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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적량동·월내동 유적

여수 적량동 월내동 유적과 비파형동검의 제작지

미상

여수 적량동·월내동 유적 대표 이미지

여수 월내동 고인돌

동북아지석묘연구소

1 개요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은 어디에서 만들었을까? 요령식동검이라고도 불리는 비파형동검은 중국 요령성을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는데, 한반도에서도 80여 점에 달하는 많은 수가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청동검은 한반도에서 만든 것일까? 아니면 중국 동북지역에서 만든 것을 교역을 통해 구한 것일까? 그 해답은 의외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한반도 남단 여수반도에서 찾을 수 있다.

전라남도 여수시 적량동과 월내동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산재해있다. 이곳에서는 비파형동검 12점과 비파형청동투겁창 1점이 출토되었는데, 총 13점의 청동기가 무덤을 달리하여 밀집되어 출토되는 사례는 매우 드문 일로 이 지역에서 비파형동검을 직접 제작하여 한반도 남부에 공급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2 여수 적량동·월내동 유적

전남 여수시 영취산에서 광양만 쪽으로 뻗은 산줄기 사이의 계곡에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적량동에서는 총 14기의 고인돌을 조사하였는데, 원래 자리에 있던 4기에서만 무덤방이 확인되었고 나머지는 옮겨져서 제 위치가 아니었다. 그 외에 큰 상석이 없었던 것인지, 옮겨진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무덤방 26기가 조사되었다. 무덤은 6개의 군으로 구분되는데, 각 군집에 비파형동검이 하나씩 묻혀 있는 점이 특이하다. 7호 고인돌, 2·4·9·13·21호 돌덧널형무덤방, 22호 돌두름형 무덤방에서 청동검이나 청동투겁창이 발견되었다. 그중 7호 고인돌은 온전히 남아 있던 무덤으로 바닥에서 온전한 비파형동검 1점이, 다른 무덤에서는 깨어진 청동검이나 파편을 재가공한 것이 출토되었다. 또한 2호 돌덧널형 무덤방에서는 비파형동검과 함께 비파형 청동투겁창도 확인되었는데, 고인돌 내에서 청동투겁창이 발견된 최초의 사례이다.

이웃한 월내동 유적은 행정구역으로는 적량동과 구분되지만, 실질적으로는 바로 이어지는 언덕에 위치한다. 상촌 Ⅱ유적에서는 고인돌 19기, 돌널 23기, 묘역을 가진 고인돌 7기가 확인되었는데, 7호 고인돌에서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으며, 2호 고인돌에서는 청동검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상촌 Ⅲ유적에서는 고인돌 149기가 조사되었는데, 단독으로 있는 1호 고인돌을 포함하여 가~마군집까지 적량동과 같이 6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92호 고인돌에서는 비파형동검의 파편, 115호 고인돌에서는 부러진 청동검을 재가공한 것, 116호 고인돌에서는 현재까지 출토된 것 가운데 가장 긴 43.2cm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들은 중국 요서에서 출토되는 전형적인 비파형동검과 형태상 가장 가까운 것으로서, 부여 송국리 유적, 청도 예전동 유적 출토품과 함께 비파형동검의 일반적인 형태와 크기·비율을 가지고 있다.

3 비파형동검이란?

비파형동검은 기타와 비슷한 악기인 비파 모양을 한 청동검이라는 의미로 이름이 붙여졌다. 중국 내몽고(內蒙古)에서부터 길림성(吉林省)에 이르기까지 동북의 넓은 지역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중국 중원의 칼이 손잡이와 칼몸을 일체형으로 주조한데 반해, 비파형동검은 칼몸과 손잡이를 따로 만들거나, 칼몸만 청동으로 만들고 손잡이는 나무나 다른 유기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 차이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손잡이가 북부에서만 출토되고 남부에서는 출토된 예가 없다. 비파형동검은 점차 날의 폭이 좁아지면서 세형의 청동검으로 바뀌게 된다. 그 이유는 더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최근 비파형동검보다 더 이른 시기의 청동검이 주목받고 있다. 광주 역동, 춘천 우두동 돌널무덤 등지에서 출토된 청동검은 적량동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과 달리 직선적인 날을 가지고 있어 세형동검에 더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청동검은 함께 출토되는 돌화살촉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 출토품과 같이 청동기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비파형동검보다 이른 것으로 보인다. 즉 전형적인 비파형동검보다 이른 시기에 아직 비파모양으로 전형화되기 이전의 청동검이 한반도에 존재할 가능성이 좀더 높은 상황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4 비파형동검을 만든 이들

비파형동검이 어디에서 처음 만들어졌을까? 연구자들은 크게 중국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기원설로 나뉘고 있다. 먼저 요서 기원설은 중국 청동예기와 함께 발견되는 사례가 있어서 절대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중국 내몽고(內蒙古) 소흑석구(小黑石溝) 8501호 무덤에서는 ‘허(許)’라는 글자가 보이는 청동그릇이 있는데 이것은 춘추전국시대의 허나라를 가리키며, 그릇의 형태로 보아 기원전 8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무덤에서는 비파형동검도 함께 출토되어 청동검이 그 언저리에 출현한 것으로 생각되며, 요서에서의 출토 사례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야기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보다 더 오래전에 비파형동검이 출현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기원전 8세기 이전의 절대연대 자료가 출토되지 않는 요서보다는 요동기원설에 좀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요동의 경우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과 함께 출토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방법인 형식학에 근거를 둔다. 형식학이란 형태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는지를 찾아 원래의 형태를 찾는 방법인데, 비파형동검의 가장 큰 특징이 곡선적인 날이므로 이런 날이 어디에서 처음 시작되었는지를 찾는 것이다.

최근에는 비파형동검의 곡선적인 날의 시작을 동물의 뼈에 홈을 내 돌날을 끼워 넣어 만든 뼈칼骨劍에서 찾는 연구가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다. 뼈칼은 돌날이 끼워있는 부분만 더 튀어나와 비파형동검과 같은 곡선적인 날의 형태를 띠고 있어 유사성이 있다. 또한 최근 청주 학평리에서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는데, 무덤이 아닌 집자리에서 출토된 귀중한 사례이다. 이전까지 무덤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집자리에서 발견되는 것들 간에 차이가 있어 둘의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없었는데, 비파형동검이 긴네모형의 집자리에서 출토되며 이런 집자리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비파형동검을 썼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집자리에서 확인된 연대측정결과는 기원전 10세기를 넘어서고 있다. 즉 비파형동검이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사용되었고,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중국 요동에서 비파형동검이 처음 등장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비파형동검은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도 관련이 있는데, 고조선은 비파형동검과 번개무늬를 가진 거친무늬거울로 대표되는 청동기문화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비파형동검이 고조선의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북부의 비파형동검을 고조선으로, 한반도 남부의 청동검은 중국 기록에 나오는 삼한 이전의 진국(辰國), 혹은 중국(衆國)의 문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같은 비파형동검이지만 제작방법이나 사용법 등에서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데, 이런 미세한 차이를 바탕으로 고조선과 같은 정치세력의 흔적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5 청동검의 제작지

청동기를 만든 곳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쉬운 것은 청동기를 만들던 공방을 찾는 것이다. 아마도 공방에는 구리와 주석과 같은 재료와 금속을 녹이기 위한 화덕, 쇳물을 담을 도가니, 바람을 불어넣을 풀무와 송풍관, 만들고자 하는 청동기의 거푸집 등이 함께 출토될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나 전염병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공방을 버리고 가는 경우가 아니면 이런 것들이 잘 남아 있기는 어렵다. 실제로는 이런 것 중 하나만 발견되어도 청동기를 만들던 곳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부여 송국리에서는 비파형동검과 함께 출토되는 부채 모양 도끼의 거푸집, 강원도 통천에서는 비파형동검의 선단으로 생각되는 거푸집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아마도 이 두 곳은 청동검을 만들었던 곳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공방과 관련된 흔적은 없다 하더라도 지역적 특성을 갖는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면 그 인근에 제작지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최근 농기구인 호미가 해외에도 수출되고 있지만, 그래도 가장 많이 사용되어 모여있는 곳은 우리나라인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동검이 출토되는 여수반도에서 비파형동검이 제작되었음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완형의 청동검과 함께 부러지거나 재가공된 것들도 많이 발견되는데, 이렇게 파편으로 출토되는 사례는 남해안 일원에서 널리 보이며 멀리 일본의 규슈 이마가와(今川) 유적에서도 부러진 칼을 화살촉으로 재가공한 것이 보인다. 이 유적에서는 둥근 평면 형태의 가운데 타원형 구덩이가 있는 송국리형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인근에서는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되는 석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아마도 여수반도에서 제작된 동검이 남해안의 교역로를 타고 일본까지 전달된 것으로 생각된다.

6 여수반도만의 제작기술?

여수반도 일원에서 발견되는 비파형동검은 X-ray 촬영 결과 기포가 칼날 끝 쪽에 많이 모여 있는 것이 밝혀졌다. 청동기를 제작할 때 구리와 주석을 녹여 거푸집에 부어서 만들기 때문에 액체로 된 청동이 굳으며 거푸집 안에 남아있던 수분이나 공기가 뜨거운 쇳물을 만나 기포가 되는데, 가벼운 기포는 위쪽으로 떠오르게 된다. 따라서 칼끝쪽으로 해서 녹인 청동을 부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한반도 내 다른 지역에서는 일부 화살촉이나 꺾창을 만드는 거푸집 가운데 칼끝 쪽에 주입구가 있는 경우가 있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모든 비파형동검 거푸집은 쇳물을 붓는 쪽이 칼끝의 반대편 손잡이 쪽에 있다. 현재까지 모든 청동검을 조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언할 수 없지만, 여수반도에서는 자신들만의 전통에 따라 청동검을 제작하여 사용하고 그것을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초기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정치체이다. 하지만 비파형동검을 시작과 끝으로 그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후 한국식 청동검이 사용되는 시기에는 영암 등지에서 많은 거푸집이 출토되지만 여수반도에서는 그 어떤 정치조직의 흔적도 나타나지 않는다. 과연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고,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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