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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이금동 유적

사천 이금동 유적과 신전

미상

사천 이금동 유적 대표 이미지

사천 이금동 유적 61호 지상건물

경남고고학연구소

1 개요

지금도 교회나 성당, 사찰을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종교적인 건물들은 그 형태나 규모가 일반적인 것들보다 특이하고 크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 곁에 이러한 종교적인 색채의 건축물들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처럼 크고 멋진 신전이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도 있었을까? 과연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믿던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이 지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었을지를 살펴보자.

이것에 대한 답을 한반도 남쪽 해안의 사천 이금동 유적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마을이 발견되었는데 생활공간과 무덤공간이 구분되며 생활공간의 중앙, 그리고 생활공간과 무덤공간의 사이에서 각각 한 채씩 거대한 지상건물이 발굴되었다. 생활공간의 대형건물은 지배자의 집, 혹은 마을 주민들이 모이던 공공건물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생활공간 쪽으로 입구를 가지고 무덤공간을 바라보는 지상건물은 생과 사를 이어주는 신전으로 해석하는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2 사천 이금동 유적

경상남도 사천시 이금동 산 41번지 일대의 발굴조사 결과는 우리의 눈을 의심케 했다. 구석기시대 사람이 살았던 흔적부터 조선시대까지 사람의 흔적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청동기시대 마을이었다.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살던 생활공간과 공동묘지와 같은 무덤공간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생활공간은 집자리를 중심으로 화덕 자리나 저장구덩이가 위치해 있었다. 집자리는 땅을 파서 만든 반지하 건물과 기둥을 세워 지상으로 건물을 지은 지상 건물로 나뉜다. 평면 형태는 크게 긴 네모꼴과 원형의 송국리형 집자리로 구분된다. 이 둘은 시기적인 차이로 네모꼴의 집자리에서는 구멍무늬 토기와 겹아가리 토기 등이 출토된다. 이에 반해 원형의 송국리형 집자리는 19채가 확인되는데, 다른 지역의 것들과 달리 가장자리에 많은 기둥구멍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부에서는 송국리형 토기를 비롯하여 새부리모양 석기, 홈자귀, 삼각형 돌칼,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지상건물은 25채가 확인되는데, 반지하식의 움집과 뒤섞여 있다. 이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60호와 61호 지상건물이다.

60호 지상건물은 마을 중앙의 광장 남쪽에 위치하는데, 규모가 길이 29m 너비 6m의 초대형 건물이다. 면적은 174㎡이며 여러 차례 증·개축을 하여 손을 본 것으로 보인다. 61호 지상 건물은 무덤공간에 접해 있으며 정면 19칸 측면 2칸으로, 길이 32m, 너비 12m이다. 건물의 입구는 생활공간 쪽을 향하고 있어 이 건물의 성격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무덤공간은 생활공간에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남쪽 아래에 위치한다. 범위는 폭 10m, 길이 120m 정도로 고인돌을 비롯하여 돌널과 독무덤도 확인된다. 고인돌은 네모나거나 둥근 묘역을 가지는데, 서로 이어져 있어 흡사 공동묘지와 같이 연결되어 있다. 돌널무덤, 독무덤 등 다양한 무덤들이 있고, 나무로 널을 만들어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무덤도 있다. 생활공간에서도 무덤이 있는데, 이것들은 네모난 집자리를 쓰던 이들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무덤에서는 붉은간토기와 가지무늬 토기, 간돌칼, 구슬 등이 보이는데, 비파모양 청동칼도 두 점 출토되었다. 이 청동칼은 묘역을 가지는 큰 무덤이 아니라 가장자리의 작은 돌널무덤에서 발견되어 큰 무덤에서 좋은 유물이 나온다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차이가 난다.

3 대형 지상건물의 성격

60호 지상건물은 생활구역, 61호 지상건물은 무덤구역에 인접해 있다. 60호 지상건물은 광장에 접해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거나 공동 작업을 하던 공공건물로 볼 수도 있고, 비파모양 청동칼을 가진 권력자의 집자리나 공동의 곡식을 모아놓은 창고 같은 성격으로 해석도 가능하다. 불행히도 지상건물은 기둥구멍만 남아 있어 규모는 확인할 수 있지만 생활면이 땅 위에 떠있기 때문에 내부의 시설이나 안에 들어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추측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엄청난 크기에, 광장에 접해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61호 지상건물은 무덤공간에 접해 있으며 입구는 생활공간 쪽으로 향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단순히 생각하면 생활공간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이 무덤공간으로 옮겨가는 장례 과정이나 무덤공간의 선조들과 생활공간의 사람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건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일본 오사카의 이케가미소네(池上曾根) 유적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일본 야요이시대의 건물로 기둥으로 쓰던 삼나무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 나무의 나이테를 통해 기원전 52년에 벌채한 나무임을 밝혀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금동 지상건물과 비교하면 몇백 년의 시간차이는 있지만 형태나 성격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이케가미소네 유적의 지상건물 앞쪽에 우물이 있는 점,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이나 정황 등을 근거로 야요이시대 신전으로 추측하고 있다. 한반도 남부에서 청동기시대의 신전을 만들던 전통이 일본 야요이시대에 영향을 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청동기시대의 의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사람은 행운을 기대한다. 사냥을 하는 이는 큰 짐승을 손쉽게 잡기를 기원하고, 채집을 하는 이는 산삼과 같은 귀한 약재를 찾기 바라며, 농사를 짓는 이는 올해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로 석기시대의 수렵-채집민들은 오늘 하루도 많은 양의 음식을 구해 가족이 잘 먹을 수 있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그 식량의 보존기간은 길어봐야 한두 달 정도일 것이다. 이에 반해 농경을 중심으로 생계 경제가 재편된 청동기시대에는 일년 주기로 식량을 생산했기 때문에, 한두 달짜리 풍요가 아니라 올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즉 한 해 단위의 기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음식물과 기원 단위의 차이를 뛰어넘어, 한 해 농사를 좌우하는 계절의 변화와 날씨 등에도 관심을 갖게 하고, 나아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우주관과 세계관과 같은 정신세계까지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작물의 파종에서부터 수확까지의 과정은 달력이나 시계가 없는 이들에게 어떠한 기준점을 마련하도록 요구했고, 그 기준은 계절의 변화나 달의 모양 등이 근거가 되었다.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차오르던 달이 갑자기 줄어든다면 엄청난 재앙이 올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나는 일식이나 월식은 조선시대까지도 국가의 중요 관심사였다. 이렇게 천문에 대한 관심은, 계절의 순환과 같은 시간의 흐름에 관련되어 주목받았다. 천문은 바다길과도 관련되는데,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까지 어둠 속 먼바다에서 길을 안내해줄 수 있는 것은 하늘에 무수히 많이 뿌려진 별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석기시대에도 천문과 같은 시간의 흐름에 관심을 가졌겠지만, 일 년 단위의 도박과 같은 농경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 절대자에게 가까운 곳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절대자도 다양해서 조상신을 비롯하여 해나 달, 비와 바람 등 다양한 농경신에 대한 의례는 마을 가운데 신전의 건립과 같은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5 다양한 의례

청동기시대의 의례를 모두 알 수 없지만, 사천 이금동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에서의 청동기시대 의례는 장송의례, 조상신에 대한 제사, 농경의례 등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장송의례는 이금동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생활공간인 이승에서의 삶을 마친 이들을 죽음의 공간인 무덤으로 안치하는 것이다. 지금의 장례와 같은 것으로 아마도 마을에서 운구한 시신을 61호 지상건물에 모시고 제사를 지낸 뒤, 무덤에 안치하는 일련의 행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묻힌 이들은 조상신이 되어 후손들을 돌봐준다는 믿음으로 61호 건물지에서는 매년 선조들을 위한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농경의례는 풍년을 기원하는 것으로, 생활공간이나 경작지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인근의 진주 대평리 어은 1지구의 밭과 집자리 주변 곳곳에서는 농경의례와 관련되는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밭의 내부에서 토기와 각종의 석기, 새부리와 같은 모양을 흙으로 빚어 만들거나 돌로 만든 것이 출토되었다. 특히 밭의 곳곳에서는 이러한 새부리 모양의 유물들을 모아놓은 것도 확인되었다. 같은 것이 집자리의 주변에서도 출토되기 때문에, 경작지나 집자리 주변에서도 이를 이용한 의례를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새부리 모양의 도구는 회령 오동, 무산 범의구석 유적 등 한반도 동북부에서 자주 확인되며 중국 산동의 신석기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태안(泰安) 대문구(大汶口) 유적에서도 출토되어 농경의 유입경로를 파악하는 귀중한 흔적으로 논의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청동기시대에는 집을 짓기 전에 땅에 공헌물을 올린 흔적이라던가, 화덕 자리에 귀중한 유물을 넣어두는 사례, 도랑이나 구덩이 속에 다양한 유물이 불에 탄 흔적과 함께 출토되는 사례가 울산 검단리, 진주 대평리 유적 등지에서 확인된다.

의례의 장소도 마을에 한정되지 않는다. 부천 고강동 유적은 산의 정상에 돌무지가 있고 그 주위를 여러 개의 도랑으로 둘러 쌌는데, 산의 정상에서 산정의례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령 양전동이나 안화리, 영일 칠포리, 영주 가흥동, 남원 대곡리, 경주 석장리 등지에서 확인되는 대쪽모양 청동기와 같은 형태의 바위그림은 신이나 사람의 얼굴로 추정되고 있는데, 주로 강변이나 산속 깊은 곳에서 발견되어 그곳이 의례와 관련된 특별한 장소임을 암시한다. 이외에도 청도 예전동 유적은 산 경사면의, 무덤이 아닌 돌무지 속에서 청동칼이 출토되고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기원을 하였던 의례의 흔적으로 생각된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삶은 언제나 불확실성의 연속으로 다양한 영적 전통과 함께한다. 이런 불확실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의례를 치렀고, 일상에서 다양한 부적이나 무늬로 대표되는 상징으로 불운을 막아냈으며, 희생을 통해 불행이 비켜나가길 바랬다. 그 흔적은 찾기 어렵지만 우리 주변에 아주 조금씩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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