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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돌날 석기

후기 구석기 시대의 하이테크(또는 하이테크놀로지)

미상

좀돌날 석기 대표 이미지

대전 노은동 유적 좀돌날 석기(좀돌날몸돌과 좀돌날)

연세대학교 박물관

1 개요

좀돌날 석기는 수만 년 동안 끊임없이 지속된 기술 혁신 과정에서 탄생한 후기 구석기 시대의 최첨단 도구이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고도로 발전된 석기 제작 기술을 보여주는 매우 작은 크기의 석기로서, 뼈 또는 뿔, 나무 등에 장착하여 결합 도구(composite tool)의 날로 이용되었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눌러떼기 기술을 활용하여, 크기가 일정하게 규격화된 좀돌날이 제작되었다.

2 좀돌날 석기의 정의

좀돌날 석기는 좀돌날(micro-blade)과 잔손질된 좀돌날, 좀돌날을 떼어낸 좀돌날 몸돌(micro-blade core)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좀돌날은 세석인(細石刃) 또는 잔돌날이라고도 부르며, 프랑스 고고학자 자끄 틱시에(Jacques Tixier)의 분류처럼 너비가 12㎜ 이하이고, 길이가 너비의 2배 이상인 매우 작은 돌날이라는 정의가 일반적이다. 좀돌날 몸돌은 계속하여 좀돌날을 떼어내어 능선이 규칙적이고 서로 나란한 떼기면을 지닌 작은 돌날몸돌로서, 세석인핵(細石刃核), 잔돌날 몸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좀돌날은 길이 2~5cm이고, 너비 0.4~0.8cm이다. 손으로 잡기에도 매우 작으며, 대부분 눌러떼기 기술로 떼어진 좀돌날로 조사되었다. 좀돌날 제작에 있어 눌러떼기 기술의 사용 여부는 좀돌날 몸돌과 좀돌날에서 남아있는 흔적들의 특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좀돌날의 양옆 가장자리와 등면에 남아있는 능선이 거의 평행을 이루듯이 정연하다. 이 형태는 좀돌날 몸돌의 좀돌날 뗀면에도 동일하게 반영되어 나타난다. 둘째, 좀돌날의 두께가 매우 얇고, 옆면 형태가 직선을 이루고 있다. 셋째, 좀돌날 굽은 매우 작고, 대부분 한면 또는 여러면을 가진 점굽 모양이다. 넷째, 혹은 잘 발달하지만 짧고, 굽 뒤쪽에 작은 입술이 존재한다. 다섯째, 뗀각은 대개 80~90° 정도를 이루지만, 간혹 90° 이상인 경우도 있다. 다섯째, 좀돌날의 굽 앞쪽과 좀돌날 몸돌의 뗀면 부분에 좀돌날을 떼기 전 문지르기 기술이 적용된 흔적이 남아있다.

3 좀돌날 석기의 제작 기술 및 기능

좀돌날 석기의 돌감은 주로 응회암, 유문암, 이암, 혼펠스, 혈암, 흑요석 등이 사용되었으며, 수정과 석영도 드물게 이용되었다. 특히 천연유리라고 할 수 있는 흑요석은 작고 세밀한 좀돌날을 만들기에 매우 적합하지만, 돌감 산지가 백두산 지역 등 유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돌감에 비해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현재 30여 곳의 유적에서 흑요석으로 제작된 좀돌날 석기가 확인되었으며, 시기적으로 볼 때 좀돌날 석기 제작 기술의 확산과 흑요석의 사용과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좀돌날 몸돌의 형태는 배 모양, 타원형, 삼각형, 사각형, 사다리꼴, 원뿔형, 원추형 등 다양하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옆면이 배 모양 또는 타원형이고, 단면은 대부분 쐐기형이다. 대체적으로 배 모양·타원형·삼각형 → 사각형·사다리꼴 → 원뿔형·원추형 순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특정 시기 또는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좀돌날 몸돌의 제작 방법을 정리하였다. 특히, 좀돌날 몸돌의 형식 분류 연구가 가장 활발한 일본에서는 유베츠, 오쇼로코, 란코시, 토게시타, 호로카, 야데가와, 히로사토 기법 등으로 세분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좀돌날 몸돌의 기술 형태적 특징에 따라 수양개 기법, 석장리 기법, 집현 기법, 하화계리 기법, 상무룡리 기법, 금성 기법, 장흥리 기법 등 유적별로 나누거나, 쐐기형, 배밑모양, 능주형, 새기개형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좀돌날 몸돌을 제작하는 첫 단계는 준비된 몸돌을 만드는 작업이다. 준비된 몸돌을 만들기 위해 양면 손질이 적용된 일명 수양개 기법은 좀돌날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가장 대표적인 제작 방법으로서, 먼저 준비된 몸돌을 비대칭하게 양면 손질한 다음 때림면을 마련하고 계속해서 좀돌날을 제작한다. 이와 같은 양면 손질 좀돌날 제작 방법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단양 수양개, 포천 늘거리, 대구 월성동, 진주 장흥리, 남양주 호평동, 장흥 신북 유적 등이 있다.

한편, 후기 구석기 시대의 좀돌날 석기의 제작은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떼기 기술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게 사용되었다. 유럽과 서남아시아 지역의 경우 이른 시기부터 좀돌날을 제작하였지만, 후기 구석기 시대 동안에는 거의 대부분 직접떼기로 좀돌날이 떼어졌으며, 중석기 시대 또는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눌러떼기가 등장한다.(직접떼기는 망치로 쳐서 돌을 떼는 수법이고, 눌러떼기는 누름기로 지그시 눌러 떼는 수법을 말한다) 반면에 동아시아 지역은 눌러떼기에 의한 좀돌날 제작이 후기 구석기 시대에 이미 광범위하게 일반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현재 눌러떼기에 의한 좀돌날 떼기의 기원은 남부 시베리아, 몽골, 북중국, 한국, 일본, 연해주 지역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으며, 동아시아 지역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서남아시아와 유럽으로, 동쪽으로는 알래스카와 북미 지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눌러떼기에 의한 좀돌날 제작의 성공 여부의 가장 중요한 필요 조건 가운데 하나는 좀돌날 몸돌의 고정이라고 할 수 있다. 포천 중리 용수재울 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 좀돌날 몸돌의 좀돌날 떼기면에 인접한 양 옆면에서 동일한 미세 흔적이 사용흔 분석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 흔적은 좀돌날을 눌러떼기로 제작하기 전에 좀돌날 몸돌의 몸체를 고정시켰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눌러떼기에 의한 좀돌날 생산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종종 좀돌날 몸돌에 열을 가하기도 하였다. 포천 중리 용수재울 유적에서 출토된, 옥수로 만든 좀돌날 몸돌에서 열처리로 인한 내부 균열과 광택 현상이 관찰되기도 하였다.

좀돌날은 그 자체로 사용되기보다는 홈이 파인 뼈 또는 뿔, 나무 등에 끼워 결합 도구의 부속품으로 이용된다. 좀돌날 석기가 실제 장착된 예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출토되지 않았지만, 프랑스의 경우 후기 구석기 시대의 뼁스방(Pincevent), 가렌느(Garenne), 라스코(Lascaux) 유적에서 출토되었고, 북유럽과 시베리아, 아시아, 북미의 중석기와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끼워넣기, 묶기, 접착제 사용 등 여러 방식으로 뼈와 뿔, 나무에 장착된 좀돌날 석기가 여럿 보고되었다. 좀돌날 몸돌에서 떼어낸 좀돌날의 모양은 곧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 약간 휘어진 경우가 많아 위 끝과 아래 끝부분을 제거하고 남은 일정한 크기의 좀돌날을 결합 도구에 끼워 사용하였으며, 날이 파손된 경우 해당 좀돌날만 교체하여 결합 도구의 기능을 지속 가능하게 하였다.

좀돌날은 유럽에서 흔히 확인되는 등손질 좀돌날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 특별한 손질 없이 장착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이므로, 소재이자 그 자체가 도구인 석기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는 듯하다. 잔손질된 좀돌날은 매우 적은 편인데, 호평동, 하화계리 작은솔밭, 부평리, 청호 유적에서 확인되기도 하였다. 좀돌날을 사냥 무기로만 규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석기의 쓴자국 분석(use-wear analysis)에 따르면, 좀돌날석기가 창끝 또는 찌르개의 미늘뿐만 아니라 칼날 등 다양한 기능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4 좀돌날 석기의 제작 시기 및 분포

24,000~20,000 BP에 형성된 첫 번째 토양쐐기빙하기 때 춥고 건조한 기후 환경으로 인해 토양층이 다각형으로 균열되는 현상가 발달해 있는 암갈색 점토층에서 좀돌날 석기가 출토되는 유적은 포천 중리 용수재울, 포천 늘거리, 남양주 호평동, 공주 석장리, 단양 수양개 유적 등 약 20곳이다. 첫 번째 토양 쐐기 포함층의 윗층에서 확인되는 유적은 철원 장흥리, 홍천 하화계리, 대전 노은동, 임실 하가, 순천 월평, 장흥 신북, 부산 중동·좌동, 진주 집현 유적 등 40여 개소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후자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은 좀돌날 석기 제작 기술의 전통이 20,000 BP 전후로 급속히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전자에 해당하는 유적이 주로 한반도의 중부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호남과 영남 지역 등 남부 지방까지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분포 양상은 좀돌날 석기 제작 기술의 확산 방향을 알려주며, 흑요석 돌감의 확산과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술 확산의 시기와 원인은 절대 연대 측정 결과와 토양쐐기 구조의 특성으로 보아, 마지막 빙기 최성기의 혹독한 기후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흑요석 돌감의 사용과 눌러떼기에 의한 좀돌날 석기의 제작 등 두 가지 기술적 요소가 모두 확인되는 남양주 호평동 유적(23,900±400BP, 24,100±200BP), 인제 부평리 유적(24,710±130BP)의 사례로서 현재까지는 좀돌날 석기 제작 기술의 상한을 약 25,000BP로 볼 수 있다. 최근 포천 늘거리 유적에서 흑요석과 눌러떼기의 좀돌날이 출토되는 암갈색 점토층에서 채취한 숯 시료가 31,590±290BP, 33,060±290BP로 연대 측정되어, 그 시점이 약 30,000BP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5 동아시아 지역의 좀돌날 석기 문화

시베리아 바이칼 지역에서 좀돌날 제작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유적은 톨바가(Tolbaga) 유적이다. 이 유적의 4층에서 34,860±2,100 BP, 27,210±300 BP에 해당하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돌날 몸돌과 부정형의 좀돌날 몸돌도 함께 출토하고 있다. 따라서 바이칼 지역 좀돌날 석기의 제작이 약 30,000 BP 전후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아직 비체계화된 부정형의 좀돌날 몸돌만 확인되고 있다.

북중국의 경우 스위(峙峪) 유적에서 방사성 탄소 연대의 측정 결과 28,945±1,370BP로 나타나고, 좀돌날과 좀돌날 몸돌이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기술적으로 볼 때 눌러떼기가 아닌 직접떼기 기술이 적용된 작은 돌날 몸돌에 가깝다. 북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좀돌날 석기가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시지탄(狮子滩) 12지점에서는 19,375±60BP, 16,050±160BP의 연대가 측정되었고, 좀돌날 몸돌, 좀돌날, 밀개, 긁개 등이 출토되었다. 좀돌날 몸돌의 형태로는 원추형, 쐐기형, 배모양, 부정형 등이 있는데,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후기 구석기 시대 말기에 주로 나타나는 부정형 좀돌날 몸돌이 출토되는 현상이 특징적이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돌날 석기 문화로 알려진 수이동거우(水洞溝) 유적의 경우 12지점에서 좀돌날 석기 제작만 나타나고 있고, 연대는 약 11,000~12,000 BP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에서 좀돌날 석기 제작의 출현이 가장 이른 곳은 가시와다이(柏臺)Ⅰ유적으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9,850~20,790 BP로 나타났다. 그리고 피리카(美利河) 1유적에서 란코시형 좀돌날 몸돌을 공반한 석기군이 19,380±380 BP로 측정되었다. 일본에서 홋카이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20,000 BP 이상의 연대를 가진 좀돌날석기 관련 유적은 현재까지 없다. 한편, 혼슈 지역에서 가장 이른 요시오카(吉岡) 유적군 B구(區)의 연대는 12,960±120~16,860±160 BP이다. 이와 같이 일본 열도의 경우 홋카이도 지역을 제외하면 환동해 지역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좀돌날 석기 제작 기술이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정한 돌감에서 가능한 한 작고 가벼운 많은 석기를 제작하고, 뼈 또는 나무와 같은 다른 재질의 도구에 결합하여 사용하였던 좀돌날 석기는 석기 생산의 효율성과 사람들의 이동성을 최대한 높인 구석기 시대의 최첨단 기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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