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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송국리 돌널무덤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과 지배자

미상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 대표 이미지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 출토 유물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삼국시대 신라왕의 무덤은 크고 웅장하다. 내부에는 금관을 비롯해 엄청나게 많은 유물이 담겨 있다. 청동기시대 지배자의 무덤도 신라왕처럼 이렇게 크고 많은 것을 담고 있을까? 이 해답을 찾기 위해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을 살펴보자.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에서는 비파형동검을 비롯하여 간돌칼, 화살촉, 옥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보통 청동기시대 무덤에서는 간돌칼이나 구슬, 붉은간토기 정도가 출토되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많은 것들과 귀한 것들이 출토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의 발굴을 통해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마을의 지배자의 모습을 좀더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2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

1974년 부여 송국리에서는 이제껏 잊혀져 있던 청동기시대 지배자의 무덤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전 발굴 현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던 어르신이 우연히 무덤을 발견하여 박물관에 연락한 것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의 야트막한 야산에 돌판이 드러나 있는 이 무덤을 처음에 박물관 직원들은 흔한 삼국시대의 무덤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발굴을 해본 결과 요령식동검이라고도 불리는 청동기시대의 비파형동검과 마제석검이라 불리는 간돌칼이 출토되며 선사시대 고고학의 최대 발견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바야흐로 청동기시대 한반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송국리 유적의 시작을 알리며 이 일대를 호령하던 지배자의 무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것들을 묻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3 무덤에서 출토된 것들

경주 대릉원의 황남대총에서는 금관과 허리띠를 비롯해 다양한 금제품이 출토되어 신라왕이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보여준다. 청동기시대 송국리의 지배자는 신라왕의 금관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당시의 다른 무덤들에 간돌칼이나 화살촉, 붉은간토기 정도가 부장되는 것과 비교하면 청동검과 간돌칼, 그리고 다양한 장신구 등 탁월할 정도의 부장품을 지니고 있다.

또한 무덤의 형태도 다른 돌널무덤과는 다르다. 보통의 돌널무덤은 판자모양으로 돌을 세워서 널을 만드는데, 일반적으로는 짧은 쪽은 하나, 긴 쪽은 한두 개의 판돌로 짜 맞추어 무덤을 만든다. 이에 비해 송국리의 돌널은 모두 세로로 긴 돌을 사용하여 여러 개의 돌을 일렬로 세워 만든 특이한 형태이다. 그만큼 일반인의 무덤과는 구별되도록 더 신경을 써서 차이가 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장품을 보면 무덤 주인공의 허리춤에는 간돌칼, 왼쪽 발치에 비파형동검과 돌화살촉, 대롱옥, 곡옥이 놓여있었다. 왼쪽 발치라고 추정했지만 만일 곡옥 두 개를 귀걸이, 함께 나온 대롱옥을 목걸이라고 한다면 처음 추정과는 반대 방향으로 머리가 놓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무덤 주인은 허리에 간돌칼을 차고 머리맡에는 11점의 길고 가는 돌화살촉과 비파형동검, 17점의 대롱옥을 꿰어 만든 목걸이와 곡옥 형태를 한 귀걸이 한 쌍 등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이 살아 생전의 사용하던 것은 날카로운 간돌칼이었고, 비파형동검은 실제 사용하던 무기라기 보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무덤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검은 대부분 한국식동검이라고 불리는 가늘고 긴 세형동검이었다. 하지만 송국리 돌널무덤의 청동검은 칼날의 폭이 넓고 유려한 곡선을 띄며 중앙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기가 있는 형태의 것이었다. 이전까지 이런 청동검은 중국 요령성을 중심으로 발견되었고 이런 문화의 중심도 요령성 일대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현재도 연구자들은 이런 칼을 요령식동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한반도 남부에서도 이런 비파형동검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한반도가 청동기 문화의 변두리가 아닌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음이 밝혀졌다. 또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런 비파형동검이 가장 먼저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것도 한반도 남부에서였다.

4 비파형동검의 발견

비파형동검이 처음 발견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에 전라남도 고흥군 운대리에서였다. 마을사람이 집을 짓다가 간돌칼과 화살촉을 발견했고, 소식을 들은 조선 총독부 박물관 직원들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방문 도중 이 일대에서 몇 군데 조사를 했는데, 우연히 발견한 돌널을 발굴하자 무덤 중앙의 바닥에서 비파모양을 한 청동검이 출토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지식으로는 그것이 청동으로 만든 청동검이라는 것밖에 알 수 없었고, 귀중하고 신비로운 물건이라는 생각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까지 알려진 가늘고 긴 청동검과 달리 폭이 넓은 형태로 이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윗부분은 부러져 없어서 전체적인 형태를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를 발견한 박물관 직원들은 이것이 귀중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이상의 연구나 조사는 진행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다시 정식발굴조사로 비파형동검이 발견된 것은 바로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에서였다.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자, 그전까지 인정받지 못했던 한반도 남부에서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정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일본과 같이 한반도에서도 금석병용기-석기와 청동, 철이 함께 사용되는 시기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비파형동검이 사용되는 청동기시대가 이후의 세형동검이 사용되는 시대와 명확히 구분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5 칼이 가지는 의미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우두머리는 어떻게 다를까? 청동기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벼농사 중심의 생계 경제가 확립되어 한곳에 정착하여 생활을 하고 노동력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면서 생산물을 분배하기 위해 규칙이 정해지고, 농경지와 물 등 활용 가능한 자원에 대한 분배를 위해 지도자의 권력은 더욱 강해지게 된다. 특히 자원과 식량을 둘러싼 마을 간의 갈등은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 전쟁이라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전쟁에서도 일반 병사와 달리 통솔하는 지휘관은 자신들만의 상징인 칼을 들게 되었고 당시 새로운 소재인 청동으로 만든 비파형동검은 중국 북방에서 한반도 남부까지 널리 사용되던 군사적 지휘관의 상징물이었다. 이처럼 칼, 즉 검(劍)은 신석기시대에는 없다가 청동기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무기이다. 지금도 장군이 되면 대통령이 직접 칼을 하사하는 것과 같이, 칼은 개인용 무기이면서 실제 무기의 성격만큼이나 군대의 통솔을 의미하는 지휘관의 상징물이다. 마찬가지로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칼은 그 무덤에 묻힌 사람이 살아생전 지휘관이었다는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송국리 돌널무덤에서는 이러한 칼 가운데 간돌검과 청동검이 함께 나온 드믄 사례로서 주목된다.

비파형동검으로 권위를 내세웠던 시대를 이은 다음 단계의 지배자는 세형동검을 가진 이들이었다. 이들은 비파형동검 대신 더 날카로운 세형동검을 가졌으며, 귀걸이나 목걸이는 송국리 돌널무덤에 묻혔던 사람과 마찬가지로 천하석 등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더해 비실용적인 청동기인 청동거울이나 특이한 형태의 청동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출토되는 유물은 모두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이 군사력의 느낌이 강하다고 한다면, 다음 단계에는 의례적인 느낌이 더 강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사회가 더 복잡해지는 양상과 관련있을 것이다.

6 집단에서 개인으로

송국리 유적은 사적 제249호로 197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조사 이래, 계속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지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논란은 있지만 유적을 둘러싼 거대한 환호와 목책, 많은 집자리와 창고, 저장구덩이 등이 낮은 구릉 위에서 주변을 조망할 수 있게 위치하고 있다. 발견되는 유물들은 송국리형토기라고 불리는 항아리와 플라스크처럼 생긴 붉은간토기가 특징적이며, 돌도끼와 돌끌,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다양한 모양의 반달돌칼은 농사와 관련되는데, 불탄 쌀이 함께 발견되어 이 마을이 농사를 기반으로 하였음을 알려준다.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식은 창고에 보관하고, 마을을 지키기 위한 시설을 만들었다. 이것이 송국리 마을의 모습이다. 왜 그랬을까? 곡식을 지키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통합이라는 미명으로 노예를 얻기 위한 전쟁의 시대를 거치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을까? 결국 청동기시대 후기의 마을은 주변을 약탈하는 이들이 있고, 마을을 지키기 위한 군사력이 필요한 시대였던 것이다.

송국리 돌널무덤은 이러한 당시 사회 속에서 나타난 군사적인 지배자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거대한 덮개돌을 가진 고인돌이 아니라 작은 돌널무덤에 묻혔다. 하지만 그 속에서 발견된 유물은 청동기시대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다. 이는 점차 단 한 사람이 마을에서 무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 권력자의 무덤이 왜 이렇게 작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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