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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아우라지 여량리 유적

정선 아우라지 여량리 유적과 덧띠문토기문화

미상

정선 아우라지 여량리 유적 대표 이미지

정선 아우라지 유적 출토 유물

국립청주박물관

1 개요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바뀌며,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었다. 사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고 세상을 들썩였지만, 단순히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연도의 숫자 앞자리가 1에서 2로 바뀌었을 뿐, 다른 때보다 더 새로운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바뀌는 시점은 어떠했을까? 코로나 19의 확산과 같이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 쓰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게 하는 것 같은 큰 변화였을까? 아니면 새 천년처럼 그냥 그렇게 상징적인 변화만 있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 정선 아우라지 유적을 살펴보자.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덧띠문토기가 확인되었다. 덧띠문토기는 하남 미사리 유적에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출토되어 청동기시대로 전환되는 시점의 토기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아우라지 유적에서는 덧띠문토기와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가 출토되어 진정한 청동기시대가 시작된 것을 알린다.

2 정선 아우라지 유적

강원도 정선의 남한강 상류,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곳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이곳 남쪽 자연제방 위에 아우라지 유적이 있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긴 자연제방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는 모두 63동인데, 자연제방을 따라 열을 지어 위치한다. 하늘에서 보면 긴 네모꼴이며, 내부에는 돌이나 흙을 이용해 만든 노지가 한두 개 있는 것이 보통이다. 덧띠문토기와 겹아가리토기, 골아가리무늬와 구멍무늬가 같이 혹은 하나만 새겨진 민무늬토기, 돌로 만든 화살촉, 반달돌칼, 간돌칼 등의 석기가 출토되는데, 청동기시대의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집자리와 유물이다.

청동기시대 초기에는 지금처럼 물을 가두어 만든 논인지 보통의 밭과 같은 곳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벼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벼농사로 먹거리가 안정되고 수확한 쌀이 쌓이면서 점차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사회분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개인 혹은 집단이 농경을 위한 노동력을 조정하면서 명령하는 이들과 명령을 받는 사람들의 차이가 나타난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여량리 17호 집자리에서 발견된 청동 장신구의 의미이며, 이전 신석기시대와 차별화된 점이다. 다만 당시 농경은 생산력에 한계가 있었고, 혈연에 기초한 집단의 규모도 작았고, 간돌검과 같은 군사적 지배자의 상징물이 보이지 않는 점에서 청동기시대 초기는 개인 간 또는 집단 간에 지위의 차별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불평등을 제도화시키지는 못한 단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3 청동기시대의 개시와 덧띠문토기문화

한반도 남부에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전환되는 시기는 하남 미사리, 고성 사천리, 진주 옥방5지구, 홍천 철정리·외삼포리 등지의 유적에서 확인되는 덧띠문토기의 탄소연대측정값을 근거로 기원전 15세기 무렵을 그 상한선으로 한다. 이 시기의 문화는 덧띠문토기문화인데, 특히 하남 미사리에서는 청동기시대 토기의 특징인 바닥이 편평한 굽을 가진 토기와 함께 이전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함께 출토되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이어주는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화는 중국 요동이나 압록강 중상류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온 것으로 한반도 남부의 신석기 말기 문화와 융합되면서 농경사회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문화적으로는 돌이나 흙으로 만든 화덕 자리를 가진 네모 또는 긴네모 형태의 집자리에 덧띠문을 가진 항아리와 겹아가리·골아가리토기가 출토되며, 붉은간토기는 처음부터 확인되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며 굽이 달린 토기와 목긴항아리가 나타난다. 석기는 반달돌칼, 도끼, 화살촉, 갈돌 등이 발견되지만, 돌칼과 같은 군사적 지배자의 상징물이 보이지 않아 집단 간의 전쟁이나 통합은 아직 미약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선 여량리 17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기초로 당시의 삶을 복원해보면 도끼로 나무를 베어 땔감을 쓰거나 나무로 된 공구를 만들었으며, 반달돌칼로 곡식을 수확했을 것이다. 화살촉으로 사냥을 했고, 어망추를 그물에 매달아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집자리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장신구가 확인되었는데, 구리판을 구부려 원통 형태로 만든 길이 0.92~1.1㎝의 청동제품 4점이 출토되었다. 이것들은 구슬과 함께 발견되었으며 모양이나 크기로 보아 목걸이 같은 장신구로 생각된다. 과학적 연대측정 결과, 대략 기원전 13세기~12세기로 측정되었다. 이는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로 집자리에서 청동 장신구가 확인된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이다. 이를 통해 덧띠문토기문화는 위신재라고 불리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수 있는 귀한 물건을 소유하여 다른 구성원들과 차별화된 신분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최초의 인공 금속이다. 그리고 이런 청동기를 만들기 위한 채광과 주조, 거푸집의 제작 등 전문적인 장인집단이 존재함을 알려주는 것이고, 청동기를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청동기를 제작하는 공인과 그것을 통제하는 지배자로 이루어진 계층 사회가 나타났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4 세계사적 견지에서 본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는 이전의 신석기시대와 어떻게 다를까? 청동기시대라는 개념은 덴마크의 고고학자 크리스티안 율겐센 톰센(Christian Jurgensen Thomsen, 1788-1865)이 처음 주장하였다. 그는 덴마크 국립박물관에서 일하였는데, 역사적 기록이 풍부한 남부 유럽과 달리 북부 유럽은 기록이 잘 남아 있지 않아, 유물이나 유적의 시기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들이 금속과 함께 나오는 경우와 뼈로 만든 골각기나 돌로 만든 석기만 출토되는 사례가 있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이를 근거로 그는 삼시기법을 주창하게 된다. 바로 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의 구분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덴마크 국립박물관의 선사시대 전시실을 꾸몄다. 사실 그는 단 하나의 책을 남겼을 뿐인데, 1836년 쓰인 ‘북부 출토 유물의 가이드북(Guidebook to Northern Antiquity)이 그것이다. 이 책에서 톰센은 매우 뚜렷하게 삼시기법을 설명했고, 이것이 널리 읽히면서 짧은 시간 만에 선사시대를 구분 짓는 기준으로 발전하였다.

그의 구분 기준은 도구의 재질이었지만 이후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구분이 단순히 도구의 재질을 넘어 사회상으로 바뀌게 된다. 고든 차일드(Gorden Childe, 1892-1957)는 청동기시대를 시기적이라기보다는 기술적인 단계로 구분하였는데, ① 바퀴의 사용, ② 금속의 사용, ③ 국제교역, ④ 전업전문가 출현으로 설명했으며, 이는 4대 문명권에서 도시혁명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도시혁명이란 수확물을 체계적으로 소작농인 대중에게 받아서 집중화된 왕이나 사원의 곡물창고에 모으는 전체주의로의 변화를 의미하였다.

이렇게 도구의 재질에 대한 시기구분에서 사회상에 대한 구분으로의 연구 경향상의 변화는 한반도 청동기시대 연구에서도 동일했다.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의 존재는 강계 공귀리 유적의 발굴을 통해 처음 확인되었는데,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층과 새로운 민무늬토기층이 구분되어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청동기시대의 시작이 청동기라는 새로운 금속의 등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청동기시대 유적이라고 하여도 초기 상당 기간동안은 청동기 유물 없이 민무늬토기만 발견된다. 그런 이유로 청동기가 없는 청동기시대를 청동기시대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토기를 기준으로 ‘무문토기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한편 세계사적 견지에서 청동기시대는 계급의 발생, 대규모 전쟁, 제국의 탄생 등을 지표로 하므로, 한반도에서도 이를 근거로 청동기시대를 개념 짓자는 의견도 나타났다. 그 결과 현재는 청동기시대를 사회적 불평등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를 기준으로 살핀다. 지도자(혹은 지배자)의 지위가 자손에게로 세습되는 것인지(태생적 지위), 아니면 그 당대에 한정되는 것인지(후생적 지위)를 살피거나,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신분적인 차이(차별)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지도자는 후생적 지위에 한정되며, 강제력을 가지지 않지만 청동기시대의 지배자는 장자상속과 같은 태생적 지위와 강제력을 가진 공권력으로 변화해 간다. 이러한 변화는 귀중한 물건의 독점, 집이나 무덤을 만들 때 우월한 입지를 차지하는 것, 대형의 무덤과 건물 등을 통해 반영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가장 큰 바탕은 바로 농경이다.

우리나라의 농경은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됐다. 조, 기장 등의 작물을 밭에서 재배하는 것은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확인되는데 청동기시대와 비교했을 때, 먹거리로서의 비중은 높지 않았다. 신석기시대에는 농경을 비롯하여 수렵·채집·어로활동 등 다양한 생계전략에 의존하였고, 초기 단계의 농경이 시작되었지만 전체 식량 생산 가운데에서 비중은 낮았다. 이에 비해 청동기시대 사회는 파종에서 수확까지 농경의 거대한 사이클을 중심으로 다른 수렵이나 채집 등의 생업은 부수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였던 것이다.

5 덧띠문토기문화 사회

농경으로 집단 전체의 일 년간 먹거리를 확보하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리고 먹거리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경작지를 더 많이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농경의 사이클에 맞춘 노동력의 투입은 중요하였다. 노동력의 투입과 분배 등을 가장 확실하게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혈연관계에 기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덧띠문토기문화의 집자리는 10채 이하의 소규모 마을을 이루고 있다. 즉 몇 개의 세대공동체로 구성된 친족관계를 가진 혈연집단인 것이다. 집자리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크며 내부에 화덕 자리가 2~3개 있는 경우도 확인되기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자녀, 손자, 손녀 등 세대공동체가 공동으로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혈연집단이 강변의 습지를 농경지로 경작하며 생활을 영위해나가고 주변과 교역을 하여 청동기를 구하는 등의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마을 사이의 규모나, 소유한 물품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정선 아우라지 여량리 17호 집자리에서 청동으로 만든 장신구가 출토되었지만, 이것이 청동기시대의 지배자의 상징으로서 신라의 금관과 같이 세대를 이어 계층적 양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무기로서 군사권을 상징하는 돌칼이나 청동칼이 확인되지 않는 점도 사회적 불평등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덧띠문토기문화는 청동기를 소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차이가 출현하였고,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신석기시대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사회가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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