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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고산리 유적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 유적

미상

제주 고산리 유적 대표 이미지

제주 고산리 유적 전경 및 고산리 유적 출토 뗀 돌화살촉

제주고고학연구소,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한반도의 모습이 현재 지형으로 바뀌는 시점에 제주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 시대 유적이 등장하게 된다. 바로 고산리 유적이다.

고산리 유적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1리 일대 해발 고도 15~20m 내외의 평탄한 해안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의 당산봉과 유적 사이로는 고산리 해안 포구로 이어지는 건천(乾川)인 ‘자구내’라는 소하천이 흐른다. 이 하천의 서쪽 해안 대지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 1987년 고산리 해안가에 인접한 지역에서 마을 주민이 뗀석기와 덧무늬토기(융기문토기)를 발견하여,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신고함에 따라 유적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유적의 중요성이 인정받아, 1998년 사적 제412호로 지정되었다.

고산리 일대에는 제주도에서 보기 드문 낮고 평평한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으며, 용천수가 해안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마실 수 있는 물이 풍부해서, 신석기 시대 이후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고산리 유적은 후기 구석기시대 최말기에서 신석기 시대 초기 문화로 이행되는 전환기의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유적이며, 후기 구석기 시대의 좀돌날 문화가 지속되면서 초창기 신석기 시대의 산물인 양면 떼기의 석촉과 인류 초기의 토기가 출토되는 복합적인 문화 양상을 띠고 있다. 따라서 고산리 유적은 우리나라의 초기 신석기 문화의 실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2 우리나라 최초의 토기, 고산리식 토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최초의 토기는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만들어졌을까? 토기는 일반적으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구분해 주는 중요한 유물 중 하나이다. 토기는 점토를 이용한 화학적 변화의 적용이 용기의 형태로 나타난 도구이다. 토기는 긴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온난해 지면서, 주변에 있는 식물과 동물도 변화해가는 상황에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해가기 위해 발명한 도구이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 토기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토기는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로 고산리식 토기라 부른다. 이 토기는 동북아시아에서 발견되는 가장 이른 단계의 토기들과 매우 비슷하다. 고산리식 토기는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중 적갈색의 무늬가 없는 토기로, 생김새는 바닥에서 완만하게 올라가거나 한번 꺾여 올라가는 바리 형태가 기본이다. 바닥은 주로 납작하고, 전체적으로 20㎝ 이하의 소형 토기이다. 고산리식 토기는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발견된 특징적인 양식의 토기이기 때문에 유적의 명칭을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고산리식 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토기의 바탕흙에 벼과 식물로 추정되는 식물성 첨가제를 섞은 것이다. 토기에 식물성 첨가제를 섞은 경우는 세계적으로 볼 때 선사 시대 이래 다수 확인되지만, 동북아시아 신석기 시대로 국한하면 토기의 발생과 가장 큰 관련이 있다. 러시아, 중국, 일본 등에서도 토기의 바탕흙에 식물성 첨가제가 발견되는 사례는 대체로 신석기 시대 초창기 토기이다. 고산리식 토기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이며, 이후 토기에 식물성 첨가제를 섞은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토기 제작에 있어 첨가제의 역할은 성형을 쉽게 하고, 건조 때 수축률을 낮추는 등 다양한 장점이 있다. 식물성 첨가제는 광물성 첨가제에 비해 토기를 제작할 때에 여러 면에서 효과적이지 못하지만, 제작의 편의성과 충격 저항도가 우수하고 상대적으로 가벼워, 이동 생활을 하는 수렵·채집민이 선호한다고 한다.

고산리식 토기는 자연과학 분석을 통해 소성 온도가 520~860℃로 추정되며, 무늬가 새겨져 있지 않고 토기의 표면도 거친 경우가 많아, 제작 과정이 비교적 단순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산리식 토기의 바탕흙에 섞인 식물성 섬유질의 종류는 일년생 초지의 예새와 늪지형 갈대류, 습지형 맥문동류 등이다. 또한 짐승 털(獸毛)로 보이는 동물성 섬유질의 흔적도 간혹 확인된다.

3 고산리 유적의 출토 석기와 생계 방식

지금까지 고산리 유적 발굴에서 출토된 석기는 떼어진 조각을 포함하여 18,000여 점이고, 지표 조사에서도 6,200여 점의 석기가 수습되었다. 유적에서 조사된 석기로는 뗀 석촉을 비롯해 간 돌도끼, 그물추, 갈돌, 갈판, 공이, 홈돌 등이 있으며, 옥으로 만든 둥근 귀걸이(결상이식)도 출토되었다.

고산리 유적에서 가장 주목되는 석기는 석촉이다. 활과 석촉은 환경 변화의 적응 과정에서 새롭게 나타난 사냥 도구로, 작지만 날쌘 동물들을 먼 거리에서도 정확하게 잡을 수 있는 효율적인 도구이다. 석촉은 고산리 유적의 전체 제작 석기 중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신석기 시대 초창기에 활을 이용한 활발한 수렵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산리 유적의 석촉은 눌러떼기 방식으로 양면을 떼어내면서 형태를 잡아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초창기의 석촉은 대체로 길이가 2~3㎝ 내외이며, 무게는 2g 내외이다. 석촉은 슴베가 있는 것, 슴베가 없는 것 등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눈에 띄는 것은 물고기 모양의 석촉이다. 슴베가 있는 석촉이 없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중에서도 물고기형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이 물고기 모양의 석촉은 수렵뿐만 아니라 어로 활동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찌르개는 전체 제작 석기 중에 5% 미만으로, 비교적 적은 수량이 출토되었다. 석촉과 마찬가지로 양면을 떼어내는 방식으로 만들었으며, 대부분 길이가 5㎝ 이상이다. 형태적으로는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3 : 1 이상 되는 석기들이다. 찌르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는 대체로 낙엽 모양(유엽형)이 출토되며, 신석기 시대 초창기에서는 소형화되고 마름모, 타원, 삼각형 등 형태도 다양화된다.

고산리 유적에서는 다수의 갈돌과 갈판이 출토되었다. 신석기 시대 초기의 갈돌과 갈판은 밤이나 도토리 등의 견과류, 칡이나 고사리 등 뿌리 채소를 분쇄, 가공하는 작업 등에 이용되었던 도구로 보인다. 이처럼 식물성 식료가 다양화하고 가공 작업이 증가하는 현상은 주변 환경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밖에도 고산리 유적에서는 목가공용 도구인 간 돌도끼, 간석기를 제작하기 위한 숫돌 등도 조사되었다.

고산리 유적 석기의 또 다른 특징은 작은 돌날 몸돌과 돌날의 존재이다. 작은 돌날 몸돌은 구석기시대 후기의 석기 제작 기법 가운데 기획성이 가장 뛰어난 생산 방법 중 하나이다. 고산리 유적의 작은 돌날 몸돌 가운데 대체로 정형적인 양면 조정의 쐐기형은 거의 보이지 않고, 한 면만 조정하거나 생략된 부정형인 형태가 대부분이다.

고산리 유적 석기 구성의 특징은 후기 구석기시대와 신석기 시대가 혼합된 석기 구성과 제작 기술을 가진 것이다. 제작 과정 중인 석기와 폐기 석재가 많으며, 주변에 석재 산지가 분포하고 있어 석기 제작 관련 유적의 성격을 띤다. 또한, 수렵구와 조리구의 비율이 높다. 수렵구 중 석촉의 비율이 매우 높으며, 다양한 형태로 확인되지만 모두 뗀 석촉이고, 간 석촉은 한 점도 없다. 농경구로 분류되는 굴지구도 출토되지 않았다. 고산리 유적은 구석기 시대 후기의 최말기 작은 돌날 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 토기와 석촉을 활발하게 사용한 우리나라 초창기 신석기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고산리 유적의 석기를 통해 초창기 신석기 사람들의 생업 활동을 유추해 보면, 후기 구석기 시대 전반에 걸쳐 생업의 중심이 되었던 수렵 활동은 신석기 시대 초창기에서도 수렵 도구의 비중이 매우 높게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로 활동에는 작살과 물고기형 석촉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발달된 갈돌과 갈판은 채집 활동이 수렵이나 어로 생활 못지않게 중요한 식료 공급 방식으로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굴지구가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뿌리 식물류보다는 도토리와 같은 견과류가 주요 채집 대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물추를 이용한 그물 어로는 가장 이른 시기가 지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고산리 유적은 정착 생활터인가? 임시 거처인가?

2012년부터 제주문화유산연구원(5차례)과 제주고고학연구소(2차례)가 여러 차례 고산리 유적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런데 두 기관이 발굴한 지역의 유적 양상이 서로 다르게 조사되어, 고산리 유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논란이 되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고산리 유적이 정착을 위한 생활 터전이었는지, 아니면 임시 거처인가이다.

우선 고산리 유적을 정착 생활 터전으로 본 견해는 고산리 신석기인들이 중소형 초식 동물의 수렵, 수산 자원의 활용, 견과류의 획득, 그리고 자생 식물의 자원화를 통해 반정착의 조건을 충분히 갖출 수 있었다고 보았다. 이 견해의 근거는 제주도의 지리적 환경과 신석기 시대 초창기 유적의 분포를 살펴보면, 고산리 유적과 동일한 시기에 형성된 제주도의 다른 유적이 2~3일 이내에 왕복이 가능한 거리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고산리 주변에서 조사된 동일시기의 유적들은 고산리 유적에서 정착하면서, 주변 지역으로 수렵과 채집 활동을 위해 일시적인 방문으로 조선된 유적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많은 양의 석기는 수렵을 위한 장소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 석기의 가공과 제작을 위한 석기 제작장으로 활용되었다고 보고, 이러한 석기 제작장은 대부분 정주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로, 고산리 유적에서 확인된 다수의 구덩이 유구는 집자리라고 판단하였다.

한편, 앞의 유적 성격에 반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앞서 정착 생활 터전으로 본 견해의 가장 핵심적인 근거인 고산리 유적에서 조사된 집자리에 대한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출발한다. 고산리 유적에서 집자리로 보고된 다수의 유구는 실제로는 인위적인 구조물이 아닌 제주도의 지형 특성상 나타난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고산리 유적 출토 석기의 특징으로 보아, 고산리 신석기인들은 이동 생활을 하면서, 수렵과 채집 활동으로 식량 자원을 주로 획득하였다고 보았다. 반면 그물추의 양도 많지 않고, 낚시 관련 도구도 출토되지 않아 해양 자원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고는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굴지구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식물성 식량 자원도 견과류 중심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석기 구성의 특징과 더불어, 넓은 범위에 유물이 산재해 있고 집자리 등의 유구가 빈약한 것으로 볼 때, 고산리 유적은 이동성이 높은 수렵 채집 집단에 의해 반복적으로 점유되어 형성된 유적으로 판단하였다.

고산리 유적은 최근 발굴 조사된 유구의 성격과 출토 유물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로 고산리 신석기인의 생활 방식에 대한 견해도 차이를 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신석기 시대 가장 이른 시기의 매우 중요한 유적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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