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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갈동 유적

완주 갈동 유적과 거푸집

미상

완주 갈동 유적 대표 이미지

완주 갈동 1호 움무덤 거푸집 출토 상태

호남문화재연구원

1 개요

거푸집을 무덤에 가지고 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청동기를 만들던 사람일까? 그렇다면 당시 청동기를 만들던 사람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사례로 본다면 청동기를 만드는 사람은 그렇게 지위가 높지 않았다. 실제 은나라에서 청동기를 만들던 이들의 무덤을 발굴하였는데, 다리를 잘렸거나 몸이 온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좋은 청동기를 만들지 못하면 벌로 발목을 자른다던가, 혹은 귀중한 청동기 제작기술을 가지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일부러 다리를 잘랐을 것이다.

아니면 청동기 제작 공방을 운영하던 지위가 높은 사람일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쓸모가 있는 귀중한 거푸집을 무덤에 넣었을까? 청동기 공방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많은 재산과 좋은 것들이 더 많았을 텐데, 굳이 거푸집을 무덤에 넣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뿐만 아니다. 거푸집은 생산도구로서 더 많은 청동기를 만들 수 있도록 해주는 귀한 재료이다. 거푸집으로 사용할 있는 재질의 돌도 귀할뿐더러, 만들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굳이 무덤에 가지고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다. 결국 이제는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는 거푸집을 무덤에 가지고 갔다고 생각해야하는 것일까? 완주 갈동 1호 움무덤에서 출토된 세형동검의 거푸집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2 갈동 유적

갈동 유적은 초기철기시대의 무덤 유적이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와 완주군 이서면의 경계 에 위치하며 해발 40m 내외의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무덤은 구릉의 남사면에 모두 17기가 있었는데, 경사면과 나란하며 내부에 널을 가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 널의 경우도 창원 다호리 1호 널무덤과 같은 통나무널과 경산 양지리 1호 널무덤과 같은 판자로 만든 널이 함께 존재한다. 이 유적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1호 움무덤이다. 이 무덤에서는 정식 발굴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식 동검, 즉 세형동검의 거푸집이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잔무늬거울, 청동화살촉, 유리구슬을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3 거푸집의 재질과 채굴장소

갈동 1호 움무덤에서 출토된 거푸집은 2점이지만, 새겨진 면으로 보면 1.5점이라 할 수 있다. 한 점의 거푸집에는 세형동검 한 면, 다른 한 점에는 세형동검한 면과 꺾창 한 면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세형동검은 두 개의 거푸집을 합쳐 하나로 완성되지만 꺾창은 한 면만 있기 때문에 다른 한 면은 완주 갈동 인근에 묻혀있을 것이다.

두 점의 거푸집은 크기가 조금 다른데, 하나는 33.0×7.3×3.1cm이며, 다른 한 점은 31.9×7.9×2.3cm이다. 이 거푸집의 재질을 직접 분석하지 못했지만 인근 덕동 유적에서 수습된 청동끌의 거푸집이 재질 특성상 동일하게 보여 이를 분석한 사례가 있다. 분석 결과 거푸집은 심성화성암에 속하는 녹회색의 각섬석암으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돌은 유적에서 직선거리로 50km 떨어진 장수 장수읍 식천리, 번암면 교동리, 남원 아영면 일대리 부근에서 확인되는 것들과 유사하였고, 현재까지도 장수에서는 석재를 채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의 돌을 이용하여 거푸집을 만든 것으로 추정한 연구도 있다.

한편 육안 관찰을 통해 이 거푸집이 활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활석광산이 완주에 있으므로 이곳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견해도 있다.

4 왜 금속인가?

순수한 구리는 두드려서 모양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무르기 때문에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에 비소를 넣으면 구리가 단단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비소는 독성이 있어 적합하지 않았고 대안으로 찾은 것이 바로 주석이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주석이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주석은 모두 수입하는 귀중한 광물이었다.

금속은 광택이나 소리에서 나무나 돌같은 다른 재질과 차별적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기능적인 요소가 아닌 상징적 요소이다. 그렇다면 과연 금속의 기능적인 이점은 무엇일까? 물론 금속이 가지는 강도나 재활용 등 재질 상의 많은 점이 알려져 있지만, 덧붙여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바로 재료의 한계를 뛰어넘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간돌칼을 만든다고 가정할 때, 원래 재료가 되는 돌의 크기는 제한적이다. 즉 재료가 되는 돌의 크기가 만들 수 있는 도구의 크기를 제한하는 것이다. 큰 돌로 화살촉을 여러 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만, 작은 돌 여러 개로 큰 간돌칼을 만들 수는 없다. 이에 반해 금속은 재료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거푸집을 크게 만들면 재료가 되는 구리나 주석은 녹여서 부어 그만큼 큰 도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능적인 이점으로 금속이라는 새로운 재료는 더욱 인기를 얻고 기술도 발전하게 된다.

5 한반도 출토의 거푸집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된 도끼의 거푸집은 편암으로 보고되었지만 최근에는 천매암으로 수정되었다. 숭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영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거푸집들은 활석이며, 완주 덕동 유적의 거푸집은 갈동 유적 출토품과 같은 각섬석암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초기철기시대의 거푸집은 갈동 1호 널무덤 출토품과 평양 장천리, 강원도 통천 외발권산, 경기도 용인 초부리, 전 영암 출토품이 있지만, 정식 조사에 의해 무덤에서 출토된 것은 갈동 자료가 유일한 상황이다. 다만 경기도 용인 초부리에서는 거푸집이 세워진 상태로 출토되어 공방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영암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진 유물들 가운데는 청동칼을 비롯하여 꺾창, 투겁창, 도끼, 끌, 거울 등 다양한 청동기의 거푸집이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 청동기의 제작이 각 공방에서 칼, 창을 구분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한 곳에서 여러 가지의 청동기를 만든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6 청동기의 제작과정

모든 유물이 그렇듯이 청동기도 사람의 일생과 마찬가지로 탄생에서 소멸까지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흔적이 남게 되는데 그것을 관찰하여 사용법, 용도, 제작지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청동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료가 되는 구리와 주석 등을 채광해야 한다. 한반도에 구리광산은 알려져 있지만, 주석광산은 거의 없어 전량 수입한 것으로 생각된다. 채광한 광석은 제작지로 운반하여 도가니에 넣어 고온으로 녹여서 쇳물을 만든다. 그리고 이것을 적당한 크기로 구리덩이, 주석덩이 등을 만든다. 이후 만들고자 하는 도구의 용도에 따라 구리와 주석의 비율을 맞춘다. 구리는 붉은색에 무르며, 주석은 은색에 강하다. 구리가 많이 들어가면 붉은색이 강해지고 더 무르게 되며, 주석이 많이 들어가면 은색이 더 강하고 단단해진다. 주석을 많이 넣으면 더 단단해지기는 하지만 잘 깨지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무기를 만들 때, 거울을 만들 때 구리와 주석의 비율을 각각 달리해서 맞춘다. 당시에는 저울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일정한 크기의 덩어리를 만들어 그 개수로 구리와 주석의 비율을 맞추었을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제작할 물건의 거푸집을 만들어야 한다. 갈동과 같이 돌로 만든 거푸집은 도면을 그려서 돌을 깎아 새겨 넣어야 한다. 이런 방식은 복잡한 형태의 것, 예를 들어 입체적인 불상을 만든다던가 하는 작업에는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나온 것이 흙으로 만든 거푸집이다. 흙은 상대적으로 부드럽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를 만들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밀랍을 이용하는 것이다. 밀랍은 열을 가하면 녹는데, 밀랍으로 형태를 만들고 거기에 흙을 덧씌워 거푸집을 만드는 것이다. 그 뒤 열을 가해 밀랍을 녹여 내면 그 공간이 비어 그대로 쇳물을 부어 만들 수 있다. 이처럼 돌과 흙이라는 거푸집의 재질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지만, 사용되는 거푸집의 갯수에 따라 하나의 거푸집을 이용하여 만드는 것과 여러 개의 거푸집을 합쳐서 만드는 방법으로도 나눌 수 있다. 갈동 1호 무덤 출토품은 두 개가 한 쌍이 되어 청동기를 만드는 합범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제작된 청동기는 사용하다 부서지면 재활용을 하는데, 녹여서 다시 다른 청동기로 만들거나,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재가공을 하기도 한다.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끌은 원래 비파형동검의 아래 부분이던 것이 부서지면서 끌로 재가공된 것이다.

7 기술자인가 지배자인가?

갈동 1호 널무덤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귀중한 거푸집을 왜 무덤에 넣었는지에 대한 답일 것이다. 거푸집은 한 쌍으로 한국식동검을 만들 수 있는 것이고, 깨어지지도 않았고, 흠도 없어서 못쓰게 된 것을 무덤에 넣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시 상황 속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거푸집이 무덤에 묻힌 시기는 청동기에서 새롭게 철기로 도구가 바뀌던 시절이다. 전국계 철기라고 불리는 중국 전국 연나라의 철기를 가진 이들로부터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청동기시대가 저물고 철기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청동기를 만들던 기술자들은 철기를 만드는 대장장이로 변모해갔고 그 과정 속에서 청동기제작과 관련된 거푸집이 무덤에 묻혔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덤의 주인공이 단순한 기술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청동기 제작을 독점하던 기술자들의 우두머리였고, 과거의 기술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며 거푸집을 무덤에 넣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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