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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집과 마을

정착 생활의 터전과 건축 기술의 발달

미상

신석기 시대 집과 마을 대표 이미지

파주 대능리 유적(신석기 시대 주거지 배치 모습)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국립문화재연구소)

1 개요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의식주는 가장 중요하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중에서 주거는 인간이 일정한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는 터전으로, 움집 같은 건축물뿐만 아니라 동굴과 같은 자연물을 이용한 경우도 포함한다. 인간 생활을 추위와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최소 단위인 주거는 다양한 자연환경에 대처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기본적인 장이 된다.

집자리는 폐기된 상태로 확인되기 때문에 그 구조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여러 유적에서 확인된 남아있는 양상들을 통해 가옥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확인되는 정형화된 주거 시설은 신석기 시대부터 등장하였다. 이는 먹을거리를 찾아 이동 생활을 하던 구석기인들과 달리, 신석기인들은 초보적인 농경을 통해 정착 생활이 이루어지면서 튼튼한 주거 시설이 필요하였고, 도구의 발달에 따른 움집의 구조가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집자리와 마을은 문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선사시대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2 신석기 시대 집자리의 특징

신석기 시대 움집의 구조는 상부와 하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상부 구조에는 집의 벽과 지붕이 있으며, 하부 구조로는 집터(움, 竪穴)와 내부 시설(화덕자리, 저장구덩이, 기둥구멍 등) 등이 확인된다. 집자리의 평면 형태와 규모는 집을 짓는 건축기술과도 관련 있으나, 지붕 구조를 복원할 수 있는 자료가 잘 남아 있지 않아 당시의 지붕 구조를 복원하기에는 많은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방형이나 원형보다는 장방형의 평면 구조가 벽이나 지붕의 구조를 만드는 방식에 있어 좀 더 발전된 건축 기술이 필요로 하며, 집의 내부 공간 활용에 있어서도 더 효율적이므로 보다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집자리 내부 시설 중 화덕자리는 음식물 조리, 난방 시설, 조명 시설 등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시설이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신석기 시대 집자리의 화덕자리는 돌두름식과 구덩식이 대부분이며, 일부에서는 집자리 바닥에 직접 불을 땐 경우와 돌무지식이 확인되고 있다.

기둥 구멍은 집자리의 상부 구조(지붕)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집자리 내부의 네 모서리에 배치되는 경우(4주식), 벽 가를 따라 배치되는 경우, 집자리 내부에서 원형 배열을 이루는 경우, 외부에 위치하는 경우 등이 있으며, 보조 기둥 혹은 칸막이 기둥도 확인되고 있다. 바닥처리는 생토를 그대로 사용한 경우와 점토 다짐을 한 경우가 있으며, 일부에서는 불을 놓아 바닥을 다진 집자리도 확인된다. 출입구 시설은 집자리의 평면상 확인이 어렵지만, 대개 계단식 혹은 경사진 구조를 띤다. 또한 돌출된 구조의 출입구 시설도 확인되는데, 돌출된 부분의 형태는 반원형 혹은 길게 뻗은 복도식이다. 이 밖에도 선반 시설 혹은 저장 시설 등의 내부 시설 등이 확인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 집자리는 지역과 시기에 따른 특징 및 변화 양상이 확인된다. 여기에서는 남한 지역 중 집자리 유적이 많이 조사되어 지역과 시기에 따른 특징이 잘 드러나는 중부(서해안, 내륙) 지역과 충청 내륙 지역, 남부 내륙 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중부 내륙 지역의 신석기 시대 집자리 규모는 시기와 관계없이 한 변의 길이(지름)가 4∼6m 내외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집자리의 내부 시설 중 화덕자리는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암사동과 삼거리 유적에서는 모두 돌두름식의 구조이며,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유적에서는 구덩식의 구조를 띠고 있어, 시기에 따른 화덕자리의 구조 변화가 나타난다. 그러나 늦은 시기의 남양주 호평동 지새울 유적과 파주 당동리 유적에서는 구덩식, 돌두름식, 돌무지식의 각기 다른 구조의 화덕자리가 확인되기도 한다. 그밖에 암사동 유적에서는 토기를 거꾸로 박아 만든 저장움이 확인되는데, 이러한 저장움의 성격에 대해서는 낟알을 저장하거나, 도구를 저장하던 장소로 보고 있다.

중부 서해안 지역의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운서동 유적의 집자리는 대부분 방형의 형태를 띤다. 집자리의 규모는 한 변의 길이(지름)가 4∼6m로, 중기의 집자리보다 상대적으로 큰 편에 속한다. 화덕자리는 구덩식으로 집자리의 중앙에 위치하며, 기둥 구멍은 4주식이 기본 배치를 이루며, 일부 벽가 배열 양상도 보인다. 출입구 시설이 확인된 집자리에서는 돌출 구조를 띤다. 집자리의 내부 공간을 확장한 듯 한 단시설이 대부분의 집자리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구조로 중부 서해안 지역의 이른 시기 혹은 운서동 유적의 특징적인 양상이다. 중기에 해당하는 집자리는 방형의 평면 형태에 4주식 혹은 4주식에 보조 기둥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를 띠며, 화덕자리는 집자리 내부의 중앙에 아무런 시설도 하지 않은 구덩식이다. 집자리의 규모도 한 변의 길이(지름)가 3∼5m 내외로 대부분 중소형에 해당한다. 이러한 특징은 중부 서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적인 분포 양상을 보이고 있다. 늦은 시기의 집자리는 앞 시기에 방형이 주류를 이루던 것과는 달리 방형, 원형, 장방형 등 다양한 형태를 띠며, 규모는 한 변의 길이(지름)가 3∼5m 내외의 중소형과 6∼9m 내외의 중대형이 함께 확인된다. 화덕자리는 구덩식과 돌두름식이 모두 확인되나, 일부 구덩식과 돌두름식 화덕자리가 동시에 확인된 집자리에서 구덩식이 돌두름식 구조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중부 서해안 지역의 신석기 시대 집자리의 화덕자리는 구덩식에서 돌두름식으로 변화해갔음을 알 수 있다.

충청 내륙 지역의 신석기 시대 집자리는 대부분 중기에 해당하는 유적들이며, 집자리의 구조와 입지 및 내부 공간 활용에 있어 많은 공통점이 확인된다. 충청 내륙 지역 집자리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며, 규모는 길이 7∼10m 내외로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큰 편이다. 또한 내부 시설 중 화덕자리는 구덩식이며, 집자리의 중앙(생활공간)에 위치한다. 이 밖에 집자리의 길이 방향이 등고선의 흐름과 나란하며, 돌출된 출입구 시설, 집자리 내부를 화덕자리 중심의 생활 공간과 부속 공간으로 구분하여 사용하는 특징과 함께 구릉상에 1기 혹은 2기만이 존재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특징의 집자리들은 ‘대천리식 집자리’로 불린다.

남부 내륙 지역은 시기에 따라 집자리의 평면 형태에 있어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데, 중기에 해당하는 집자리는 장방형이 대부분이고, 늦은 시기의 유적에서는 원형이 주류를 이룬다. 집자리의 규모는 중기의 김천 송죽리나 진주 상촌리 유적에서는 한 변의 길이가 7∼10m 내외이며, 늦은 시기의 봉계리나 임불리 유적은 3∼5m 내외의 규모로 중소형에 해당한다. 화덕자리의 위치는 중기에서는 집자리의 중앙에 위치하고 원형인데 반해, 늦은 시기의 집자리에서는 중앙에 위치한 사례와 함께 한쪽으로 얼마간 치우친 경우가 다수 존재한다. 송죽리 유적에서는 집자리 외부에 저장 구덩이가 하나의 세트로 위치하고 있는데, 도토리 저장 구덩이다.

3 신석기 시대 움집의 복원

고고학 발굴 조사로 확인된 신석기 시대 집자리는 과연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신석기 시대 움집의 복원에서 있어, 가장 중요한 지붕 구조를 만드는 방식 변화는 처음 서까래만을 사용한 구조에서 점차 기둥을 사용하는 구조로 발전한다. 기둥만으로 서까래를 지탱하는 구조는 움집의 규모를 확장하는데 많은 구조적인 한계가 따르며, 기둥은 독립적으로 횡력에 대응하기 위해 기둥 구멍을 깊이 파서 세워야 하기 때문에 움집의 구조나 시공에 많은 불리함이 있다. 그러므로 기둥의 배열은 점차 규칙성을 지니게 되며, 지붕의 물매에 맞추어 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하게 된다. 기둥의 규칙적인 배열과 더불어 서까래를 합리적으로 걸기 위해 사용한 수평 부재는 도리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구조적인 견고함과 시공의 편리함을 추구하면서 기둥 상부를 결속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도리가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의 사용에 따라 기둥 상부의 결속력이 강화되었으며, 따라서 기둥 구멍의 깊이는 점차 얕아지게 되었고 원시적인 초석의 사용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움집의 규모는 더욱 확장되고 시공도 그만큼 편리해졌다.

신석기 시대 움집의 상부 구조는 무주식-뿔형에서 보강 기둥식-뿔형, 그리고 기둥식-뿔형으로의 변천 과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둥과 도리의 사용에 따른 구조의 발달은 평면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여 장방형 움집을 짓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지붕의 형태도 맞배지붕이나 우진각 지붕 등으로 다양해졌다.

결국 신석기 시대 움집은 이른 시기에는 원추형 혹은 사각추형의 지붕 구조를 보이다가, 중기에 이르면 지붕의 서까래가 지표에서 떨어지는 구조로의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구조의 변화는 집자리의 입지 변화와 함께 대형 장방형 집자리의 본격적인 등장 혹은 방형의 정형화된 4주식 집자리의 등장과 맞물려 일어난다.

4 신석기 시대 마을의 구조

신석기 시대의 마을 구조는 집자리의 입지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집자리와 마을의 입지는 시기 혹은 지역별로 차이를 보인다. 먼저 중부 내륙 지역의 경우에는 이른 시기의 암사동이나 삼거리 유적처럼 강변의 충적대지에 위치한 반면, 늦은 시기의 호평동 지새울, 신대리, 화접리, 덕송리 유적 등은 강변의 충적대지에서 벗어나 내륙 지역의 구릉사면 혹은 계곡부의 말단부에 입지하는 양상을 보인다. 마을의 입지 변화와 함께 규모도 확연히 구분되는데, 이른 시기에는 대규모 마을을 이루며, 늦은 시기에는 1∼3기의 소규모 마을을 이룬다.

중부 서해안 지역에서는 대부분 나지막한 구릉 지역의 정상부나 사면부에 위치하며, 마을의 규모에 있어서는 2∼5기 정도의 소규모 마을과 대규모 마을로 구분된다. 전자는 대부분 충남 북부의 해안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후자는 경기 남부의 해안 지역에 집중된 양상을 보인다.

중부 동해안 지역은 마을의 입지 변화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지역 중 하나이다. 이 지역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오산리와 문암리 유적은 사구가 시작되는 구릉지와 가까운 지역(대체로 석호 인근)에 확인되는데,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쌍호, 경포호 등 석호 주변의 사구 지대에는 예외 없이 유적이 형성되어 있다. 중기의 가평리, 지경리, 송전리, 초당동, 하시동 유적 등은 사구 지대의 중간이나 이른 시기 유적의 상층에 위치하며, 늦은 시기가 되면 사구 지대를 벗어나 구릉 지역에 입지하고 있어 시기에 따른 집자리의 입지 선정에 변화가 나타난다.

충청 내륙 지역의 대표적인 집자리인 대천리식 집자리와 남부 내륙 지역의 송죽리식 집자리는 동시기 지역에 따른 입지의 차이점이 뚜렷하게 보여준다. 대천리식 집자리는 구릉 지역의 정상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송죽리식 집자리는 강변의 비교적 넓은 충적대지에 형성되어 있다. 마을의 규모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대천리식 집자리는 1기 혹은 2기만이 구릉 지역의 정상부에 존재한 반해, 송죽리식 집자리는 10여기 이상의 집자리가 충적대지에 대규모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남해안 지역에서 조사된 신석기 시대 집자리와 마을 유적은 모두 조개더미 유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다른 지역의 마을과는 입지와 성격을 달리한다. 집자리가 확인된 조개더미 유적의 입지는 집자리의 입지 선택에 있어 비교적 양호한 입지를 보인다. 남해안 지역의 조개더미 유적 중에는 당시 거점 지역으로 역할을 했던 유적이 있을 정도로 오랜 기간 정착 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남해안 지역에서 아직까지 구릉 지역이나 충적대지에 신석기 시대의 마을 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 집은 땅을 파고, 서까래를 땅에 박아 지붕을 만든 암사동 유적공원에 복원된 단순한 구조의 움집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도구의 대부분은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도구들을 보면,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신석기 시대는 건축 도구가 잘 갖춰져 있었으며,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여 집의 면적이 12m×7m에 이르는 초대형의 움집을 비롯하여 맞배지붕이나 우진각 지붕처럼 발전된 구조의 지붕 구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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