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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늑도 유적

사천 늑도 유적과 한일교류

미상

사천 늑도 유적 대표 이미지

사천 늑도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남해안의 작은 섬. 사천과 남해 창선도의 사이에 늑도가 있다. 이 섬에는 돌보다 토기가 많을 정도이며 섬 전체가 하나의 유적일 정도로 많은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기원전 2세기대의 덧띠토기와 철기, 그리고 일본 야요이시대의 토기들이다. 북부 규슈의 야요이시대 토기가 이 섬에서 대량으로 확인되었고, 중국 한나라의 청동 거울, 동전, 항아리, 유리구슬 등을 비롯하여 멀리 러시아 연해주의 토기 등도 출토되어, 당시 바닷길을 따라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늑도 마을의 모습

늑도 마을은 집터와 무덤, 그리고 조개더미로 크게 나뉜다. 집터는 섬 전역에 분포하는데, 평면 형태가 둥근 것, 네모난 것 등 다양하다. 특히 주목되는 것으로 아궁이와 벽을 따라 편평한 돌로 터널같이 만든 시설이 있는데, 바로 온돌이다. 잘 알다시피 온돌은 집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만든 시설인데, 음식을 만드는 아궁이가 집안 온돌의 끝에 연결되어 있다. 이런 온돌은 연해주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유사하여 양 지역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되고 있다. 또한 집자리 주변에는 창고나 망루가 있었다. 이런 건물들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만들기 때문에 기둥의 흔적만 땅바닥에 남고 그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아 조사가 쉽지 않다. 하지만 기둥구멍의 규칙성을 찾아 어떤 건물이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무덤은 항아리 두 개의 입을 맞추어 쓰는 독무덤과 움무덤이 주로 발견되는데, 어린이들은 독무덤, 어른들은 움무덤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무덤이 조개무지에 만들어진 경우가 많아, 사람의 뼈가 잘 남아 있다.

3 뼈로 알 수 있는 늑도의 사람들

우리나라의 토양은 산성이기 때문에 사람의 뼈와 같은 유기물은 곧 썩어 없어진다. 하지만 조개무지에 들어있는 조개껍질은 알칼리성으로 산성토양과 합쳐져 땅을 중성으로 만드는 덕분에 사람의 뼈와 같은 유기물이 잘 남을 수 있었다. 늑도에서는 많은 사람의 뼈가 확인되었고, 그것을 근거로 독무덤은 어린이, 움무덤이나 돌널무덤은 어른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잘 남아 있는 인골을 조사하여 당시 사람들의 키가 160cm가 안된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윗턱의 송곳니가 없는 여성의 머리뼈이다. 만약 해골이 되어 송곳니가 빠지거나 썩어버리면 이빨의 뿌리가 있던 곳은 속이 비게 된다. 하지만 살아생전에 송곳니가 빠지게 되면 상처가 회복되며 뿌리가 있던 곳은 아물어서 막히게 된다. 그런데 이 여성은 살아생전에 송곳니가 빠진 것이 확인되었다. 아프리카나 태평양 폴리네시아의 원주민들에 대한 연구 중에는 성인식을 하는 과정에서 송곳니를 빼는 사례가 있고, 이웃한 일본에서도 일부러 이빨을 뽑는 풍습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것을 발치(拔齒)라고 하며, 죠몽시대부터 야요이시대까지 넓게 확인되고 있다. 이 외에도 발굴된 인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일본의 야요이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인골과 유사한 형질이 확인되어 당시 한반도 남부의 사람과 왜인 간에 많은 교류가 있었음이 짐작된다.

4 늑도에서 발견된 동물들

늑도의 조개무지에서는 많은 동물들의 뼈가 확인되었다. 가장 많은 것은 사슴으로 섬에서 사냥 가능한 수량 이상의 뼈가 출토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사슴의 다리뼈는 많지만 머리뼈는 적게 발견되는 점에서, 육지에서 잡아 해체해서 이곳으로 가져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뼈는 멧돼지뼈이다. 역시 머리뼈는 발견된 사례가 적다. 닭뼈도 많이 출토되었는데, 뼈의 크기가 일정한 점을 볼 때 특정한 크기가 되면 잡아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가축으로 기르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생각된다. 그 외에도 사냥이나 낚시를 통해 잡은 육상동물과 물고기뼈도 많이 확인된다. 조개무지 외에서도 동물의 뼈가 확인된 사례가 있다. 가장 주목받는 것은 무덤에 묻힌 개다. 개를 단독으로 묻은 것이 아니라 주인 곁에 함께 묻었는데, 중국에서는 개가 죽은 자를 나쁜 것들로부터 지켜준다고 생각하여 함께 묻는 경우가 있었으며, 북방의 선비족들도 개를 함께 묻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5 철기의 등장

늑도 유적에서 주목받는 것은 철이다. 철로 만든 칼에 손잡이는 사슴뿔로 만들어 쓰는 손칼이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식사를 하는데 사용하거나 간단한 도구를 만드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다. 사람들마다 하나씩 가진 도구로서 철로 만든 도구가 대중화되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덩이쇠를 비롯한 다양한 철기와 함께 제철작업을 하던 흔적도 확인되어, 섬 안에서 철기의 제작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늑도 유적에서 보이는 많은 국제교류의 흔적은 결국 철을 둘러싼 교역의 흔적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6 국제교역항구 늑도

늑도 유적은 한반도 남부에서 철기의 제작이 일반화되던 시기의 유적이다. 철 수요 확대에 따른 생산량 증가가 이루어지고, 생산량 증가를 위해 제작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질 좋은 철을 구하려고 찾아온 일본 열도와 중국 등지의 사람들이 교역을 위해 지나던 해상 교통로에 위치한 일종의 무역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항구를 통제하는 지배자의 모습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이웃한 창원 다호리 1호 널무덤이나 경산 양지리 1호 널무덤 등지에서 확인된 기원전 1세기의 지배자는 한나라의 청동거울과 동전을 비롯하여 금칠을 한 쇠뇌 등 다양한 귀중품들을 완형으로 가지고 있는 반면, 사천 늑도에서는 가장 큰 무덤에서도 청동칼 하나, 철로 만든 새기개 하나 정도밖에 발견되지 않아, 마을 내에서 계층적인 분화는 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또한 중국제 청동거울도 무덤이 아닌 집자리에서 깨어진 편이 출토되는 정도이기 때문에 무덤에서 확인된 유물로 지배자를 구분해 낼 수 있을 정도의 자료는 없다. 늑도 유적에서의 교역은 중국의 군현과 서남해안의 한반도 내 세력들, 그리고 일본 야요이시대 우두머리들을 연결하며, 이곳을 항해하는 이들의 생필품과 같은 실생활품 위주의 교역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항해술의 발달 혹은 전염병 등 어떠한 이유로 바닷길이 바뀌면서 기원 전후한 시기 갑자기 늑도 유적의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7 야요이 사람들의 이주

사천 늑도유적에서 출토된 일본 야요이 토기는 수 백 점에 이르지만, 전체 출토 토기 가운데 5% 정도 차지하기 때문에 야요이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한반도 남부의 덧띠토기와 야요이토기가 합쳐진 절충형의 토기들도 많이 확인되기 때문에, 모방에 의해 한반도 남부와 일본 규슈의 문화가 혼합되고 한반도 남부의 사람이 야요이토기를 모방하거나, 야요이 사람이 한반도 남부의 토기를 모방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민족지 연구의 사례로 보면 보통 토기는 여성들이 만들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 토착민과 일본열도 출신 왜인 이주민들 사이에 국제결혼도 흔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러한 증거는 앞서 본 사람들의 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늑도 유적을 넘어서 한반도 남부에 얼마나 많은 야요이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그것을 알 수 있는 유적이 김해 구산동에서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야요이토기가 130여 점 출토되었다. 이것은 사천 늑도 유적 다음으로 가장 많이 확인된 사례이며, 시기적으로는 늑도보다 약간 앞선다. 주목되는 것은 집자리 내에서 한반도 남부의 덧띠토기와 야요이토기가 출토된 경우도 많지만 야요이토기만 발견된 집자리도 많다는 것이다. 또한 야요이토기와 덧띠토기의 비율이 5 대 5 정도로 야요이토기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까? 이 마을에는 덧띠토기를 쓰는 한반도 남부 사람들과 야요이토기를 쓰는 왜인들의 비중이 5 대 5이며, 왜인들만 사는 집도 많았다고 결론 내려야 되지 않을까? 예전 김해의 항구가 있던 봉황동 유적 인근에 자리한 김해 회현동 조개무지에서 일본 야요이시대의 독무덤이 발견되었다. 항아리는 일본 규슈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한국식의 청동검, 청동 새기개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야요이 사람들이 한반도 남부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고 그들은 바로 ‘철’을 안정적으로 구하기 위해 철의 중심지인 김해에 자리잡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뱃길을 따라 사천 늑도, 광주 신창동을 잇는 해상교통로에 흔적을 남겼고, 철을 구하는 과정에서 광산이 있던 울산 달천에도 흔적을 남겼다. 작은 토기편들이 남아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멀리 교류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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