억을 토대로 복원해보면 무덤은 나무널 주위에 돌을 쌓아 올린 형태의 돌무지널무덤이다. 물론 사방을 두른 돌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조사를 통해 바닥에서 나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을 근거로 나무널을 넣고 주위에 깬돌을 채워넣은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남아 있는 무덤의 깊이도 거의 3m 정도로 깊고,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폭을 좁게 하여 옆의 벽면이 무너지지 않게 하면서 더 깊이 팔 수 있도록 했다.

나무널의 남쪽벽 안에는 곱은옥이 두 점 나왔는데, 아마도 귀걸이로 차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남쪽에 머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중앙에서 청동검과 돌화살촉이 나와서 허리춤에 칼을 차고 화살이 담긴 화살통과 활을 가슴에 올려 놓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발치 아래에는 대쪽모양 청동기, 방패모양 청동기, 청동방울, 거친무늬 거울, 둥근뚜껑모양 청동기 등이 있었는데,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청동기들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어디에 쓰는 것인지 몰라 ‘이형동기(異形銅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가장 북쪽 끝에는 아마도 음식을 담았던 것으로 생각되는 검은간토기와 덧띠토기가 놓여져 있었다.

3 특이한 모양의 청동기

대쪽모양 청동기, 방패모양 청동기, 둥근뚜껑모양 청동기. 이름만 들어서는 잘 떠오르지 않는 것들이다. 여기에 예산 동서리에서 출토된 나팔모양 청동기와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어깨뼈모양 청동기 등을 합쳐서 특이한 모양의 청동기라는 의미의 ‘이형동기’라고 부른다. 이런 청동기들은 대전 괴정동에서 처음 확인된 후,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등지에서도 출토되어 서남한을 중심으로 한 마한의 특징적인 유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유사한 것들이 중국 심양(瀋陽) 정가와자(鄭家窪子) 6512호 무덤에서 출토된 사례가 있어서 고조선과 연결되는 중요한 단서로도 생각된다.

이형동기의 용도는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의 비교를 통해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정가와자 6512호 무덤의 사례로 보아 나팔모양 청동기는 말머리를 장식하는 도구이고, 방패모양 청동기와 어깨뼈모양 청동기는 도끼와 손칼집의 장식으로 생각된다. 둥근뚜껑모양 청동기는 예산 동서리, 부여 합송리 유적 등지에서도 출토된 것으로 뒷면에 어딘가에 걸 수 있도록 고리가 있는데, 이 고리에 끈을 엮어 매달아 두드려 소리를 내는 징이나 꽹과리와 같은 악기로 추정된다. 대쪽모양 청동기는 예산 동서리, 아산 남성리, 군산 선제리에서도 출토되었는데, 모두 3점이 짝을 이루어 출토된 것이 특징이다. 이것들은 중국 내몽고(內蒙古) 소흑석구(小黑石溝)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 비교를 통해 말 머리를 장식하던 마면(馬面)으로 추정된다. 다만 중국 북방에서는 마구로 사용되었겠지만 한반도 남부에서도 마구로 사용되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심의 여지가 있다.

또한 이런 청동기에는 다양한 문양이 있는데, 주로 원이나 번개무늬 등 다양한 기하학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 외에 아산 남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대쪽모양 청동기에는 사슴과 사람의 손바닥이 그려져 있고,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어깨뼈모양 청동기에는 사슴과 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어서 주목된다. 이런 그림들은 흔히 주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기에 이 청동기들이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4 이형동기에 대한 연구

사실 특이한 모양의 청동기라는 뜻을 가진 ‘이형동기’는 소뿔모양 청동기와 같이 사용법을 잘 모르는 청동기를 지칭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지금도 일부 사용법을 모르는 청동기에 대해서 이형동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일반적으로 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이형동기는 대쪽모양 청동기, 방패모양 청동기, 나팔모양 청동기 등이 제사와 같은 의례에 사용되었음이 밝혀지면서 ‘의례에 사용되는 청동기’라는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의례에 사용되었다는 근거 중에는 청동기에 그려진 사슴, 사람 손 등의 문양이 가진 상징성을 근거로 무당과 같은 샤먼이 사용하던 물건이었다라는 해석이 더해지면서부터이다.

이들이 단순한 의례용품이 아니라 국가적인 제사에 사용하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중국 동북지방의 출토 사례와 관련된다. 요컨대 중국 심양 정가와자 6512호 무덤은 고조선 지배자의 무덤인데, 여기에서 출토되는 거친무늬거울, 나팔모양 청동기, 둥근뚜껑모양 청동기 등은 중국 은허(殷墟)에서 발견된 왕권을 상징하는 9개의 솥인 구정(九鼎)과 같이 고조선에서 국가 제사에 사용되는 도구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고조선의 제사용구가 갑자기 한반도 북부를 건너 뛰어 한반도 서남부의 대전, 예산, 아산 등지에서 확인된 것이다. 이런 제사용구는 한반도 남부에서 방울과 결합되어 가지방울과 같은 것으로 현지화된다. 이런 방울은 한반도 남부, 특히 마한의 독특한 청동예기로 꽃피워진다.

5 무늬가 가진 상징성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형동기에 새겨진 사람의 손이나, 사슴, 호랑이 등의 무늬는 상징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아산 남성리에서 발견된 대쪽모양 청동기에는 사람의 손이 새겨져 있다. 사람의 손은 3만 년 전 프랑스 남부 쇼베-퐁다르크 동굴 벽에도 그려져 있듯이 인류가 그린 최초의 대상 가운데 하나로서 세계 곳곳의 바위그림에도 사람의 신체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신체를 나타내는 것은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대쪽모양 청동기에 그려진 손은 샤먼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어깨뼈모양 청동기에는 사슴의 몸에 창이 박혀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는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에 그려진 작살에 찔린 고래와 같이 사냥의 성공과 같은 것을 기원한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그림이 새겨진 유물은 대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농경문 청동기이다.

농경문 청동기는 괴정동과 남성리에서 출토된 방패모양 청동기와 같은 것으로 그 앞면과 뒷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앞면에는 새가 앉은 솟대가 그러져 있고, 뒷면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솟대는 마을의 어귀에 세워놓는 것으로, 시베리아, 몽골, 만주, 일본 등지에 퍼져 있는데, 한반도의 솟대가 가장 잘 남아 있다. 어느 문화에서나 나무는 중요한 존재이다. 하늘을 향하며 땅에 서있고, 뿌리는 지하에 있어 하늘-땅-지하 세계를 연결하기에, 땅 위의 인간과 하늘의 신이 소통하는 통로로 여겨졌다. 그래서 당산나무와 같은 마을의 수호신이 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솟대 위에 올려져 있는 새는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철새, 그 가운데 오리인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늘을 나는 능력을 가졌으며, 계절의 흐름을 알려주고, 하늘과 땅, 물에서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새가 영혼을 하늘로 데리고 간다는 믿음과 우리 곁에 있다가 계절이 바뀌면 저 멀리 하늘나라로 간다는 등 다양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가야의 오리모양토기, 신라 금관의 새깃털 형태의 장식 등 새를 모티브로 한 많은 유물들도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일 것이다.

한편 뒷면에는 벌거벗은 농부가 머리에는 새의 깃털로 장식을 하고 따비로 밭을 갈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기록에 보이는 한반도 북부에서 이른 봄에 농부가 나체로 밭을 갈고 풍요를 비는 ‘입춘나경(立春裸耕)’ 풍속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하늘의 신은 남성인데 비해 땅의 신은 보통 여성이므로, 음과 양의 조화를 위해 남성이 옷을 벗고 땅을 일궈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방패모양 청동기를 비롯한 ‘이형동기’에 새겨져 있는 비일상적인 문양들은 이러한 청동기들이 단순한 실생활에 사용되는 도구가 아니라 신을 부르는 제사에서 사용된 제기로 생각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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