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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 범의구석 유적

북한 고고학에 과학적 연구 방법이 처음으로 도입된 유적

미상

무산 범의구석 유적 대표 이미지

① 2호 집자리 전경(신석기) ② 곰배괭이(신석기) ③ 기장이 나온 모습(청동기) ④ 돼지조각품(청동기) ⑤ 점 치는 뼈(청동기) ⑥ 독(초기철기) ⑦ 쇠낚시(초기철기)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 1990, (1)~(2)

1 유적의 위치와 발굴조사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호곡동의 범의구석에 위치하며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서 1959년부터 1961년까지 5차례 발굴조사 하였다.

유적은 두만강과 성천수가 서로 만나는 곳에 위치하며 “말기”라고 부르는 구릉의 제3단구에서부터 서쪽의 두만강가에 이르기까지 아주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한다. 유적의 분포 범위가 넓고 문화층이 층위를 이루고 있는데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50여 기(基)의 집터와 많은 유물이 찾아졌다. 이들 집터는 집의 구조와 중복 관계, 출토 유물에 따라 6개 시기로 구분된다.

2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소박한 보금자리

제1기에 해당하는 신석기시대 집터는 10기(1~3, 9, 12ㄱ·ㄴ, 23~25, 41호)이다. 이들 집터는 거의 2~3기씩 집중하여 분포하며 서로 겹쳐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후대의 청동기시대 집터와는 중복된 것으로 밝혀졌다.

집터의 긴 방향은 동서쪽이고 평면은 네모꼴이 많으며 거의가 길이 3.5~4.5m, 움 깊이 0.5~1m로 작은 편에 속한다. 바닥은 맨바닥을 그대로 쓴 것이 많지만 진흙으로 다짐을 한 것도 있다. 화덕은 주로 집터의 가운데에 위치하는데 바닥을 타원형으로 조금 판 다음 그 가장자리에 강돌을 둘러놓았다. 23호 집터의 화덕은 갈돌로 사용하던 것 2점을 포함하여 강돌을 둘러 놓았는데 평면이 5각형이라 좀 특이한 모습이다.

기둥 구멍은 일정한 간격의 4열 배치가 기본이고 벽 쪽에서 작은 구멍이 촘촘하게 찾아지고 있어 벽체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집의 상부 구조는 맞배지붕의 이중 도리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석기시대 여러 집터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에 의하여 파괴가 되었음에도 상당히 다양한 여러 유물들이 조사되었다.

석기는 땅을 파는데 사용한 곰배괭이를 비롯하여 갈돌, 창, 화살촉, 도끼, 톱, 그물추 등 주로 생활에 쓴 것들이다. 곰배괭이는 1호 집터에서 7점이 찾아졌으며 집터마다 1~2점씩 조사되어 당시 중요한 쓰임새를 지녔던 연모로 보인다.

흑요석은 상당히 많은 1,000여 점이 발굴되었다. 흑요석은 사슴뿔이나 짐승 뼈를 이용하여 눌러떼기 수법으로 길쭉하게 버들잎 모양 격지를 떼어내었으며 남겨진 몸돌은 피라미드 모양이었다. 이러한 격지는 나무나 뼈에 끼워 연모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주로 물고기 잡이에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또한 몸돌은 돌창이나 화살촉, 톱 등의 돌감으로도 쓰였다.

뼈를 이용하여 만든 연모는 송곳과 바늘, 화살촉 등이 있다. 뼈바늘 가운데 1호에서 찾아진 것은 귀가 1㎜ 정도여서 당시에 아주 가는 실을 가지고 바느질을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멧돼지 이빨로 만든 화살촉도 찾아졌고 새 뼈로 만든 치레걸이인 대롱구슬도 발굴되었다.

토기는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진 것과 민무늬 토기로 크게 나누어지며, 민무늬 토기는 겉면을 매끈하게 간 것과 거친 것으로 구분된다. 종류는 단지, 사발, 보시기, 잔, 굽 있는 잔(굽 손잡이 토기), 화분형 토기 등이 있다. 토기에 베풀어진 무늬는 점줄무늬, 빗금무늬, 번개무늬, 물고기 등뼈무늬, 물결무늬 등 다양하다. 화분형 토기 가운데에는 아가리 쪽에 구멍무늬가, 그 아래쪽에 빗금무늬를 베푼 것도 있다.

이처럼 범의구석 유적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토기는 퇴화된 빗살무늬 토기, 굽 있는 잔, 구멍무늬가 있는 민무늬 토기 등이 나와 독특한 면을 보이고 있으며 두만강 유역의 신석기시대 후기인 서기전 5,000년쯤의 문화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3 복합사회로 가는 길목의 청동기시대

집터의 중복 관계와 유물 모듬으로 볼 때 제2~4기는 청동기시대에 해당한다.

1) 제2기 문화층
제2기에는 15, 20, 35, 40호집터가 해당한다. 이 시기의 집터는 긴 방향이 대체로 남북쪽이며 움이 깊은 편이다. 화덕자리는 한 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고 기둥 구멍은 4줄로 배치된 모습이다.

15호 집터는 화재 주거지인데 서남쪽과 동북쪽에 나무판자가 탄 숯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집터 바닥에 나무판자를 깔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화덕자리 옆의 큰 독 안에는 탄화된 기장과 수수가 들어 있어 농경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 문화층의 여러 집터에서는 점판암으로 만든 창끝과 화살촉, 곰배괭이, 돌칼, 돌도끼, 반달돌칼, 낫 그리고 흑요석을 돌감으로 이용한 여러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뼈로 만든 연모는 송곳, 낚시, 바늘이 있으며 40호에서 조사된 비늘갑옷[札甲] 조각은 짐승 뼈를 얇게 갈고 구멍을 뚫어 만든 것으로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토기는 붉은 간토기와 민무늬 토기가 모든 집터에서 발굴되었다. 민무늬 토기는 바탕흙에 모래가 많고 겉면이 거칠다. 대부분 아가리가 바깥으로 바라졌는데 납작밑의 독, 화분형 단지가 있다. 붉은 간토기는 바탕흙이 부드럽고 겉면에 붉은 칠이 되어 윤기가 난다. 주로 아가리가 넓은 항아리, 단지, 원통형의 잔이 있다. 흙으로 만든 가락바퀴는 선과 점이 새겨져 있으며, 20호에서는 양 끝에 구멍이 뚫린 타원형의 흙 제품이 출토되었다.

2) 제3기 문화층
4, 19, 30~32호 집터가 제3기 문화층에 해당하며 반움집이다. 이 문화층의 모든 집터에서는 대표적으로 갈색 간토기가 조사되었다. 집터의 긴 방향은 앞 시기와 달리 동서쪽이며, 기둥 구멍 안에 주춧돌이 있어 집 구조가 발달하였던 것 같다.

이 문화층의 집터에서는 화살촉, 돌도끼, 대패날, 갈돌, 곰배괭이 등의 석기가 조사되었다. 그리고 짐승 뼈로 만든 송곳, 바늘이 발굴되었다. 토기는 모두 갈색 간토기만 출토되었는데 아가리가 바라진 독, 꼭지 손잡이 달린 보시기, 원통형의 단지 등이다. 이밖에 19호에서는 연옥 고리와 녹색 비취로 만든 단추 등 꾸미개가 찾아져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아름다움의 세계를 생각해 보게 한다.

3) 제4기 문화층
제4기에는 8, 10, 11, 13, 14, 16, 33, 34, 45, 50호 집터가 있다. 집터의 수가 증가하고 다른 시기보다 집터 사이의 중복 관계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이 시기가 오래 지속되었던 것 같다.

집터는 거의가 긴 네모꼴이면서 긴 방향이 남북쪽이다. 바닥에 3~4줄의 주춧돌이 놓여져 있고 연모는 뗀석기의 비중이 줄어들고 간석기가 대부분이다.

8호 집터의 벽 쪽에는 너비 40㎝ 되는 봇나무 껍질 꿰맨 것이 있었고, 서쪽 바닥에는 길이 150㎝, 너비 40~50㎝ 되는 불탄 나무판자가 있었다.

이 문화층에서 찾아진 석기는 납작하고 길쭉한 버들잎 모양의 돌창, 흑요석과 편암으로 만든 화살촉과 찌르개살, 빗날 돌도끼[斜刃石斧], 대패날, 반달돌칼 등이 있다. 뼈연모는 송곳, 숟가락, 바늘 등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짐승의 어깨뼈를 불로 지진 점치는 뼈[卜骨]가 8호 집터에서 발굴되었다.

토기는 검은 간토기와 갈색 간토기가 있다. 검은 간토기는 바탕흙이 부드럽고 안팎이 다 검은색이며 겉면을 매끈하게 갈았다. 독, 단지, 항아리, 보시기 굽접시, 잔 등이 있으며 몸통에 단추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는 단지가 특징적이다. 8호와 45호 집터에서는 높이가 80㎝쯤 되는 큰 독이 여럿 출토되어 당시 생활에서 저장의 기능이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시루가 나타난 것은 이 시기에 먹거리를 조리한 방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밖에도 8호 집터에서는 흙으로 만든 사람과 돼지의 입을 매우 사실적으로 나타낸 조소품이, 33호에서는 흙단추가 찾아졌다. 또한 8호에서는 치레걸이인 대롱구슬과 고리구슬, 50호에서는 청동 덩어리, 14호에서는 매끈하게 손질한 사슴뿔이 발굴되었다.

4 살림에 철기를 사용한 사람들

제5·6기 문화층에서는 철기가 출토되어 앞 시기와는 큰 차이가 있다. 주로 살림살이에 필요한 철기들이 찾아진 것으로 보아 생활에 편리함을 느꼈을 것이다.

1) 제5기 문화층
이 문화층에는 5, 6, 18, 22, 27, 28, 36~38, 42~44, 46, 48, 49호 등 많은 집터가 해당한다. 집터에서는 철기, 석기, 토기, 뼈연모, 흙 조소품 등이 조사되었다.

철기는 대부분 조각들이지만 5호에서는 칼날이, 18호에서는 도끼가 발굴되었다. 쇠도끼는 좁고 긴 주머니 모양이었으며, 22호와 42호에는 쇠를 녹이고 남은 쇠똥[鐵滓]이 있었다.

토기는 검은 간토기와 바탕흙에 모래가 많이 섞인 갈색 간토기가 있다. 앞 시기에 많았던 큰 독과 항아리는 줄어들고 보시기, 단지, 시루, 굽접시 등 작은 토기가 많다. 또한 아가리가 겹입술이면서 몸통에 꼭지 손잡이가 달린 토기가 특징이다. 흙으로 빚은 조소품은 사람 얼굴을 구체적으로 형성화한 인형, 돼지를 상징하는 것이 있고 끈 고리가 달린 흙 단추도 찾아졌다.

2) 제6기 문화층
7, 17, 21, 26, 29, 47호 집터가 이 문화층에 해당한다. 17호 집터는 긴 방향이 남북인 긴 네모꼴로 1,270×770×50~60㎝ 크기다. 집터의 바닥은 진흙을 깔고 다졌으며, 주춧돌은 250㎝ 간격으로 4개씩 2줄로 배치하였고 그 옆에는 지름 20㎝쯤 되는 불탄 숯기둥이 있었다.

화덕자리는 집 가운데 돌을 둘러 타원형으로 만든 것이 있고 벽 쪽으로 작은 화덕이 6기 조사되었다. 작은 화덕자리는 3~4개의 돌을 삼각형으로 늘어 놓아 간단히 만들었으며 그 옆에 시루, 단지, 사발 등 음식 그릇들이 4~5개씩 놓여 있다. 또한 남쪽 화덕에는 10여 개체의 단지와 항아리, 20~30개체의 작은 토기가 흩어져 있었다. 북쪽과 서쪽 화덕에는 토기 이외에 쇠도끼, 쇠낫, 쇠칼, 쇠자귀, 쇠낚시바늘이 있었고 서남쪽에서는 점뼈가 찾아졌다.

이밖에도 4~5개체의 돼지 머리뼈, 숫돌, 청동 팔찌와 가락지, 옻칠을 한 얇은 나무껍질 조각 등 상당히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5 범의구석 유적이 지니는 몇 가지 의미

신석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여러 문화층이 층위를 이루고 있는 범의구석 유적은 상당히 이른 1950년대에 발굴되어 한국 고고학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유적은 선사시대는 물론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도 사람들이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생활 터전을 잡았다는 사실을 잘 증명하고 있다. 또한 두만강의 언저리에 위치한 이 유적은 우수한 선진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어 문화의 전파나 교류에 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해 준다.

범의구석 유적은 한국 고고학 연구에 있어 상당히 일찍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이 실시된 곳이다. 유적의 시기를 이해하고자 한 이러한 노력은 고고학 연구의 과학화를 시도한 결과로 청동기시대 집터(제2기, 15호)의 숯을 러시아 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측정한 결과 2430±120bp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값의 기준을 나타내는 것으로 지금부터 몇 년 전이라는 뜻이다. bp(before the present)는 국제 규약에 따라 1950년을 기준으로 한다.이라는 연대값을 얻게 되어 한국 청동기시대 연대 설정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유적에서 조사된 흑요석 석기는 비교적 가까운 백두산 근처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화산이 폭발한 지역에만 있어 선사시대 교역이나 교류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직접적인 자료가 되는 이 흑요석은 당시 사람들의 교류나 활동 범위를 알 수 있게 하므로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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