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완주 신풍 유적

완주 신풍 유적

완주 신풍 유적과 준왕의 남하

미상

완주 신풍 유적 대표 이미지

완주 신풍 가-31호 널무덤 출토 잔무늬거울

국립전주박물관

1 개요

거미줄처럼 촘촘한 무늬가 새겨진 잔무늬거울.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이 무늬를 과거의 사람들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청동기 중 가장 뛰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이 거울은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어 마한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 완주 신풍 유적을 비롯하여 갈동, 전주 원장동 등 인근에서 17점에 달하는 잔무늬거울이 출토되어 이 지역이 잔무늬거울의 최고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2 완주 신풍 유적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갈산리 일대의 나지막한 구릉에 신풍 유적이 위치한다. 각각 독립된 구릉으로 이루어진 가 지구와 나 지구로 나뉘며, 가 지구에서 57기, 나 지구에서 23기로 총 80기의 널무덤이 확인되었다. 가 지구는 10여 기 내외의 무덤씩 5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무덤의 규모가 커지고, 철기가 출토되는 것도 많아지고 있어 시간적인 순서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나 지구는 널무덤보다 움무덤이 더 많이 발견된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가 지구 구릉 정상에 위치한 54호 널무덤으로서 장대 투겁 방울 한 쌍이 출토되었으며, 그 크기도 이 일대에서 가장 크다. 아울러 가장 큰 무덤이 구릉 정상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에서 그만큼 사회적‧계층적 분화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신풍 유적에서는 다양한 덧띠토기와 철기, 유리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덧띠토기, 검은간토기, 쇠뿔손잡이단지 등을 중심으로 청동기시대의 송국리형토기 등도 발견된다. 청동기는 세형동검과 잔무늬거울, 꺾창, 도끼, 새기개, 장대 투겁 방울 등이 있다. 세형동검 가운데 가-22호 무덤 출토품은 숫돌에 날을 전혀 갈지 않고 만들 때 상태 그대로 부장한 것도 있다. 이런 사례는 김해 회현동 D지구 독무덤이나 재령 고산리 출토 청동검에서도 동일하게 보인다.

잔무늬거울은 모두 10점이 발굴되어 한 유적에서 가장 많은 수가 출토되었다. 신풍 유적을 중심으로 약 2㎞ 내에 속하는 완주 갈동, 전주 원장동 등지에서 총 17점이 출토되어 이 인근에서 잔무늬거울을 만들고 분배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청동거울은 그대로 부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깨뜨려 피장자 머리 옆에 부장하거나, 피장자 상면에 흩뿌린 경우도 있어 다양한 의례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철기는 도끼, 끌, 손칼,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철기 중에는 불에 달구어 두들겨 형태를 잡는 단조기술로 만든 것들도 있는데, 한반도 남부에서는 최초의 사례이다. 이외에도 유리목걸이는 중국 남방의 것이다.

3 잔무늬거울의 발생

잔무늬거울은 다뉴세문경, 혹은 다뉴정문경이라고 부른다. 거친무늬거울에서 변화 발전한 것인데, 이 둘을 합쳐서 다뉴경이라고도 한다. 다뉴경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청동거울로서 한반도적인 청동기라고 할 수 있다. 다뉴경이라는 말이 낮선 이들도 많이 있을 텐데, 많다는 의미의 ‘다(多)’와 고리를 뜻하는 ‘뉴(鈕)’, 거울을 뜻하는 경(鏡)이 합쳐진 것으로 걸기 위한 고리가 많은 거울이라는 뜻이다.

중국의 거울은 가운데 고리가 하나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주로 용모를 가다듬기 위해 줄을 엮어 손에 쥐거나, 거울받침에 걸어 사용한다. 이에 반해 다뉴경은 고리에 줄을 걸어 목걸이처럼 목에 걸거나, 옷에 꿰매어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보통 두 개의 고리를 가지지만, 3개인 경우도 있다. 즉 고리가 한쪽에 치우쳐 2~3개 있고, 번개무늬나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거울을 다뉴경이라고 한다.

기원전 8세기 경 번개무늬를 가진 다뉴뇌문경(多鈕雷文鏡)이 처음으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만들어지고 그것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거친무늬거울로 불리는 다뉴조문경과 잔무늬거울이라 불리는 다뉴세문경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청동기가 된다.

가장 오래된 번개무늬를 가진 거울은 중국 조양(朝陽)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비파형동검과 함께 발견되어 고조선의 문화로 이야기 되고 있다. 이런 번개무늬 거울은 중국 내몽고(內蒙古) 영성(寧城) 소흑석구(小黑石溝) 유적에서부터 한반도 남부의 충청도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다.

번개무늬 거울 중, 평양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일본 고려미술관 소장품에는 거울면에 홈이 파여 있다. 이런 홈은 이후 부여 구봉리 출토의 거친무늬거울에서도 확인되는데 아마도 거울을 이용한 의례행위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고조선과 관련된 의례일 것이다.

거친무늬거울은 중국 요하의 동쪽에서 주로 확인된다. 번개무늬거울과 달리 요하 서쪽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대신 동쪽으로 길림(吉林)에서 러시아 연해주까지 확산된다. 특히 거친무늬거울의 거푸집은 중국 요령성을 비롯해 한반도의 맹산 등지에서 발견되었는데 모두 돌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거친무늬거울은 돌로 된 석제 거푸집을 이용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전주 여의동 무덤에서는 거친무늬거울 두 점이 함께 출토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개의 무늬는 차이가 있다. 하나는 무늬가 뚜렷하지만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조잡하다. 이는 어떠한 차이일까? 사용자의 부주의라기보다는 만들어질 때부터 무언가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이는 거푸집 재질의 차이인데, 돌로 만든 거푸집을 이용한 것은 무늬가 뚜렷하지만 새로운 기술인 흙으로 만든 거푸집을 이용한 것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조잡하게 만들어진 것 같다.

동그란 무늬를 새겨 넣는 방법도 두 가지 방법이 확인된다. 첫 번째는 컴퍼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아산 남성리 무덤에서 출토된 거친무늬거울은 새겨진 원문의 모든 중심이 하나에 일치되어 컴퍼스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대전 괴정동 무덤에서 출토된 것은 중앙에 있는 원문 두 개의 간격이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는데 이는 컴퍼스가 아니라 원판을 대고 무늬를 새겨 원의 중심을 일치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컴퍼스를 사용하여 제도된 거친무늬거울은 주로 흙으로 만든 거푸집으로 제작한 점도 주목된다.

거친무늬거울을 만드는 기술 중 흙으로 만든 거푸집을 사용하는 방법은 한반도 서남부의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다. 물론 중국의 거울도 흙으로 만든 거푸집을 이용하고 있어 일정부분 기술적인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흙으로 만든 거푸집을 이용하는 잔무늬거울은 이곳 한반도 서남부에서 가장 먼저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부여 구봉리와 아산 동서리 무덤에서는 거친무늬거울과 함께 잔무늬거울이 발견되고 있어 이 두 거울이 계승적 관계임을 보여준다. 잔무늬거울은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한반도와 일본에서 발견된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41호 잔무늬거울의 보존 처리 중 흙으로 만든 거푸집을 이용해 제작하였음을 확인한 것은 최근 잔무늬거울 제작 기술 연구의 큰 성과 중 하나였다. 물론 돌을 이용해 거푸집을 만들어 복원한 예가 있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잔무늬거울 중에서 같은 형태가 하나도 없어 흙으로 만들어진 일회용 거푸집으로 거울을 제작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잔무늬거울의 제작자는 작은 곳에도 신경을 썼다. 고리에 구멍을 만들기 위해 설치된 심 때문에 고리 주변에 무늬가 지워진 것을 다시 손봐 무늬를 추가한 것이 완주 갈동 무덤 잔무늬거울에서 확인된다. 또한 일본 오사카(大阪) 다카오야마(高尾山)에서 출토된 것에는 아예 고리의 주변까지 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이뿐만 아니다. 완주 신풍 가-31호 무덤에서 출토된 잔무늬거울의 동심원무늬를 잘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심원 무늬는 여러 개의 이빨을 가진 컴퍼스를 이용해 한 번에 그었다. 그리고 컴퍼스의 중심, 움푹 파인 곳에 흙을 다시 채우고 손으로 동심원을 그려 넣었다. 이러한 예는 논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국보 제141호 잔무늬거울에서도 확인된다.

4 준왕이 내려온 곳

완주 신풍·갈동·덕동, 전주 원장동 등 이 주변에는 잔무늬거울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또한 청동기뿐 아니라, 갈동에서 출토되는 거푸집까지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신풍을 중심으로 한 이곳에 이러한 유적이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기원전 194년 즈음, 고조선의 왕인 준왕(準王)이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였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준왕은 한반도 남부로 이주해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부르는데, 그가 고조선에서 가져온 것은 국가의 제사에 사용되던 청동예기였을 것이다. 중국 전국시대에는 주례에 따라 청동이기를 국가의 제사에 사용하였다. 그런데 고조선에서는 아마도 잔무늬거울이 그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직은 충분한 분석이 되지 않아 속단할 수는 없지만 완주지역에 집중되는 청동기는 준왕의 세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