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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삼동 유적

신석기 시대 남해안 지역의 거점(중심) 유적

미상

부산 동삼동 유적 대표 이미지

부산 동삼동 패총 유적 전경, 부산 동삼동 유적 출토 그물무늬토기와 사슴무늬토기

부산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동삼동 유적은 우리나라 남동쪽의 최남단에 속한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에 위치한다. 영도의 중앙에 자리한 봉래산과 남쪽의 태종산 사이의 산지 동쪽 사면에 소재한다. 유적은 해안과 접하는 해발 고도 4∼9m 지점에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유적이 위치한 지역은 난류인 쿠로시오 해류와 한류인 리만 해류가 만나는 지점이며, 난대림의 식물대와 온대 계절풍의 기후대에 속해 조개더미 유적이 입지하기 아주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동삼동 조개더미 유적은 층위에 따른 퇴적 양상과 출토 유물의 특징,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값 등의 근거로 5개의 문화층으로 구분한다. 동삼동 유적에서는 신석기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특별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사슴무늬토기, 그물무늬토기, 배모양토기, 쇠뿔모양토기 등이다. 사슴무늬토기는 울주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 유물이며, 배모양토기는 창녕 비봉리 유적 출토 배와 함께 신석기 시대의 배 구조와 형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밖에 다양한 형식의 조개 팔찌와 토제 귀걸이, 곰 모양 토우 등 조개류와 토제류의 유물도 조사되었다. 특히 투박조개로 만든 조개 팔찌는 지금까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량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동삼동 유적은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민가 건축과 경작 등으로 보존 상태가 불량하였으나, 현재는 유적 전체가 정비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동삼동 유적은 우리나라는 물론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신석기 시대의 조개더미 유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아, 1979년에 사적 제266호로 지정되었다.

2 동삼동 유적의 발굴

동삼동 유적은 1929년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의 일본인 교사 오이가와(及川民次郞)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다음 해인 1930년과 1932년에 3차례 시굴 조사가 이루어져 4개의 퇴적층이 확인되었고,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한 각종 석기, 뼈 도구, 조개 팔찌, 흑요석, 조개 및 물고기류, 동물 뼈 등이 출토되었다.

광복 후, 1963∼1964년에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앨버트 모어(Albert D. Mohr)와 릴리 샘플(Lillie L. Sample)이 부분적인 시굴 조사를 하였다. 이어 1969년∼1971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3차례에 걸쳐 정식 발굴 조사하였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사에서는 신석기인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조개 가면과 토우(土偶), 어로 문화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그물무늬토기, 배모양토기, 결합식 낚싯바늘, 작살 등이 출토되어 주목을 끌었다.

1999년 동삼동 유적 조사는 유적 주변의 정화 사업 및 패총 전시관 건립과 관련하여 부산박물관에서 실시하였다. 이때 기존의 조사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집자리와 독무덤, 1,500여 점에 달하는 조개 팔찌와 조개 제품, 불탄 조와 기장, 사슴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어, 동삼동 유적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2000년대에는 유적 앞 해안 지역의 수중 조사에서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뿌리가 박힌 채로 출토된 고대 나무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3 동삼동 신석기인의 먹거리

동삼동 유적은 조개더미 유적으로, 당시 사람들이 오랫동안 조개류 등을 먹고 버린 쓰레기가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토양(산성 토양) 속에 묻힌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는 당시 자연 유물(먹거리 등)이나 목제 도구 등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적다. 반면에 조개더미 유적은 조개류가 알칼리성을 띠고 있어, 당시 먹고 버린 물고기류나 식물 유체, 육식 동물의 뼈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신석기 시대의 동삼동 사람들이 생업 활동에 직접 사용한 도구와 그 대상물 혹은 폐기물, 즉 자연 유물을 분석하면, 동삼동 신석기인들의 먹거리와 생업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유적에서 출토된 도구 중에는 수렵 및 어로와 관련된 생업 활동의 도구로는 석촉, 석창, 낚싯바늘, 작살, 찌르개, 그물추 등이 있다. 농경과 관련된 도구로는 땅을 파는 굴지구(괭이, 보습 등)가 있으며, 곡물을 수확하는 수확구로는 돌낫, 돌칼 등이 있다. 이외에 수확한 곡물을 조리하는 도구인 갈돌과 갈판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공구류로 돌도끼, 숫돌, 돌끌 등이 동삼동 유적에서 나왔다.

수렵은 구석기 시대부터 행해진 활동인데, 신석기 시대부터 환경의 변화에 따라 동물상이 달라지면서, 수렵의 형태도 달라진다. 동삼동 유적에서 확인되는 수렵 대상으로는 사슴과가 대표적이며, 그 외 멧돼지, 늑대, 곰, 호랑이, 너구리, 수달 등이 있다. 수렵 활동은 동삼동 유적이 위치한 영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육지로 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동삼동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 유체 중 다른 부위에 비해 두개골의 출토가 매우 적은 것에서 추정할 수 있다. 수렵 대상 중 곰이나 호랑이는 식용이 아닌 종교 또는 권위의 상징 등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사냥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사슴과와 멧돼지는 고기, 가죽, 뼈, 뿔, 송곳니 등 사용 가치가 높아 식용뿐 아니라, 뼈 도구, 치레걸이 등으로 활용되었다. 수달, 너구리, 늑대 등은 고기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털을 사용하기 위한 수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밖에 개는 야생종 개와 집 개가 확인되고 있어, 수렵에 이용하거나 식용 등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한편 동삼동 유적에서 확인되는 조류는 철새와 텃새가 있다. 대표적인 새로는 검둥오리, 참수리, 바다쇠오리 등의 철새와 꿩, 까마귀, 슴새 등의 텃새가 있다. 그 외 파충류로 바다거북이류가 있다.

어로는 신석기 시대의 시작과 함께 행해지는 생업 활동으로서 동삼동 유적 출토 도구 중 어로 도구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 이 같은 비중은 어로가 동삼동 유적뿐만 아니라 신석기인들의 주된 생업활동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삼동 유적에서 확인되는 물고기는 숭어와 감성돔을 제외하면, 전부 근해~외양에 서식하는 어종이다. 그중에서 온대역에 서식하는 참돔, 상어, 다랑어, 방어 등은 여름에 난류인 쿠로시오 해류와, 반대로 대구와 강치를 비롯해 바다사자와 물개 등 바다 포유류는 겨울에 한류인 리만 해류와 더불어 동삼동 유적 연안에 회유하는 어류이다. 어로 도구로는 결합식 낚싯바늘을 비롯해 작살, 그물추 등이 있다. 일부 석촉으로 분류된 유물 중에서 궁시 어법(활을 사용한 물고기 잡이)에 활용이 가능하여, 어로 도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물추는 그 수량이 많지 않다. 이런 현상은 이곳에서 발견되는 물고기 뼈 가운데 상어, 다랑어, 대구 등 큰 어종이 많은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외해성 어로가 중심이어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큰 어종은 결합식 낚싯바늘을 이용하였으며, 아울러 작살을 이용하여 상어, 다랑어, 돌고래 등의 어류, 강치와 같은 바다 포유류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채집 활동은 환경 변화에 따라 생물상이 달라지면서, 그 획득 대상물도 달라졌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조개류에 대한 채집을 들 수 있다. 즉 유적에서 출토된 조개류는 전복류, 홍합, 소라 등 연안수에 서식하는 조개류가 많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굴, 두드럭고등, 재첩 등 내만수에 서식하는 조개류가 많아져서 채집 장소나 환경 변화에 따른 추이를 보여준다. 아울러 유적에서 전복, 소라처럼 잠수해서 채취할 수 있는 종류가 포함된 점, 그리고 전복, 굴 등 암초에 붙어사는 조개류를 채취하기 위한 빗창과 같은 도구가 출토되는 예에서 동삼동 사람들이 조개류 채집에도 상당한 기술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육상 식물에 대한 채집도 성행했겠지만, 그 유체가 남아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동삼동 유적에서 확인된 식물 유체는 경작물인 조와 기장 등이 있는데, 이들 곡식은 농경 활동과 관련된 유물이다. 이 밖에도 도토리 등의 열매도 식용하였을 것이며, 갈돌과 갈판으로 보아 활발한 채집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동삼동 신석기인들의 생업은 수렵, 어로, 채집을 기본으로 하는 획득 경제를 기반으로 시작하여, 중기부터 생산과 교류의 중심지로 유적의 성격이 바뀌어 생계 형태의 변화를 보인다.

4 동삼동 신석기인의 장신구와 대외 교류

동삼동 유적에서 출토된 장신구는 조개 팔찌를 비롯하여 각종 귀걸이와 치레걸이, 뒤꽂이 등이 있다. 특히 투박조개로 만든 조개 팔찌는 조각을 포함하여 1,50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미완성품, 반제품, 완제품 등 다양한 형태로 나와서, 조개 팔찌의 제작 과정뿐만 아니라 동삼동 유적 집단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동삼동 유적에서 출토된 조개 팔찌는 지금까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량 출토되었다. 파손 형태는 제작 공정별로 최초 구멍을 내는 단계부터 최종적으로 다듬어 갈기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별로 나타난다. 동삼동 유적에서 출토된 조개 팔찌의 80% 정도가 중간 단계에서 파손된 것이다. 이로 보았을 때 조개 팔찌의 제작 실패율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개 팔찌의 제작이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임을 알려준다. 더욱이 투박조개는 수심 5~20m 깊이의 가는 모래밭에 서식하기 때문에 잠수 어업으로는 채취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동삼동 유적에서 출토된 많은 조개 팔찌는 조개 팔찌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던 장인 혹은 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대량으로 만들어진 조개 팔찌는 주변 지역과의 교역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개 팔찌의 형태는 대부분 타원형을 이루며, 크기는 다양하다. 보통은 안쪽 구멍의 지름이 5×7㎝정도이나, 3×4㎝ 정도의 소형도 다수 있다. 소형 팔찌는 어린이나 성인 남녀가 착용하기 곤란하며, 조개더미층 내에 2~3개씩 마치 끈으로 고정된 채 폐기된 것으로 보이는 미완성 조개 팔찌들이 출토되고 있어, 교역품으로 활용하기 위한 팔찌로 보인다.

귀걸이는 착용 방법이 서로 다른 석제로 만든 둥근 귀걸이(결상이식)와 토제 귀걸이(이전) 2종류가 출토되었다. 한쪽 일부가 뚫린 둥근 귀걸이는 그 출토 예가 많지 않으며, 동아시아 지역인 중국이나 일본의 신석기 시대 출토품과 비슷하다. 토제 귀걸이는 10점이 출토되었는데, 석제 둥근 귀걸이와 달리 귓불에 구멍을 뚫어 삽입하여 장식하는 귀걸이다. 형태는 모두 원반형이며, 표면의 가장자리를 따라 점열문과 동심원문이 새겨진 귀걸이도 있다. 크기는 지름 4~8㎝ 정도이다. 이 밖의 물고기나 조개, 동물의 이빨이나 발톱, 돌을 가공하여 만든 각종 치레걸이와 장신구도 출토되었다.

동삼동 조개더미 유적에서 출토된 일본 조몬계 유물은 여러 형식의 토기를 비롯하여 흑요석제 석촉, 일본 규슈 지역에서 출토되는 형식의 돌톱 등 다양한 석기가 있다. 이 중에 직접 규슈 지역에서 들여온 유물은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이며, 일본에서 만들어진 석기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출토 석재를 가지고 만든 석기로는 돌톱이 있다. 조몬 토기로는 조몬 시대 이른 시기의 토기인 도도로키(轟)식 토기, 소바타(曾畑)식 토기, 중기의 후나모토(船元)식 토기, 아타카(阿高)식 토기, 늦은 시기의 난부쿠지(南福寺)식 토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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