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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형동검

한국 역사의 여명을 상징하는 유물

미상

비파형동검 대표 이미지

비파형동검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비파형동검은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청동제 검으로서 한국 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전기 역사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검의 형태가 비파를 닮아 ‘비파형동검’이라 부르며, 출토된 지역에 따라 요령식 동검, 부여식 동검, 고조선식 동검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해방 전에는 만주식 동검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또 그 형태적 특징을 따서 곡인청동단검으로 부르기도 한다. 검신의 길이는 보통 30~40cm 내외이며, 여기에 5cm 이내의 짧은 슴베가 달려 있다. 또 칼날 아래쪽 부분이 마치 비파의 공명통처럼 둥그스름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검신의 중심부가 동물의 등뼈처럼 볼록 튀어나와 있다. 현재 중국의 랴오닝성 일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 동북 지역과 함경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며, 주로 돌널무덤이나 고인돌의 부장품으로 발견된다.

2 비파형동검의 형태와 특징

비파형동검은 검신(檢身)·손잡이[검파]·검자루맞추개돌[검파두식]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립식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보통 검신의 길이는 보통 30~40cm 내외이며, 여기에 5cm 이내의 짧은 슴베[칼 뿌리]가 달려 있다. 비파형동검 검신의 형태는 발견된 지역과 제작 시기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검신의 아랫부분이 둥글게 배가 부른 비파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밑으로부터 검의 슴베[경부]가 그대로 연장되어 검신 중앙부인 등대[검신의 중앙부, 등마루]를 이룬다. 검신의 중앙부[등대]가 동물의 등뼈처럼 도드라지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며, 보통 검날의 가운데에 돌기부(突起部)가 형성되어 있고 이 돌기부와 같은 위치의 등대 부분에도 마디[융기부]가 볼록 솟아 있으며 그 위로 등날이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돌기부는 비파형동검을 다른 동검들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된다.

검의 손잡이 부분[검파부]은 보통 ‘ㅗ’ 형태로 되어 있는데, 손에 쥐어지는 부분은 속이 빈 나팔형으로 생겨 그 끝부분에 검의 슴베를 삽입해 결합하게 되어 있다. 이처럼 검신과 검의 손잡이가 따로 주조되어 결합하는 형식의 조립식 검은 중국식 검 및 오르도스식 검과는 다른 뚜렷한 비파형동검 고유의 특징으로 지적되며, 이러한 특징은 한국식 동검으로 계승된다.

연구자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비파형동검은 제작 시기에 따라 만드는 방법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크게는 등날이 시작되는 등대의 융기부 유무와 양쪽 검날의 돌기부 위치 및 아랫부분 검날의 곡선이 완만한 정도에 따른 검신 폭을 기준으로 하여 나누어진다. 즉 이른 시기의 것은 양쪽 검날의 돌기 부분이 뚜렷하면서 아래쪽 검날을 이루는 곡선이 풍만한데, 랴오닝성의 얼따오허쯔[二道河子] 돌널무덤에서 나온 비파형동검이 대표적이다. 반면, 늦은 시기의 것은 정자와쯔[鄭家窪子] 널무덤에서 발견된 사례가 대표적인데, 돌기가 분명하지 않고 아래쪽 검날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이전보다 검신의 넓이가 좁아지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러한 늦은 시기 비파형동검의 특징은 이후 세형동검[한국식동검]으로 계승된다.

3 비파형동검의 분포 지역

비파형동검의 주요 출토지역은 랴오닝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 일대이다. 북쪽으로는 중국의 지린[吉林]·창춘[長春] 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동검이 주로 출토되는 지역의 이름을 붙여 요령식 동검(遼寧式 銅劍), 부여식 동검(扶餘式 銅劍), 고조선식 동검(古朝鮮式 銅劍)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해방 전에는 만주식 동검(滿洲式 銅劍)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또 그 형태적 특징을 따서 곡인청동단검(曲刃靑銅短劍)으로 부르기도 한다. 현재까지 한반도 지역 내에서 약 50여 자루 이상 발견되었으며, 함경도 지방을 제외하면 거의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비파형동검은 한반도 서부 지방에 주로 발견되고 있는데, 평안도로부터 남해안의 여수반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비파형동검이 중국 동북 지방과 한반도 서부 지방에서 조밀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당시 이들 지역 간에 활발한 교류가 진행되었으며 같은 청동기 문화를 공유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유구(遺構)는 랴오닝성 일대에서는 돌널무덤이나 돌곽무덤 등 돌무덤[石墓] 계통이 많으며, 한반도에서는 돌널무덤이나 고인돌에서 주로 확인된다.

특히 최근까지 한반도의 고인돌 유구에서는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왔는데, 전라남도 보성강 유역과 여수반도의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에서도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면서 이러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즉 해방 전까지 한국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은 그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아서 세형동검의 이형(異形)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중국 차오양[朝陽] 쓰얼타이잉즈[十二台營子] 유적에서 한반도 세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의 조형(祖形)으로 보이는 비파형동검과 거친무늬거울[粗文鏡]이 출토되고, 부여 송국리 유적 등 한반도 여러 곳에서 비파형동검이 발견되면서, 비파형동검은 세형동검에 앞서는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동검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4 비파형동검 문화의 기원과 고조선

비파형동검이 제작된 시기에 대해서는 흔히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비파형동검이 랴오허[遼河]강 유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으나, 강을 사이에 두고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로 대표되는 랴오시[遼西] 지역과 차오양(朝陽) 십이대영자(十二臺榮子) 유적으로 대표되는 랴오둥[遼東] 지역 중 어느 곳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비파형동검의 초기 형식이 랴오둥 지역의 돌널무덤[石棺墓]에서 미송리형 토기와 함께 출토되고, 이후 랴오시 지방으로 전파된다고 본다. 반면, 중국 학계에서는 비파형동검의 출토 사례가 랴오시 지역에서 훨씬 많이 보고되고 있는 점을 들어 랴오시에서 랴오둥으로의 전파를 주장하고 있다.

한편, 비파형동검이 한반도로 유입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8~7세기 전후로 추측되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한반도에서 비파형동검이 직접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거푸집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요령식 동모(銅鉾) 및 비파형동검과 세트를 이루는 부채도끼[扇形銅斧]의 거푸집[鎔范]이 함경남도 영흥읍과 부여 송국리 집터에서 출토되면서 한반도 지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도 현지에서 직접 제작된 것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사실 청동과 같은 금속 자체가 희귀하였던 고대 사회에서 비파형동검의 출현은 곧 지배 계급의 출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비파형동검 문화는 곧 우리 역사의 시작을 알린 고조선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보통 비파형동검의 날은 무기로 사용할 만큼 날카롭지 않으며, 따라서 당시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유물과 함께 등장한 거대한 지석묘[고인돌]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지배자의 출현, 그리고 고조선 역사의 시작을 말해주고 있다.

비파형동검 문화권은 랴오시로부터 랴오둥 지역 및 쑹화강[松花江] 유역 그리고 한반도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청동기 문화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권의 분포 범위는 흔히 고조선을 포함하는 예맥족(濊貊族) 문화권과 일치한다고 본다. 다만 랴오시 일대의 청동기 문화에는 북방계 요소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어, 그 담당자가 예맥·고조선과는 다른 북방 유목민족, 즉 산융(山戎) 혹은 동호(東胡)의 문화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비파형동검이 주로 출토되는 지역에 주목해 볼 때, 비파형동검 문화를 향유하였던 중심 세력은 고대 중국 동북부에 거주하였던 산융(山戎)·동호(東胡)와 한국 역사 최초의 국가로 알려진 고조선이 유력하다. 특히 랴오둥 지역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출토하는 비파형동검의 경우 고조선 사회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데, 비파형동검은 민무늬 토기인 미송리형 토기와 함께 고조선의 ‘표지 유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비파형동검의 특징을 계승하면서 출현하는 세형동검[한국식 동검] 문화도 바로 비파형동검 문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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