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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흔암리 유적

여주 흔암리 유적과 청동기시대 토기문화의 전개

미상

여주 흔암리 유적 대표 이미지

진주 대평 어은지구 80호 주거지 출토 흔암리식 토기

경남대학교 박물관

1 개요

한반도에서 청동기문화는 어떻게 유입되어 변화, 발전하였을까? 그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는 바로 여주 흔암리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유적에서는 서북지역의 겹아가리토기와 동북지역의 구멍무늬토기가 합쳐져 겹아가리에 구멍무늬를 가진 토기들이 출토된다. 그것을 우리는 흔암리식 토기라고 부른다.

경기도 여주시의 남한강 유역에 위치하는 흔암리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전기를 대표하는 마을 유적이다. 청동기시대 서북한(평안도·황해도)과 동북한(함경도)의 문화 요소가 한강 유역에서 만나 하나로 융합되며 나타난 유적으로서, 당시 서북한과 동북한의 사람들이 한반도 남부의 사람들과 활발하고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2 흔암리 유적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에 위치하는 흔암리 유적은 여러 차례 조사를 통해 총 16채의 집자리를 확인하였다. 마을은 해발 123m의 야산에 위치하는데, 경사면을 L자형으로 파고 네모난 집을 지었다. 집자리는 큰 것과 작은 것 다양한데, 내부에는 화덕 자리와 출입구 시설, 저장구덩이, 선반 등이 있었다.

흔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토기이다. 흔히 민무늬토기라 불리는 청동기시대 토기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에 비해 무늬가 없기 때문에 무문토기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는 청동기시대 토기 중에서는 가장 무늬가 많은 것이다. 한반도 동북부에서 주로 발견되는 구멍무늬토기와 골아가리토기를 비롯해, 서북부의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아가리에 덧붙인 점토띠가 잘 붙도록 점토띠와 토기 몸통을 잇는 짧은 빗금을 그어 덧붙인 토기)가 함께 발견되며, 양 지역의 무늬가 합쳐진 토기도 확인된다. 이런 토기문화는 한반도 남부로 전해져 멀리 제주도에서도 확인된다. 함께 출토된 석기들도 다양하여 간돌칼, 반달돌칼, 도끼, 화살촉, 보습, 갈돌, 갈판 등이 확인된다. 또한 농경으로 얻은 작물로 생각되는 쌀과 보리, 콩 등이 불에 탄 상태로 확인되었다. 특히 불탄 쌀을 근거로 한반도 남부에서 처음으로 청동기시대 벼농사의 존재를 확인한 중요한 유적이다.

3 청동기시대 토기의 흐름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빗살무늬토기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청동기시대토기는 민무늬토기라고 한다. 민무늬토기라는 것은 무늬가 없는 토기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실 청동기시대의 토기에도 드물지만 무늬가 있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토기 아가리에 구멍을 낸 구멍무늬토기나 입술을 두 겹으로 만든 겹아가리토기, 이 겹아가리가 서로 잘 붙도록 선을 그어 이은 짧은빗금무늬 토기, 토기 입술의 윗면을 날카로운 도구로 찍어서 무늬를 새긴 골아가리토기 등이 있다.

신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청동기시대의 토기 역시 무늬를 근거로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는 아가리 주위를 끈으로 묶듯이 점토띠를 붙인 덧띠무늬토기이다. 사실 토기에서 제일 많이 깨지는 곳은 아가리이다. 그래서 아가리를 좀 더 보강할 필요가 있었을 것인데, 처음에는 끈으로 아가리 주위를 묶어서 보강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 동북지역에서 발견되는 초기의 덧띠무늬토기는 아가리를 가로로 감은 점토띠의 한쪽에 끈으로 묶은 듯한 매듭이 남아 있는 경우가 확인된다. 이런 토기를 돌대문토기 혹은 발견된 유적의 이름을 따서 미사리식토기라고도 한다. 다음 단계의 토기는 앞서 이야기한 한반도 서북부의 겹아가리토기, 동북부의 구멍무늬토기 등이다. 이렇게 지역이 다른 곳에서 다른 무늬의 토기가 출토되는 경우, 그 지역의 토기는 해당 집단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반도 남부의 한강유역에서 서북부와 동북부의 토기가 합쳐져 새롭게 겹아가리와 구멍무늬가 결합된 토기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는 별개로 겹아가리토기나 구멍무늬토기는 단독으로도 한반도 남부로 전해지며, 특히 중부지역(경기-강원)과 동남부지역(울산-부산)에서는 구멍무늬토기가 청동기시대의 늦은 시기까지 남아 있기도 한다.

겹아가리토기는 이중구연토기 혹은 가락동식토기라고 부르며, 구멍무늬토기는 공열문토기 혹은 역삼동식토기라고도 한다. 겹아가리에 구멍무늬를 함께 가진 복잡한 토기는 이중구연단사선문공렬문토기 혹은 흔암리식토기라고 부른다. 청동기시대의 마지막 단계에는 부여 송국리 유적을 중심으로 확인되는 무늬가 전혀 없는 기다란 항아리로 아가리가 바깥으로 살짝 벌어지는 토기가 중심이 된다. 이런 토기를 송국리형토기라고 한다.

단순히 토기의 차이도 보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토기가 발견되는 집자리의 형태나 마을의 모습이다. 덧띠무늬토기의 집자리는 긴네모꼴에 돌로 화덕 자리를 만들며 강가의 자연제방 위에 하나씩 간격을 두고 위치한다. 집자리가 크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은 적어도 2~3세대가 함께 살고 있고, 강가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다음 단계에 들어서면 집자리는 더 긴네모꼴에 화덕 자리의 숫자도 많아지며, 집자리는 흔암리 유적과 같이 산의 경사면으로 옮겨간다. 강가에서 산의 경사면으로 집자리를 옮긴 것은 아마도 농경의 비중만큼이나 산에서 얻을 수 있는 식료품, 예를 들어 사냥이나 나물의 채취 같은 것들의 비중이 높아졌기때문일지도 모른다. 덧띠무늬토기문화에서는 그리 잘 확인되지 않던 고인돌을 비롯하여 돌널무덤 등이 보인다. 아마도 죽음과 시신의 처리에서 새로운 관념이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의 끝에 대해서는 이전에는 한국식 청동기문화를 가진 점토대토기라고 불리는 덧띠토기문화까지로 보던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덧띠토기문화부터는 철기가 등장하므로 그 앞의 송국리형토기가 사용되는 시기를 후기로 보는 의견이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다. 송국리형토기는 송국리형주거지라고 하는 동그란 평면에 가운데 타원형의 구덩이를 가진 집자리와 관련된다. 송국리형토기가 사용되는 시기는 집자리의 크기가 줄어들어 핵가족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집자리 여러 채가 짝을 이루어 분포하고 있어 거주하는 공간은 달리 하지만 이전 시기의 세대공동체는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환호라고 불리는 도랑을 파거나 나무로 벽을 쌓아 마을을 방어하는 시설들이 가장 많이 확인되는 것도 이 시기이다. 대체적으로 뒷 시기로 갈수록 마을의 규모는 커지고, 집자리뿐만 아니라 광장이나 신전 등 다양한 공공시설도 생겨나게 된다.

4 청동기시대 전기의 토기

구멍무늬 토기, 즉 공렬문토기는 발견된 유적의 명칭을 사용해 역삼동식토기라고도 한다. 이렇게 토기 아가리에 구멍을 낸 토기들은 한반도의 동북부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한반도 동남부에서도 오랜 기간 사용되어 청동기시대 말기의 유적에서도 나타난다. 이에 반해 겹아가리토기는 이중구연토기 혹은 가락동식토기라고도 하며, 한반도 서북부에서 주로 발견된다. 그리고 이 둘이 합쳐져 겹아가리에 구멍무늬를 가지는 토기가 바로 여주 흔암리 유적에서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되어 흔암리식토기라고 불리는 토기이다. 학자들은 서북부의 겹아가리토기와 동북부의 구멍무늬토기가 한반도 남부의 한강유역에서 만나 서로 뒤섞여 구멍무늬-겹아가리토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아주 명확한 결론이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존재한다. 먼저 과학적인 연대측정 결과를 보면 역삼동식, 가락동식, 흔암리식 간의 시기차이가 모호하다. 동일 시기에 함께 공존하는 기간이 긴 것이다. 또한 송국리문화가 전해지지 않은 울산-부산권을 중심으로 이전시기의 구멍무늬토기가 오랜 기간 남아 있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겹아가리토기와 구멍무늬토기 간의 선후관계도 명확하지 않다. 어떤 연구자는 겹아가리토기가 이르고 그 다음 구멍무늬토기가 등장한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이 둘이 함께 등장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복잡한 양상 속에서 흔암리식토기의 등장이 서북과 동북의 만남이라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것은 송국리형토기보다 이런 겹아가리, 구멍무늬 계통의 토기가 더 오래전에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5 청동기시대 전기의 모습

덧띠무늬토기를 조기, 송국리형토기를 후기로 둔다면 전기는 겹아가리, 구멍무늬토기의 시대이다. 전기에는 무덤이 적고, 청동칼이 확인되지 않는데 비해 전기에는 무덤이 일반화되며, 청동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청동칼의 경우 주로 무덤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집자리와의 관계를 명확히 단정짓기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청주 학평리 집자리에서 겹아가리토기가 나오는 아주 긴 네모꼴 집자리에서 청동칼이 발견되어 덧띠무늬토기문화와 차별적인 의미 부여가 가능하게 되었다. 청동칼은 군사력을 가진 지배자의 상징이며, 강제적인 공권력을 상징한다. 이런 칼을 가진 이가 바로 전기에 등장하였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로서 우리가 그릴 수 있는 청동기시대의 모습은 농경이 시작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의 집중화가 높아지는 모습이다.

또한 조기에는 잘 보이지 않던 무덤이 전기가 되면 고인돌이나 돌널무덤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무덤을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이 있고 힘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상석을 가진 고인돌을 만들 수 있는 이들은 지배자들이었다. 결국 청동기시대 전기가 되면 지배자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자신의 무덤을 공공의 기념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상석은 자신이 가진 조직의 힘을 다른 이들에게 과시하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모습이 한반도 남부 청동기시대 전기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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