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울주 반구대 암각화

울주 반구대 암각화[蔚州 盤龜臺 岩刻畫]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사냥

미상

울주 반구대 암각화 대표 이미지

울산 반구대 바위 그림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울주 반구대 암각화(蔚州 盤龜臺 岩刻畫)는 국보 제285호로서, 강변의 절벽 암반에 여러 모양과 동물이 새겨져 있는 바위 그림이다. 바위에는 호랑이, 멧돼지, 사슴 등의 육지 동물과 고래와 같은 바다 동물이 확인되는데 단순히 형태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암각화에는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모습들도 확인되는데, 이들 역시 다양한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바위에 새긴 기법으로 보아 신석기 말에서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 옛 사람도 다녀간 반구대

암각화는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를 흐르는 대곡천 일대에 위치한다. 하천은 주변의 산을 끼고 흐르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침식작용을 하였고, 그 결과 급한 경사와 절벽을 형성하였다. 암각화가 그려진 암벽 역시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난 절벽에 해당한다. 이 일대에는 반구대 암각화뿐만 아니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 공룡 발자국 화석(천전리, 반구대에 각각 문화재자료 제5호, 13호로 등록)이 있는데, 각각의 형성 시기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에 이르는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암각화는 천전리 각석이 발견된 지 1년 후인 1970년 12월 24일에 발견되어 71년 3월 말부터 한 달 동안 본격적인 조사를 진행하였다.

암각화는 너비 6.5m, 높이 3m 가량의 암반에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으며, 주된 암반 면의 크고 작은 암반에도 표현되어 있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면은 북쪽을 향하고 있어 낮에는 거의 해가 들지 않아 암각화의 음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름에는 해가 뜬 직후 동쪽으로부터 비추어 바위면의 그림들을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반구대는 『여지도서(輿地圖書)』 언양 편에 의하면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을 지명유래로 기록하고 있는데, 고려 말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비롯한 조선 시대 문인들이 이곳에서 시를 남겼음을 전한다. 반구대 아래의 작은 언덕에는 포은대(圃隱臺)가 있고 그곳에는 이들의 행적을 남긴 유허비들이 세워져 있으며, 강을 끼고 맞은편에 반구서원(盤龜書院)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주변에 반고사지(盤皐寺址)를 비롯한 사찰 터가 몇 군데 남아 있으며, 암각화로 들어가는 부근에는 청동기시대 주거지를 시작으로 통일신라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3 암각화가 알려주는 당시의 사냥 모습

암각화는 음각 기법(바늘이나 빗 등의 공구로 재료 표면을 긁어서 문양을 나타내는 장식 기법) 중에 하나인 조탁 기법을 이용하여 새겨졌다. 암각화의 내용은 크게 고래를 소재로 삼은 어로 장면과 육상동물의 수렵 장면으로 나뉜다. 그림은 몇 군데 겹친 부분이 확인되는데, 어로 장면이 먼저 새겨지고 그 위에 수렵 장면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시기적으로 어로 장면이 앞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림은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시기가 늦은 것으로 보인다.

인물상은 전신을 표현한 10명과 얼굴만이 나오는 1명이 확인되며, 이 가운데 8명에게 남근이 묘사되어 있어 성별을 알 수 있다. 이 중 5명의 남성은 동물 그림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다시 그중 4명은 육상 동물과 함께, 그리고 나머지 1명은 고래와 함께 그려져 있다. 유적에 그려진 상당한 수의 크고 작은 고래와 함께 암각화에 그려진 사람들은 작은 배를 타고 작살, 그물 등을 이용하여 고래잡이에 나서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고래를 사냥하는 방법이 어떠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고래잡이를 위한 일련의 과정들을 생각해보면 그림에 표현된 사람들을 비롯하여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짐작되며, 그 과정에서 사냥을 위한 의례의 결과물로서 암각화가 그려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때 주목되는 것은 제일 위쪽에 두 팔을 들어 올리고 다리를 굽혀 춤추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성기를 크게 과장한 인물과 왼쪽 맨 아래의 팔과 다리를 수평으로 벌리고 손·발가락을 과장하여 표현한 인물이다. 이들은 의례를 주도한 샤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손과 발을 과장하여 표현한 인물은 시베리아-알타이 지역에서 자주 보이는 것인데, 손발이 마치 나뭇가지처럼 표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술의식 속에 보이는 나무와 형태상 유사한 사슴뿔과의 관계가 검토된 바 있다. 시베리아-알타이 지역의 주술의식 속에는 현실과 초월적인 존재를 연결하는 우주목의 존재가 확인되며, 이는 형태상으로 유사한 사슴뿔로도 표현되었다. 사슴뿔이 계절이 바뀌며 다시 자라난다는 점은 자연의 순환 주기와 유사하다고 여겨졌으며, 그 모양 때문에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손발이 나뭇가지와 같이 표현된 인물은 우주와 연결된 자를 의미하는 자로서, 초월 세계와 현실 세계를 연결시키는 주관자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두 팔을 올린 사람 역시 시베리아-알타이 지역에서 자주 확인되는 인물상이다. 형태상 춤을 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 역시 일종의 주술행위로서 춤을 통해 접신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샤먼의 형상은 개구리 형상과 비슷하게 표현되는데, 개구리는 샤먼을 도와주는 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개구리에 대한 신성성의 부여는 그것이 물과 육지를 넘나드는 종이기 때문으로, 초월 세계와 현실 세계를 오가는 것처럼 의미가 부여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동물은 146점이 확인되는데 이 중 고래가 46점에 달하여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암각화가 위치한 지역이 바다와 밀접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작살을 맞은 고래나 어미 고래 옆 새끼 고래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고래의 생태 역시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한편, 고래의 크기나 수를 본다면 한 집단이 생존을 위한 목적으로 사냥한 것이라 보기엔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실제로 그만한 양이 필요했거나, 사냥하지 않은 주변의 고래까지도 그려 넣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어느 쪽이든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육상동물 가운데 우제류(牛蹄類)로는 사슴, 산양, 돼지 등이 있으며, 식육목(食肉目)으로 고양이, 개, 두더지 등이 있다. 이 밖에 거북, 물개, 수달 등도 확인되어 당시 이 일대의 다양한 생물분포를 보여주고 있다. 동물 그림에서는 같은 분류의 동물이라도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 경우가 많은데, 이는 혹등고래나 귀신고래처럼 같은 종이라도 서로 다른 외형을 가진 동물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기적으로 고래 그림이 육상동물보다 앞서고 있으나 시기적으로 뒤로 갈수록 육상동물의 비중이 높아지는 점 역시 특징적이다.

한 암각화에 어로와 수렵 장면이 대규모로 표현되어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어로를 주로 하는 집단은 수렵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고, 수렵을 주로 하는 집단은 어로의 비중이 적은 편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거의 비슷한 비율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같은 집단이 그린 것일 경우 그 분포 범위나 규모가 상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다른 집단일 경우 그들이 공생 관계에 있으면서 암각화가 있는 장소에서 공동 의식을 치렀음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마치 어로와 수렵 장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이를 통해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 하나에 훨씬 넓은 공간에서 벌어진 대규모 사냥 장면을 다양하게 묘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주변의 모든 집단이 참여했던 대규모 사냥대회처럼 보이기도 하며, 이만한 인원과 제물의 필요는 의례를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해준다. 이를 통해 집단 내, 집단 간의 결속력을 높이는 한편 사냥기술에 대한 교육 역시 진행되었을 것이다.

암각화가 의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주목되는 것은 암각화의 위치가 가지는 의미이다. 의례를 위한 장소였다면 위치 선정 역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면 사람들이 실제 생활하는 지역보다 깊은 위치에 벽화를 그려 의례를 진행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그렇게 깊숙한 지역이 해당 자연환경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근원이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 암각화를 그리는 행위를 통해 해당 동물들을 장악할 수 있다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구대 암각화가 위치한 태화강 상류 역시 실제 고래를 잡았을 울산만으로부터 깊숙이 들어온 지역이므로, 고래잡이의 성공을 기원했던 것으로도 추측하고 있다.

4 암각화의 의의와 가치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암각화이자 선사시대 수렵·어로의 모습과 의례 등을 모사한 미술로써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사례이다.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 경제, 종교활동 등을 살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그 시기가 신석기 말부터 청동기 초기라는 점에서 고조선 초기와 시대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반구대 암각화의 표현 방식이나 소재 등은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는 북방 문화권의 선사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인류사 방면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반구대 암각화는 1965년 사연댐 건립 이후 침수와 건조가 반복되면서 풍화작용이 일어나 훼손의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암각화가 위치한 곳은 대곡천이 크게 굽이치는 지점에 있는데, 장마로 인해 암반이 침수되었다가 건조해지면 물이 줄어들어 드러나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암반 표면에 강물에 포함된 부유물들이 쌓이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지속은 암각화의 보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향후 지속적인 관심과 보전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