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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과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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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과 유물 대표 이미지

북한 지역 신석기 관련 유물 사진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국립문화재연구소)

1 개요

북한에서 처음 이루어진 신석기 시대 유적의 발굴 조사는 일제 강점기인 1929~1930년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에 의한 함경북도 선봉군 옹기읍의 송평동 조개더미 유적 조사였다. 그리고 이 유적은 1947년 도유호가 다시 발굴함으로써, 광복 후 북한 지역에서의 첫 발굴 조사가 되었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년 빠짐없이 신석기 시대 유적을 발굴하여, 당시 남한 지역과 큰 대조를 이뤘다. 이러한 발굴 성과는 우리나라의 신석기 연구에 있어 기본적인 틀을 잡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정치, 경제적인 상황 등에 의해 신석기 시대 유적은 간헐적으로 조사되었고, 신석기 연구는 침체기로 들어서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연해주, 중국, 남한 등의 유적을 소개하면서, 북한 신석기 문화에 대한 연대를 새롭게 조정하였는데, 전기(기원전 6천년기~5천년기), 중기(기원전 4천년기), 후기(기원전 3천년기)로 나누고 있다. 전기에는 새김무늬그릇과 간석기가 쓰이기 시작하였고, 농사와 같은 여러 생산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중기에는 새김무늬그릇과 간석기가 널리 보급되고, 보습 농사와 집짐승 기르기가 시작되었다고 서술한다. 후기는 농경 기술이 발전하고, 청동기 시대의 문화 요소인 달도끼, 곰배괭이 등이 사용되기 시작되었다고 본다.

신석기 시대의 시기 구분은 연해주, 중국, 남한 등에서 이루어진 방사성탄소 연대의 성과를 일부 반영하며 설정되었다. 그러나 북한 지역 자체에서 이루어진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값이 없기 때문에 시기별로 각 유적의 연대를 결정하고, 그에 따른 신석기 문화의 체계적인 복원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자료의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2 북한의 초기 신석기 시대 유적 발굴

1950년대에는 궁산 유적 발굴을 시작으로 장성리(1955년), 금탄리(1956년), 청진 농포동(1956년), 지탑리(1957년), 미송리(1959년), 무산 범의구석(1959~1961년) 등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그 밖에도 두만강 유역과 동해안 일대 및 황해남도 북부 지역을 지표 조사하여, 유적의 분포를 확인하였다.

1950년에는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 궁산 마을의 궁산 유적을 발굴하였다. 이 유적에서는 신석기 시대 조개더미뿐만 아니라 다수의 집자리와 움구덩이 확인되었으며, 다양한 석기, 토기, 뼈 도구, 장신구를 비롯하여 많은 자연 유물도 출토되었다. 이 유적의 발굴로 신석기 시대 농경과 가축의 사육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서부 지역의 빗살무늬토기 문화권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자료가 소실되었다.

1950년과 1954년에는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검은개봉 유적을 발굴하였다. 이 유적은 두만강변의 높은 언덕 위에 솟아 있는 봉우리의 경사면에 형성된 유적으로, 흑요석제 석기가 많이 출토되어 주목되었다. 1955년에는 평양시 사동구역에 있는 금탄리 유적을 발굴하였다. 퇴적층과 집자리 및 출토 유물을 비교 대조하여, 당시까지만 해도 구분이 애매하였던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시대를 구분한 성과를 이루었다.

1956년에 발굴된 농포동 유적에서는 다양한 토기류와 석기 및 뼈 도구를 비롯하여 많은 종류의 조개류와 짐승 뼈가 출토되었다. 특히 흙이나 돌로 만든 여성과 개의 머리, 새 등의 조소품이 많이 나왔다. 1957년에는 지탑리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중서부 지역의 신석기 시대 편년을 구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59~1961년까지 5차례 발굴 조사된 무산 범의구석 유적은 두만강 기슭에 위치해 있다. 신석기 시대의 집자리 10기가 조사되었는데, 확인 가능한 모든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방형이며, 규모는 길이 4m 내외로 중·소형에 해당한다. 내부 시설 중 화덕자리는 돌을 돌려 만든 돌두름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집자리의 중앙 혹은 한쪽으로 치우쳐 설치된 경우도 존재한다. 집자리의 가장 큰 특징은 기둥 구멍의 배치 상태인데, 집자리 내부에 일정한 간격으로 4열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 상태로 보아 집자리는 발전된 양식의 상부 구조를 지녔다고 판단된다. 이외에 당산 조개더미 유적(1958년), 미송리 유적(1959년) 등이 조사되었다.

3 북한 신석기 유적의 본격적인 발굴과 성과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굴포리 서포항(1960~1963년), 용당리(1960년), 토성리(1960~1961년), 장성리(1960년), 세죽리(1962년), 신암리(1964~1966년) 등의 유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또 평안북도와 함경북도 내의 유적 답사를 통해 다양한 신석기 시대 유적이 찾아졌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적은 서포항 유적으로,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에 대한 종래의 관점을 완전히 바꾸게 한 것이다. 그때까지는 궁산-지탑리를 중심으로 한 서북 지역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르다고 보았다. 하지만 서포항 유적이 발굴되고, 그 해당 시기를 기원전 5,000년기로 잡음에 따라 동북 지역의 납작밑 빗살무늬토기가 가장 이른 것이 되었으며, 신석기 시대의 상한도 대폭 올라가게 되었다.

신암리 유적은 북한에서 발굴 조사가 4차례(1964년, 1965년, 1966년, 1974년)나 이루어진 첫 유적으로서,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읍(舊 신암리)에 위치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유구와 유물은 1·2·3지점에서 조사되었다.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바닥이 납작하고 둥근 몸통에 목이 있는 항아리가 기본형이고, 그 외에 굽잔과 바리형 토기가 있다. 토기의 겉면에는 덧무늬와 새김무늬가 배합되어 새겨진 것이 많다. 무늬로는 물고기 뼈무늬, 단추무늬, 세모꼴무늬, 번개무늬, 덧무늬, 그물무늬 등이 보인다. 신암리 신석기 문화는 중국 요동 반도의 청동기시대 문화와 한반도 서북 지방의 신석기 시대 말기 문화가 공반되는 양상을 보여, 신석기 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고 있다.

1970년대 이후의 북한의 신석기 유적 발굴 예는 많지 않다. 용연리(1972년), 강상리(1975년), 남경(1979~1981년), 장촌(1982년), 마산리(1987~1988년), 소정리(1989~1991년) 유적 등이 있다. 이 중 남경 유적은 발굴된 유적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편이며, 다음의 청동기 시대로 이어지면서 농사짓기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어 유명하다. 강상 유적은 1950년대에 동해안 일대, 두만강 유역의 유적 조사를 할 때 이미 알려져 있던 유적으로, 함경남도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포항 유적 등과는 달리 납작 밑의 토기와 함께 둥근 밑의 토기 문화권의 접경 지역으로 본다. 이에 따라 궁산 문화권의 북쪽 한계가 되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소정리 유적은 황해북도 청단군 소정리에 위치하고 있다. 모두 3개의 지점에서 신석기 시대의 집자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제1지점에서는 집자리 11기, 제2지점에서는 집자리 4기, 제3지점에서는 집자리 2기가 조사되었다. 조사된 집자리의 특징 중 하나는 길게 돌출된 복도식의 출입구 시설이다. 이와 같은 복도식의 출입구 시설은 평양 남경 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충청 내륙 지역의 대표적 집자리인 대천리식 집자리의 출입구 시설과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또한 반궁리 유적과 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표대 유적은 남경 유적과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으며, 대규모 마을 유적으로 추정된다. 유적은 대동강 변을 따라 형성된 구릉 지역이 끝나는 부분에 형성된 충적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 유구는 20여 기의 집자리와 토기 가마터 2기가 확인되었으며,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 가마터는 타원형의 구덩식 구조로, 상부에는 외곽으로 지름 0.2∼0.3m 정도의 강돌을 2∼3단 쌓았다. 구덩이의 내부에는 진흙을 발랐는데, 두께가 1.5㎝ 정도이다. 가마터의 장축은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고, 규모는 길이 1.5m, 너비 0.8m, 잔존 깊이 0.85m 정도이다. 가마터 안에서는 가로 방향의 물고기 뼈 무늬와 짧은 직선이나 사선의 무늬가 새겨진 빗살무늬토기편과 그물추가 출토되었다.

이후 용덕리 유적과 리천리 유적 등이 조사되었다. 이처럼 2000년대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우연히 발견된 유적을 긴급 수습하는 차원의 조사가 많고, 실제 학술 목적의 조사 활동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4 북한 신석기 유적 발굴 성과와 그 의미

광복 후 북한 지역에서 이루어진 신석기 시대 유적 발굴 조사는 1950년대 초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남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약 10여 년 정도의 공백기를 보이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다시 활발히 조사가 이루어지는 듯하였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1980년대에 들어 점차 조사가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거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 무렵부터 조사가 급증하는 남한 지역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게 되었다.

최근에 오면서는 발굴보다는 북한 지역 이외 지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들을 자주 소개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외부 지역과의 비교를 통해 스스로의 문화에 대한 인식의 심화 차원이 아니라, 이들 문화를 북한 신석기 문화 영역으로 확대 해석하여 북한의 신석기 체계와 시기 구분 안에 편입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북한에서는 1950년 궁산 유적 발굴을 시작으로 금탄리, 지탑리, 미송리, 서포항 등의 유적을 발굴하여, 유적별 층서 관계와 유적 간의 교차 편년을 통하여 각각의 문화 유형을 분류하였다. 1970년대부터는 문화권의 설정과 판단의 범위에 남한 전역을 포함하고, 요동 등 중국의 동북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초기에 도유호가 전파론적 관점에서 파악한 신석기 시대 토기에 대해서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인식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이 되면 빗살무늬그릇이라는 용어 대신에 새김무늬그릇이라 부르며, 신석기 문화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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