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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형동검

한반도 선사(先史) 문화를 상징하는 유물

미상

세형동검 대표 이미지

한국식 동검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세형동검은 한반도에서만 주로 출토되고 있는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초기 철기시대까지 제작된 동검으로서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어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부른다. 유물 대부분이 청천강 이남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지역과 일본 규슈[九州] 지역의 야요이 시대[彌生時代] 독무덤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보통 검신의 길이는 40㎝ 미만이며 너비는 4~5㎝ 정도이다. 이보다 앞선 시기 유물인 비파형동검의 특징을 계승하면서도 풍만했던 검신 아랫부분이 직선에 가깝게 가늘어지는 특징을 지닌다. 주로 청동기시대 후기 및 초기 철기시대 무덤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세형동검을 제작할 때 사용된 거푸집이 영암, 개천 용흥리, 용인 초부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2 세형동검의 형태와 특징

한국 청동기시대 동검은 전기의 비파형동검[요령식동검]과 후기의 세형동검으로 나눌 수 있다.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역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서 잘 알려진 비파형동검은 한반도에서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 4~3세기 무렵부터는 이러한 비파형동검의 주요 특징을 계승한 세형동검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출현하게 된다. 세형동검은 오늘날 평양 지역을 핵심 출토지로 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기 때문에 한국형 동검으로도 불린다. 주로 청동기시대 후기 및 초기 철기시대 무덤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보통 잔무늬거울[精文式細文鏡]이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세형동검을 제작할 때 사용된 거푸집이 영암, 개천 용흥리, 용인 초부리 등지에서 발견된 바 있다. 한편, 최근에는 선양[瀋陽] 정가와자(鄭家窪子) 유적 등 중국 랴오둥[遼東] 일대서 한반도 세형동검의 조형(祖形)으로 보이는 초기 형태의 세형동검 출토가 보고 있다.

이러한 세형동검은 비파형동검의 주요 특징을 계승하면서도 검신의 하반부가 길어지고 칼자루가 없으며 검신 양쪽의 풍만한 곡선이 형식상으로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보통 검신의 길이는 30㎝ 안팎이며, 너비는 4~5㎝ 정도이다. 슴베의 길이는 2~3㎝ 정도 된다. 비파형동검에서 검신 양쪽으로 확인되는 돌기가 없고, 몸통 아래쪽도 직선에 가깝게 가늘며, 등날 양쪽에는 피홈과 마디가 있다. 검신 한가운데에 다각형의 줄무늬가 있다. 또한, 세형동검의 몸통 가운데에는 굵은 허리가 있어 비파형동검이나 중국식 동검·오르도스 동검과 그 모양이 확연히 구별된다. 그리고 슴베 부위도 비파형동검에 비해 매우 짧아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세형동검의 형식은 대체로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검신의 중심부에 동물의 등뼈처럼 위로부터 볼록 솟아 내려오는 등대[背脊]가 가운데 지점 마디에서 끝나는 Ⅰ식이 있고, 슴베 바로 위까지 더 내려오는 Ⅱ식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Ⅰ식이 Ⅱ식에 선행하는 고식(古式)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Ⅰ식은 서기전 4세기 말∼서기전 3세기 초·2세기 중엽, Ⅱ식은 서기전 2세기 후반∼서기 1세기 말경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Ⅰ식 단계의 검은 기능상 실용적이나 백동질(白銅質)이어서 부러지기 쉽다는 약점을 지닌다. Ⅱ식 단계의 검은 칼끝[鋒部]이 길고 의기적인 칼집 장식과 마형(馬形)·안테나식[鳥形] 등의 칼자루 장식이 나타난다. 이 검은 신분을 상징하는 위세품 혹은 의기(儀器)적인 성격이 강한 유물로 추측되고 있다.

3 세형동검의 기원 : 자생설과 전파설

세형동검이 가장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지역은 역시 한반도이고, 그 전형적인 형식도 한반도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세형동검을 ‘한국식 동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근래 중국 랴오둥 지역 일대에서 이러한 세형동검의 조형(祖形)으로 보이는 초기 형식의 세형동검이 보고되고 있다. 예컨대, 중국 다롄[大連] 윤가촌(尹家村) 2기 문화 유적에서 나온 청동 단검은 이미 검 끝이 길고 날이 직선형으로 변하며 T자형 칼자루가 보여 비파형 동검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러한 초기 세형동검은 뤼순[旅順] 목양성(牧羊城) 일대에서도 2점이 확인되었고 다롄[大連] 일대에서도 다수 출토되고 있으며 랴오양[遼陽] 양갑산(亮甲山)과 선양 정가와자에서도 출토되고 바 있다.

물론 세형동검이 랴오둥 지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각각 형태를 달리하며 발전하였을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세형동검의 출현 시기가 대략 기원전 3세기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는 반면, 랴오둥 지역 일대에서는 기원전 5~4세기에 이미 검신이 좁은 초기 형태의 세형동검이 출현하고 있어 시기적으로 선후 관계가 성립하고 있다. 이러한 랴오둥 지역의 세형동검과 한반도 지역 세형동검의 선후 관계는 랴오둥 지역에서 출현한 초기 형태의 세형동검이 랴오시[遼西] 지역이 아니라 동쪽으로 확산하여 한반도로 유입·발전하였음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세형동검이 한반도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하였으며 그 분포 범위도 청천강을 경계로 한다는 견해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하지만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한반도 서북 지방에서 더욱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어, 비파형동검이 한반도 안에서 세형동검으로 변화·발전하였을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평양이나 평남 성천 및 양평 상자포리 등지에서 출토된 동검의 경우 전형적인 세형동검 이전 단계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런 점을 통해 볼 때, 세형동검의 출현은 랴오둥 지역에서부터 그 태동을 확인할 수 있으나, 본격적으로 발전·전형화되는 과정은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전개된 것으로 이해된다. 세형동검이 이와 같은 고고학적 양상을 보이는 데에는 당시 고조선 사회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 바로 고조선과 연(燕)나라의 전쟁이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4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과 세형동검 문화

의견이 분분하지만 비파형동검 문화를 문화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당시 고조선의 중심지는 단경식(短莖式) 비파형동검과 미송리형 토기, 지석묘의 분포 양상을 통해 볼 때, 대개 랴오둥 지역 어느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랴오둥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던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 말~3세기 초 연(燕)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기게 된다. 이때의 사건을 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위략(魏略)
옛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 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 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逆擊)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은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조

그리고 이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전후로 하여 후기 고조선과 위만조선 의 중심지가 자리하였던 평양을 중심으로 대동강 유역에서는 세형동검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연의 침공을 받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겼던 고조선은 평양으로 중심지를 옮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평양 지역을 중심지로 하였던 고조선과 위만조선(衛滿朝鮮) 시대의 문화는 세형동검 문화를 기반으로 하였다고 인정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랴오둥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초기 형태의 세형동검이 한반도 청천강 이남에서 전형화를 이루며 발전하였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평양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긴 고조선은 비파형동검의 전통을 이었으나 그 고유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세형동검 문화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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