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양평 상자포리 고인돌

양평 상자포리 고인돌

양평 상자포리 고인돌과 한국식동검문화

미상

양평 상자포리 고인돌 대표 이미지

양평 상자포리 유적 출토 유물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1 개요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 사이의 문화는 아직 통일된 명칭이 없다. 고고학에서는 초기철기-원삼국이라는 시대명을 쓰지만 역사학에서는 삼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며, 학자에 따라서는 철기시대, 고조선시대 등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강에 인접한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팔당댐 건설에 따른 수몰지역에는 탁자식과 개석식 등 다양한 고인돌이 있었다. 대부분 무덤방 주변에 자갈돌을 깔아 무덤의 범위를 표시하고 있었다. 이 중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한 1호 고인돌에서는 한국식 동검과 천하석으로 만든 곡옥이 함께 출토되었다. 대부분 고인돌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데, 이곳에서는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등지의 널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같이 가늘고 날카로운 청동검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양평에서 고인돌을 만들던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난 것일까?

2 상자포리 유적의 발굴

팔당댐 수몰지구의 발굴은 1973년 국립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단국대학교 박물관의 3개 조사단에 의해 실시되었다. 20여 기의 고인돌을 조사했지만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고, 일반적으로 고인돌에는 많은 유물을 부장하지 않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은 많지 않은 편이었다. 고인돌은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 다양한 형태의 것들이 불규칙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고인돌 주변에 돌을 깔아 무덤의 범위를 나타낸 것이 특징이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1호 고인돌이었다. 내부에서 초기 세형동검이라고 할 수 있는 길고 가는 청동검이 출토된 것이다. 또한 4호 고인돌에서 나온 숯의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결과 2170±20 B.P로 측정되었다. B.P.란 현재 이전-Before Present의 줄임말로 1950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1950년을 기준으로 하면 기원전 220±20년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청동검 외에도 사람뼈를 비롯하여 구멍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돌칼, 반달돌칼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이 주로 출토되었다.

3 한국식의 청동기문화

상자포리 1호 고인돌에서 발견된 청동검은 초기철기시대의 시작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초기철기시대에는 한국식 청동기문화가 성행하는데, 이전의 청동기시대와는 차이가 분명하다. 청동기시대의 비파형동검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한반도에 걸친 넓은 지역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그것과 함께 발견되는 청동기는 창, 도끼, 화살촉 등 종류나 양이 많지 않다. 또한 청동기의 형태가 중국 동북지방에서 확인되는 것들과 같아 한반도 독자의 청동기문화를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초기철기시대에는 이전 청동기시대의 것들 외에도 대쪽모양 청동기, 방패모양 청동기, 나팔모양 청동기, 가지방울 등 한반도만의 독자적인 청동기가 제작되며, 중국 동북지방과는 다른 날카로운 청동검과 투겁창, 꺾창 등 다양하고 발전된 무기가 제작된다.

이런 초기철기시대는 점토띠를 아가리에 붙인 덧띠토기문화와 관련된다. 덧띠토기문화에 속하는 유물은 점토띠를 아가리에 붙이 덧띠토기와 흑색으로 표면을 곱게 바른 목이 긴 항아리가 대표적이다. 한반도 평양 신성동 무덤에서는 비파형동검과 함께 흑도나 목긴항아리라고 불리는 검은간토기가 출토되었는데, 한국식 청동기문화와 덧띠토기문화가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한국식 청동기문화가 덧띠토기문화와 함께 중국 동북지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았지만 최근에는 덧띠토기문화와 청동기문화가 별도로 유입되었다는 방향으로 연구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한국식 청동기문화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뉘는데, 성립기, 발전기, 쇠퇴기로 구분한다. 성립기에는 한국식 청동검, 거친무늬거울, 대쪽모양 청동기, 방패모양 청동기, 나팔모양 청동기 등이 출토된다. 여기에 해당하는 유적은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유적이 대표적이다. 특히 예산 동서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검 중 하나는 비파형동검의 형태를 하고 있어 청동검의 변화 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시기의 청동기문화는 중국 심양(瀋陽)정가와자(鄭家窪子) 6512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들과 거의 유사한 조합으로 중국 동북지역의 문화가 한반도로 유입되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이다. 다만 이런 청동기들이 대동강유역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에서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유에선가 해로를 타고 한반도 북부를 건너뛰어 한반도 아산만 일원으로 문화가 유입되었다고 생각된다.

발전기에는 한국식 청동검은 동일하지만 창과 꺾창이라는 새로운 무기체계가 등장한다. 이와 함께 거친무늬거울은 잔무늬거울로 바뀌고, 새롭게 가지방울을 비롯한 다양한 방울들이 출토된다. 여기에 해당하는 유적은 부여 청송리, 화순 대곡리, 함평 초포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잔무늬거울은 우리나라 청동기 중 가장 세밀한 문양을 자랑하는데, 거미줄처럼 촘촘히 새겨진 무늬는 아마도 달력이나 시계와 같이 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직 명확히 해석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방울은 이 시기의 특징적인 청동기인데, 무당과 같은 샤먼의 도구로서 금속이 가진 광택과 소리를 함께 가지고 있는 도구이다. 당시 지배자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해주며, 이전의 청동기들이 고조선으로 대표되는 북방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방울은 한반도 남부에서 자체적으로 발전시킨 의례용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쇠퇴기는 한국식 청동검은 이어지지만 중국 한나라의 청동거울을 위시하여 오수전(五銖錢)과 같은 한나라의 동전, 동물장식 허리띠 등 청동기들이 출토되는 시기이다. 경주 조양동 38호 널무덤, 경산 양지리 1호 널무덤, 창원 다호리 1호 널무덤 등 한반도 동남부에 집중 분포한다. 아마도 고조선의 멸망과 한군현 설치 이후 한반도 남부의 정치색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한국식 청동검이나 청동창, 꺾창 같은 무기는 한국식이지만 거울을 비롯한 나머지의 것들은 중국 한나라의 것을 받아들인다. 즉 초기철기시대의 청동기는 한반도 고유의 한국식 청동기문화로 성립기, 발전기, 쇠퇴기를 거쳐 기원후 2세기 중후엽 이후 철기문화로 완전히 바뀐다.

4 새로운 시대와 과거의 유산

거석문화로 일컬어지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농경사회의 산물이다. 농경을 기반으로 살던 청동기인들은 마을 단위로 사회가 조직되었고, 더 큰 돌을 옮겨 세워 고인돌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기념물은 덮개돌의 크기라는 외형에 치중하여 과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에는 청동검, 돌칼, 붉은간토기, 옥 정도밖에 부장하지 않는다. 이후 사회가 더 복잡해지면서 권력도 더욱 개인에게 집중되게 된다. 무덤의 외형에 대한 과시는 도굴꾼과 같은 이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고, 결국 외형보다는 내부 부장품에 더 많은 공이 들어가는 시대로 바뀌는 것이다. 그것이 초기철기시대의 모습이다.

이전의 청동기시대에는 주로 실용적인 칼, 창, 도끼 같은 것들을 한정적으로 청동기로 제작하였다. 하지만 한국식 청동기문화는 그 시작부터 청동 거울과 같은 비실용적 청동기가 등장 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장신구와 같은 비실용적인 청동기가 일부 존재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단편적이고 연속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다뉴경이라고 불리는 청동거울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본에 걸친 넓은 지역에서, 초기철기시대 한국식 청동기문화의 성립기에서부터 발전기까지 계속적으로 제작되어 사용된다. 더하여 대쪽모양 청동기, 방패모양 청동기, 나팔모양 청동기와 같이 고조선과 마한을 연결하는 의례용구가 가지방울, 간두령 같은 삼한의 의례용구로 변화 발전하게 된다. 결국 청동기시대의 종말과 함께 시작한 초기철기시대는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뒷받침하는 비실용적인 위신재의 등장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고인돌에서 발견되는 청동검은 대부분 비파형동검이지만 상자포리 1호 고인돌과 같이 한국식 청동검이 발견되는 경우도 일부 존재한다. 김해 내동 고인돌이나, 영암 서호 엄길리 고인돌에서는 한국식 청동검이 근처에서 발견되거나, 흔히 한국식 청동검과 함께 확인되는 검은간토기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런 것들은 상자포리 고인돌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무덤에 새로운 시대의 유물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 반대로 새로운 시대의 무덤에 과거의 유물이 들어 있는 사례도 있다. 대표적으로 김해 대성동 57호 널무덤은 새로운 시대의 나무널무덤을 만들었지만 그 안에는 청동기시대의 간돌칼이 출토된다. 아마도 새로운 문화를 지역의 사람들이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반도 서남부의 아산만과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발견되는 대쪽모양 청동기, 방패모양 청동기, 나팔모양 청동기 등은 한반도 북부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중국 심양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의 청동기문화가 바다를 타고 내려와 전해진 것이다. 이런 문화는 기존 청동기문화와 연결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문화의 등장이다. 이렇게 변화한 까닭은 새로운 사람들의 집단 이주와 같은 커다란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상자포리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새로운 초기철기시대의 한국식동검이 결합되어 발견된다.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인 초기철기시대 문화를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선진지역의 변화는 빠르고 크지만, 주변 지역은 느리고 점진적이다. 이런 차이는 지금의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