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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오산리 유적

신석기인, 석호와 바다를 터전으로 삶다

미상

양양 오산리 유적 대표 이미지

양양 오산리 유적 C지구 집자리 모습

예맥문화재연구원

1 개요

오산리 유적이 위치한 강원 영동 지역은 태백산맥이 동해를 향해 뻗어 내려 있어, 해안을 중심으로 해발 고도 20~30m의 낮은 구릉지가 발달하여 있다. 또한 태백산맥이 동해와 가까이 접해 있기 때문에 작은 하천이 발달하였으며, 수량은 적고 하천의 흐름이 빠른 편이다. 이러한 하천의 하류에는 하천에서 흘러 내려온 모래들이 만의 입구를 막아 석호와 같은 호수들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해안 가까이에는 사구 지대가 발달하였으며, 이 사구 지대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입지를 갖추고 있다.

오산리 유적은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일대에 위치해 있으며, 동해로부터 내륙으로 600m 정도 들어오면, 동에서 서쪽 방향으로 길이 300m, 너비 100m 크기의 오산리 사구가 쌍호(雙湖) 가운데로 돌출되어 있다. 그 사구의 가운데에 남북으로 난 도로를 중심으로 서쪽에 A·B지구가, 도로와 접하여 동쪽에 C지구가 위치한다. 유적의 가운데에 위치한 A지구 사구는 길이 100m, 너비 50m이며, A지구에서 서쪽으로 수로 건너에 위치하는 B지구는 길이 60m, 너비 40m 정도 남아 있다. C지구는 A지구에서 동쪽으로 70m 거리에 도로와 동쪽으로 인접하고 있다. 이 오산리 유적은 강원도 동해안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인정받아 1997년 사적 394호로 지정되었다.

2 오산리 유적의 발굴

1981~1987년에 발굴 조사된 오산리 유적 A, B지구는 당시까지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알려졌다. 이후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유적이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면서, 현재 가장 오래된 유적은 제주 고산리 유적이지만, 2007년 발굴 조사된 오산리 유적 C지구는 우리나라 내륙 지역 신석기 시대 유적 중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6,000년 이전에 형성되었다.

오산리 유적의 층위는 A지구를 보면, 순수 모래층인 6층 위에 신석기 시대층인 5·3·2층, 청동기 시대층인 1층, 비문화층인 4층이 있다. 이 중 5층은 다시 7개의 소층으로 나누어진다. 각 소층의 두께는 30∼60㎝에 달하나, 3층은 30㎝, 2층도 20∼30㎝로 얇다. 신석기 시대층은 크게 3개의 문화층으로 나뉘는데, 집자리가 발견된 제1문화층(5층, 하층)에서는 납작 밑의 토기와 결합식 낚싯바늘이 출토되었다. 6차 발굴까지 유구는 제1문화층에서 집자리 9기와 야외 화덕자리로 보이는 돌무지 유구 2기 등이 조사되었다.

B지구는 A지구와 직접적 비교는 어렵지만, 대체로 1문화층이 5층, 2문화층이 3층, 3문화층이 1층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며, 2·4층은 비문화층이다. B지구 5층에서 야외 화덕자리와 돌무지 유구가, 3층과 1층에서 집자리 1기씩 발굴되었다.

오산리 유적 C지구의 층위는 A·B지구와 달리, 해발 고도 4∼5m 높이에 황갈색점토층(갱신세층)이 형성되어 있다. 이 갱신세층 위에 사구가 6m 정도 형성되어 있으며, 사구의 상층에는 새김무늬토기의 신석기 시대 중기 문화층, 중층에는 덧무늬토기를 포함하는 전기의 문화층, 덧무늬토기와 황갈색 점토층 사이에는 오산리식 토기 문화층이 얇게 형성되어 있으며, 최하층인 황갈색점토층의 상면에서는 순수 무문양토기와 압날점열구획문토기적색마연토기(토기의 표면에 붉은색을 띠는 염료를 사용하여 문지르거나 바른 토기) 중 몸통 부분에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무늬새기개로 도장 찍듯이 눌러 문양을 내거나 토기의 표면 찔러 무늬를 새긴 것으로 수직, 비스듬히, 찌르고 그은 형태의 무늬 새기는 기법을 사용하여 문양을 일정 구획 내에 새긴 토기가 출토되는 조기 문화층이 조사되었다.

오산리 C지구 유적의 발굴 조사 결과 신석기 시대 조기의 집자리 2기, 덧무늬토기가 함께 출토되는 전기의 집자리 4기, 새김무늬토기가 출토된 중기의 집자리 1기, 야외 화덕자리 2기가 조사되었다.

조기의 문화층인 황갈색점토층 상면에서 출토된 무문양토기와 압날점열구획문토기는 점토층 상면에 사구가 형성되기 전의 문화층으로, 제주 고산리 유적의 초창기 토기 다음으로 오래된 문화층으로 조사되었다.

오산리 유적은 동에서 서쪽 방향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황갈색 점토층 상면에 동서 11m, 남북 21m 크기의 한정된 공간에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동쪽 모서리에 위치한 집자리를 중심으로 한 집자리 서쪽 앞으로 지름 8m 정도의 면적에서 집중적으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돌도끼, 결합식 낚싯바늘, 석촉 등의 간석기와 그물추, 몸돌, 격지 등이 주로 나왔고, 소량이지만 작은 돌날, 작은 돌날 몸돌도 출토되어, 이 단계까지 잔석기의 전통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3 오산리식 토기와 다양한 출토 유물

반 이상이 독 형태이며, 그다음으로 바리 형태가 많다. 바리와 독 모두 입술 부분의 안쪽을 비스듬하게 처리하여 단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모두 납작 바닥이다. 초기부터 손잡이가 달리거나 목이 있는 토기들도 많이 나온다.

오산리식 토기의 특징은 무늬가 새겨진 부분이 입술 부분에 국한되어 있는 점이며, 무늬를 새기는 방법으로는 주로 무늬 새기개로 토기 표면을 찔러 무늬를 표현한 방식이 이용되었다. 이러한 무늬 새기는 방식은 무늬 새기개의 끝부분 형태와 누른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입술 가까이부터 무늬를 3~4줄 눌러 찍은 종류가 많은데, 평행으로 된 점 무늬나 짧은 빗금 무늬 및 손톱 무늬가 가장 많다.

한편, 토기 겉면에 덧입힘을 하거나 공들여 문질러서 광택이 나는 토기가 많다는 점에서도 남해안 지역의 토기들과 유사성이 있다. 바탕 흙으로는 가는 모래를 섞은 점토가 주로 쓰였다. 오산리식 토기는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지역성이 강한 토기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오산리식 토기는 우리나라 중동부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덧무늬토기와의 시기적인 선후 관계에 있어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데, 오산리 유적이 위치한 사구의 형성 과정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면서 생긴 문제이다. 오산리 유적의 사구 퇴적층이 침식과 재퇴적의 반복을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유적의 층위가 시간성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입장과, 큰 범위에서의 사구의 퇴적층에 시간성을 반영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오산리 유적 C지구 발굴 조사 결과, 사구의 퇴적층은 시간성이 반영된 결과로 퇴적되었으며, 그 결과에 따라 오산리식 토기와 덧무늬토기의 시기적인 선후 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덧무늬토기는 기존의 연구결과에서 오산리식 토기보다 빠른 것으로 연구되어 왔으나, 오산리 유적의 C지구 발굴 조사 결과 오산리식 토기보다 상층에서 확인되었다. 오산리 유적 C지구의 덧무늬토기 문화층은 다시 상·하층으로 나눌 수 있으며, 방사성탄소 연대도 상층 집자리인 1·2·3호 집자리 모두 기원전 4,610∼4,530년으로 서로 비슷하게 측정치가 나오고, 하층 문화층은 이보다 조금 빠른 기원전 4,800∼4,670년으로 측정되었다. 따라서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층위의 상하 관계와 마찬가지로 탄소 연대의 측정 결과에서도 상층보다는 하층이 조금 빠르게 나와서, 두 층간에 구분이 확인되었다.

오산리 유적 C지구에서 출토된 석기를 보면, 수렵·어로용 석기 비율이 가장 이른 시기 문화층에서부터 중기 시기의 문화층에 이르기까지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유적 내의 생활면 및 화덕자리에서 수습된 뼈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어류는 악상어, 포유류는 노루, 조류는 오리 등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유적 일대에서의 수렵 및 어로를 통한 식량원 획득 과정을 알 수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생활면에서는 370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그물추, 결합식 낚싯바늘, 석촉 등의 수렵·어로용 석기가 211점으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며, 갈판 및 갈돌, 공이와 같이 곡물 가공과 관련된 유물은 6점으로 식량원 획득에 있어 수렵 및 어로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숫돌, 모룻돌, 망치돌, 자르는 도구(찰절구) 등의 석기 제작 도구도 28점이 수습되어, 석기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오산리 유적 이른 시기의 집자리 내에서는 망치돌, 모룻돌 등과 함께 몸돌, 격지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갈돌, 갈판, 공이 등과 찍개, 긁개, 뚜르개, 부리날 등의 뗀석기도 집자리 내에서만 확인되고 있는 특징을 보이는데, 중기의 문화층도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므로 석기의 제작과 식료의 가공이 집자리 내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오산리 유적의 출토 유물 중 주목되는 유물 중 하나가 토우이다. 토우는 인물, 동물, 기물 등의 형태를 토기로 제작하여 구운 작품으로, 선사시대의 유적에서 가끔 출토된다. 오산리 유적 C지구에서는 토우 2점이 출토되었다. 모두 동물형 토우로, 1점은 곰 토우, 다른 1점은 물개 토우로 보인다.

곰 토우는 머리, 귀, 귓구멍, 눈, 콧구멍, 길고 깊게 그은 입 등의 형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곰 토우의 등은 위쪽이 둥글게 처리되어 있고, 엉덩이는 등에서 완만하게 이어진다. 엉덩이에는 항문을 깊게 찔러 표현하였으며, 곰 토우의 길이는 5.2㎝이다. 물개 토우는 전체적으로 유선형으로 만들었으며, 뒷 물갈퀴 한쪽과 머리와 꼬리 부분이 파손되어 형상이 정확하지 않다. 물개 토우의 길이는 5.7㎝이다. 오산리 유적의 A지구에서는 사람 얼굴 모양의 토제품도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동물형 토우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많이 출토되지 않았지만, 신석기 시대의 동물 의례와 관련된 유물로 추정된다.

양양 오산리 유적은 동해안 지역의 자연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기원전 6,000년 전부터 바다와 석호 자원을 활용하여 생업 활동을 한 당시 신석기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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