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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퇀산[西團山] 문화

예맥족이 세운 부여의 기층문화

미상

시퇀산[西團山] 문화 대표 이미지

시퇀산 유적 전경 및 표지석, 시퇀산 문화의 청동기

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중국 동북지역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문화 가운데 하나이며, 한국사 상의 두 번째 국가인 부여가 성립될 수 있었던 기층문화이다. 1948년 둥베이(東北)대학 조사단이 제2쑹화장[松花江] 연안에 위치한 지린[吉林] 시퇀산 유적을 발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새로운 문화 유형으로 설정되었다.

2 시퇀산 문화의 조사와 범위

지린을 중심으로 한 시퇀산 문화 관련 유적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이루어져 왔지만 본격적인 조사와 연구는 194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리워신[李文信], 퉁주천[佟柱巨] 등 중국 연구자들이 진행하였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관련 유적들에 대한 집중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시퇀산 문화’의 명명, 분포 범위, 문화 성격, 청동기시대에 형성되었다는 연대 문제에 관한 것 등 주로 기초 연구가 이루어졌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지린 지역 이외에 그 주변지역으로 확대 조사가 실시되면서 시퇀산 문화의 중요 요소인 무덤의 구조와 형식, 껴묻거리, 묻힌 사람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생업경제에 관한 것까지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연구 성과의 결과로 시퇀산 문화의 분포 범위는 다음과 같이 설정할 수 있다. 동쪽으로는 장광차이링[張廣才嶺]과 웨이후링[威虎嶺] 서쪽, 서쪽은 이퉁허[伊通河]와 둥랴오허東遼河] 유역, 남쪽은 혼허[渾河]와 둥랴오허 유역, 북쪽은 라린허[拉林河] 유역 중·상류 지역을 포함한다. 특히 지린과 용지[永吉] 지역에서 많은 유적이 조사되었으며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제2쑹화장과 인마허[飮馬河], 후이파허[輝發河]의 가장자리인 대체로 해발 300m 안팎의 평야지대나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지금까지 시퇀산 문화와 연관 있는 유적은 430여 곳에서 조사되었으며 그 가운데 120여 곳이 발굴되었는데 대부분 무덤 유적이다. 이러한 많은 유적 가운데 지린 시퇀산 유적·허우스산[猴石山] 유적·창서산[長蛇山] 유적과 용지 싱싱사오[星星哨] 유적이 대표적이다.

3 시퇀산 문화의 대표 유적들

시퇀산 유적은 지린시 서남쪽에 있는 제2쑹화장 언저리의 시퇀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 지금까지 돌널무덤 49기(基)와 집터 3기가 발굴되었다.

돌널무덤은 산기슭을 따라 2~3m 간격으로 줄을 지어 나란히 분포한다. 무덤방의 긴 방향은 등고선과 마주하며, 묻힌 사람의 머리 방향은 산꼭대기 쪽(북쪽)이다. 무덤방은 판자돌을 세워 만든 것과 막돌[割石]을 쌓은 것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으며, 무덤방 옆에 딸린널[副棺]을 설치한 것도 조사되었다. 이러한 딸린널의 쓰임새는 껴묻거리를 놓기 위한 것으로 주로 항아리 등 토기가 찾아졌다. 무덤방의 크기는 어린이가 묻힌 것으로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도 있지만 대체로 130~200×30~60×30~60㎝이다.

묻기는 바로펴묻기[伸展葬]가 대부분이지만 굽혀묻기[屈身葬]도 있다. 껴묻거리는 단지[壺], 항아리[罐], 바리[鉢] 등의 토기, 흙가락바퀴[土製 紡錘車]와 그물추[魚網錘], 돌도끼[石斧], 돌화살촉[石鏃], 돌칼[石刀], 돌그물추[石製 魚網錘]와 가락바퀴[石製 紡錘車] 그리고 돌대롱[石管] 등이 찾아졌다. 또한 무덤방 안의 쌓임층이나 뚜껑돌 위에 돼지 이빨 또는 아래턱이 놓여 있는 경우도 조사되었다.

집터는 무덤 옆에서 3기가 조사되었는데 등고선과 나란한 모습이다. 집터 사이의 거리는 480㎝로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움을 조금 판 반지하식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길이 500㎝, 깊이 43㎝쯤 된다. 바닥에는 불탄 흙과 재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재 주거지로 판단된다. 집 안에서는 돌창[石矛], 돌칼[石刀], 토기조각들이 찾아졌다.

시퇀산 유적은 청동기가 출토되지 않고 뗀석기가 있다는 점에서 시퇀산 문화의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허우스산 유적은 지린시 북쪽 교외의 제2쑹화장과 망뉴허[牤牛河]가 합류하는 지점의 허우스산 남쪽 끝의 구릉 기슭에 위치한다. 구릉 기슭에는 인위적으로 만든 계단성 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이른 시기부터 늦은 시기까지 시기를 달리 하는 집터 20기, 무덤 163기, 재 구덩(灰坑) 6기가 발굴되었다.

집터는 전기와 후기 문화층에서 조사되었고 무덤은 중기와 후기 문화층에서 발굴되었다. 집터는 유적이 입지한 곳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L’자 모양으로 판 다음 가장자리는 돌아가면서 막돌을 쌓아 벽체를 만들었다. 평면 생김새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전기는 둥근꼴이나 타원형으로 지하식이지만 늦은 후기 것은 반지하식이면서 긴 네모꼴이다. 집터 안에서 발굴된 화덕자리는 대부분 한 쪽으로 조금 치우쳐 위치하며 돌을 돌려서 만든 돌두름식[圍石式]이다.

무덤은 막돌을 쌓아서 만든 돌널무덤이며 딸린널은 없다. 늦은 시기에 해당하여 이른 시기와는 달리 전형성을 찾기 어렵고 여러 가지의 구조 변화가 조사되었다.

허우스산 유적의 돌널무덤은 서로 겹쳐 있는 것이 발굴되어 무덤 사이의 선후 관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무덤의 축조는 구릉의 아래쪽에서 시작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꼭대기 쪽으로 점차 옮겨간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돌널 안에 진흙 띠가 돌려져 있는데 이것은 나무틀[木框]을 고정시키기 위한 당시 사회의 무덤 축조 방식의 하나로 이해된다. 무덤방은 바닥에 고운 진흙을 깐 다음 다짐한 상태고 벽은 다음 시기의 움무덤으로 변화되는 과도기적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정황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무덤방의 긴 벽은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흙벽이고 짧은 벽만 넓적한 판자돌을 1매 세워 놓거나 막돌을 쌓은 모습이다.

돌널무덤에서 찾아진 껴묻거리는 돌도끼, 돌자귀, 돌화살촉 등의 석기와 단지, 잔[盂], 세 발 솥[鼎], 바리, 항아리 등의 토기이다. 흙으로 만든 그물추와 가락바퀴도 발굴되었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많은 청동 유물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청동기로는 비파형동검과 투겁창[琵琶形 靑銅 劍矛], 부채꼴 청동도끼[扇形 銅斧], 청동 손칼[刀子], 청동 단추[銅泡], 작은 청동 거울[靑銅小鏡], 갈고리 모양 꾸미개[句形飾] 등이 있다.

이밖에도 돼지 이빨로 만든 치레걸이, 돌대롱, 돌귀걸이, 옥구슬 등 다양한 꾸미개도 찾아져 당시 사람들의 치장에 대한 욕구도 엿볼 수 있다.

허우스산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2275±70bp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값의 기준을 나타내는 것으로 지금부터 몇 년 전이라는 뜻이다. bp(before the present)는 국제 규약에 따라 1950년을 기준으로 한다, 2340±90bp로 밝혀졌다. 창서산 유적은 지린시 외곽지대에 있는 창서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 허우스산 유적과 약 2㎞ 거리에 있으며 주변에는 망뉴허와 제2쑹화장이 흐른다. 이 유적에서는 집터 15기, 재 구덩 17기, 돌널무덤과 움무덤이 각각 2기씩 발굴되었다.

집터는 구릉 꼭대기에 위치하며 3~5m 간격을 두고 한 줄로 분포한다. 반지하식인 집터의 평면 생김새는 모 줄인 네모꼴로 600~700×400~500×70~140㎝ 크기이고 돌을 쌓아 벽체를 만들었다. 집 안에서는 돌을 돌려 만든 화덕, 벽가 옆의 저장 구덩, 나들이 시설 등이 조사되었다.

움무덤은 긴 네모꼴로 바닥에 머리 크기만한 돌들이 깔려 있었으며 청동 투겁창, 마노제 대롱구슬이 찾아졌다.

싱싱사오 유적은 용지현에 있는 싱싱사오댐 옆의 낮은 산기슭에 위치한다. 1975년 수몰되어 있던 유적이 드러나면서 그 주변지역과 함께 조사되었다. 1.5㎞ 범위에서 86기의 돌널무덤이 발굴된 여러 정황으로 보아 집단의 공동묘지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돌널무덤은 판자돌과 막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크기는 160~180×30~50×50㎝이다. 묻힌 사람의 머리 방향은 대체로 등고선과 직교하는 남북쪽이다.

껴묻거리는 시퇀산 문화에 속하는 다른 무덤들보다 다양하고 많이 찾아졌다. 토기는 가는 모래가 섞인 바탕흙을 사용하여 손으로 빚었으며 무늬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종류는 항아리, 단지, 바리, 사발 등이 있으며, 껴묻기 위하여 만든 명기(冥器)가 있어 주목된다. 석기는 돌칼, 돌도끼, 돌자귀, 돌끌, 가락바퀴가 조사되었고 비파형동검, 청동 투겁창, 청동 단추도 껴묻기 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나무빗[木梳], 모직물 등이 발굴되었다.

4 시퇀산 문화를 보여주는 집터와 무덤

집터는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25여 곳에서 발굴되었는데 시기에 따라 입지·구조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른 시기에는 주로 강 언저리의 산기슭이나 구릉 중턱에 입지하며 반지하식이 대부분이다. 평면은 모 줄인 네모꼴이나 긴 네모꼴이 많고 산기슭 쪽의 벽에는 돌을 쌓아 벽체를 만들었다. 바닥은 고운 흙을 깐 다음 불 다짐을 하였고 화덕자리는 돌두름식이다.

늦은 시기의 집터는 강안 충적대지의 평지에 위치하며 집 안에는 화덕의 수가 증가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 특이한 점은 집 안에서 세 발 솥 항아리의 다리를 없앤 토기를 사용하여 어린 아이를 묻었던 움무덤이 용지 양툰[楊屯] 다하이멍[大海猛] 유적에서 찾아진 것이다.

무덤은 시퇀산 문화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입지 조건은 대부분 나지막한 구릉의 기슭을 평평하게 조성한 다음 축조하였지만, 지린 투청쯔[土城子] 유적처럼 강 언저리의 평지나, 용지 사오다거우[騷達溝] 산딩다관(山頂大棺)과 같이 산꼭대기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분포 모습을 보면 거의가 10여 기 안팎이지만 허우스산 유적은 드물게 170여 기나 발굴되었다.

이러한 무덤의 구조는 이른 시기에는 판자돌을 가지고 만든 돌널무덤에서 출발하여 점차 판자돌과 막돌을 섞어 축조하면서, 늦은 시기가 되면 움무덤이나 독무덤도 함께 유행하게 된다. 무덤의 크기는 150~260×30~100×20~90㎝ 정도 되며 홑무덤[單葬]이면서 바로 펴묻기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용지 샤오청쯔[小城子] 유적의 돌널무덤처럼 모자(母子) 관계로 보이는 50대 어른 여성과 영아가 같이 묻힌 경우도 있다.

무덤의 껴묻거리는 이른 시기에 주로 살림살이에 쓴 연모가 껴묻기 되었지만 늦은 시기에는 치레걸이를 비롯한 꾸미개가 많이 찾아졌다.

5 시퇀산 문화 사람들의 경제 생활

시퇀산 문화의 생업경제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농경과 관련있는 연모가 상당히 많이 찾아지는 것으로 보아 농경을 바탕으로 이어 사냥과 채집, 물고기 잡이가 있었던 것 같다. 이른 시기에 개간과 관련된 돌도끼가 제법 많이 나오고 작물을 수확하는데 사용된 여러 가지의 돌칼도 조사되어 농경이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농경과 관련된 기장이나 야생 풀씨가 발굴되었고 물고기 잡이 찔개살, 순화 단계의 많은 돼지뼈도 찾아져 복합 생업경제 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늦은 시기가 되면서 농경과 목축이 점차 발전하여 사냥이나 채집에 대한 의존도는 낮아지게 되며, 특히 돼지의 가축화가 눈에 띄게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탄화된 조, 콩, 호두, 대마 등의 다양한 작물이 조사됨과 동시에 청동기 제작, 무덤의 대형화 등 사회 발전 과정도 다원화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농경 위주의 사회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6 시퇀산 문화의 출토 유물과 연대

시퇀산 문화 관련 유물은 토기, 석기, 청동기, 뼈 유물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토기는 굵은 모래가 섞인 찰흙을 바탕흙으로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대부분 갈색을 띠며 겉면은 간 흔적이 관찰된다. 종류는 항아리, 단지, 세 발 솥, 바리, 잔 등 다양하며 단지는 크게 2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아가리가 넓고 몸통의 최대 지름이 아래쪽에 있으며 가로 방향의 손잡이가 있는 것이고 다른 것은 목이 길고 아가리가 조금 오므라든 모습이다. 특히 앞의 토기가 주변지역인 타이즈허[太子河]나 혼허[渾河] 유역에서 찾아지는 미송리형 토기와 비슷한 점이 많아 주목된다.

석기는 대부분 갈아서 만들었는데 돌도끼, 돌끌, 돌자귀, 돌칼, 돌화살촉 등이 있다. 화살촉은 드물게 몸통 아래 끝 양쪽이 날개처럼 벌어진 것도 있으며 돌칼은 반달 모양, 배 모양, 긴 네모꼴 등 다양하다.

청동기로 시퇀산 문화의 시기와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었는데 손칼, 송곳, 도끼, 끌 등 연모가 많으며, 무기로는 투겁창, 동검, 화살촉 등이 있다. 투겁창의 날은 곧은 것과 굽은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굽은 날 투겁창은 비파형동검과 함께 중국 동북지역 청동기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또한 거푸집[鎔范]이 찾아지고 있어 직접 청동기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뼈 유물은 멧돼지 이빨로 만든 치레걸이와 뼈송곳이 있고 죽은 사람의 얼굴을 덮은 것으로 보이는 모직물 수건이 찾아졌다. 시퇀산 문화의 존재 시기에 대하여는 국내·외 여러 연구자들의 견해가 있지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른 시기는 싱싱사오 유적의 무덤 연대 측정값이 3055±100bp로 나왔는데 이것을 나무 나이테 연대값으로 다시 계산하면 3225±160bp쯤 된다. 그리고 창서산 유적의 집터는 2340±75bp, 양툰 다하이밍 유적은 2165±75bp로 밝혀졌다. 이러한 연대 측정값을 기준으로 보면 시퇀산 문화는 서기전 13세기쯤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서기전 3세기쯤에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면서 저물게 된 것으로 보인다.

7 우리 역사에서 시퇀산 문화의 의미

한국 청동기문화의 표상인 비파형동검 문화의 성격을 지닌 동검과 투겁창, 부채꼴 도끼 등의 청동기, 미송리형 토기와 비슷한 단지가 시퇀산 문화에서 발굴되었다. 또한 이 문화 후기의 파오쯔옌젠산[泡子沿前山] 유적에 대한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그 성격이 초기 부여 유적으로 밝혀진 런슈 라오허신[棆樹 老河深]과 같아 주목된다.

시퇀산 문화의 중심지역인 송화강 유역은 예맥족이 초기 국가인 부여를 세운 곳이다. 이런 점에서 시퇀산 문화를 부여의 정체성과 복원에 토대가 되는 기층문화로 볼 수 있다. 부여는 초기 한민족의 형성 과정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및 발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사에 있어 그 의미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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