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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대평 유적

진주 대평 유적과 번개무늬가 그려진 토기편

미상

진주 대평 유적 대표 이미지

진주 대평 유적 전경

국립진주박물관

1 개요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원류는 어디일까? 자체적으로 발전한 것일까? 아님 외부에서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일까? 외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어디에서 기원하며, 어느 정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더 큰 의문을 줄 수 있는 자료가 진주의 남강댐 건설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남강댐은 진주시의 식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1967년 만들어진 진양댐을 더 확장한 것이다. 1975년부터 계속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지만, 특히 1995년부터 1999년까지의 조사에서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넓은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을 발굴하게 되었다. 그 결과 환호, 집자리, 경작지, 무덤, 지상건물지, 제의장소, 옥·석기 제작 공방, 토기 가마 등 다양한 흔적을 찾았고, 청동기시대가 시작될 무렵부터 끝날 때까지 사람들의 삶을 좀 더 명확하게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남강댐 아래의 평거동을 비롯한 진주 일원의 발굴조사 결과는 한반도 남부의 청동기시대에 대한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2 청동기시대의 도시 대평 마을

대평 유적은 청동기시대 전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대규모 마을 유적으로 밝혀졌다. 특히 집자리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마을이 아니라 복합적인 유적으로서 계층 분화를 보여주는 무덤, 엄청난 넓이의 경작지, 마을을 보호하거나 경계를 나타낸 환호와 같은 거대한 공공시설물 등이 발견되었다.

대평 유적은 어은 1·2지구와 옥방 1~9지구로 나누어서 조사되었으며, 이른 시기의 유적은 주로 어은 1지구와 옥방 5지구에 분포한다. 이 두 지역은 하천에 바로 접하지 않고 안쪽에 형성된 자연제방에 마을이 만들어졌으며, 제방을 따라 집자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을 지어 만들어지거나 모여있다. 이 중 65호 집자리에서는 가지무늬토기 8점이 출토되었다. 가지무늬토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남해안 지역에 한정되어 출토되고 무덤에서도 한 두 점만 확인되는데 비해, 이렇게 많은 숫자의 토기가 한 장소에서 출토되어, 이곳에서 가지무늬토기를 만들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밭도 이른 시기부터 확인되는데, 낮은 지역을 경작지로 하고 홍수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그보다 높은 자연제방에 주거공간을 마련하였다. 무덤은 두 개 밖에 확인되지 않으며, 뚜렷하게 묘역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다음 시기에는 옥방 1·7지구와 옥방 4지구의 환호를 중심으로 하는 두 마을, 어은과 옥방으로 구분된다. 이 시기에는 환호 안쪽에 집자리가 위치하고 바깥에는 무덤, 경작지, 토기가마,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어 환호를 경계로 공간 구분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옥방 4지구에서는 마을을 둘러싼 2중의 환호가 발견되었는데, 단면 ‘V’자형에 폭 2∼3m, 깊이 150㎝ 정도의 도랑을 파서 둘렀다. 이웃한 옥방 1지구에서는 모두 3열의 환호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것들은 크기나 깊이로 보아 모두 외부의 적에 대한 방어시설로 생각되며, 환호 안쪽에는 일 년간의 수확물을 저장하기 위한 식량구덩이가 있다. 이 구덩이 주변에도 보호를 위해 따로 환호를 만들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의 집자리는 네모나 원형의 집자리로 가운데 타원형의 구덩이를 가지고 있다. 어은마을에는 야외에서 공동 취사를 하던 노지와 식료품을 저장하던 구덩이가 모여있는 곳이 있는데, 공동 생활을 위한 곳으로 인근의 공터 역시 주민들이 모여 공동의 작업이나 회의를 하던 광장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어은 1지구의 무덤도 주목되는데 경작지의 등고선과 나란하게 돌널무덤을 일정한 간격으로 열을 지어 배치하여 생활하는 공간과 경작지를 구분짓고 있다. 이는 주거공간과 생산공간의 분리라는 경계의 의미도 있지만 한해의 농사가 잘되기를 선조들에게 기원하는 행위와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경작지로는 밭이 확인된다. 과거의 밭도 현재와 같이 고랑과 이랑이 있는데, 고랑의 폭은 35cm 내외, 이랑의 폭은 50cm 내외로, 밭의 가장자리를 따라 도랑을 파 경계를 나눈 흔적이 확인되었다. 여기서 키운 것들은 출토된 곡물의 흔적으로 보아 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쌀, 기장과 함께 콩과식물도 채집되었다.

이외에도 돌을 모아놓은 곳이 있는데, 구덩이를 파고 돌을 쌓은 것도 있지만, 평지에 돌무지만 쌓은 것도 발견된다. 여기서는 도구를 만들려고 가져온 석재라든가 만들다만 석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일종의 공동 석기제작소로 추측된다.

3 900km가 넘게 떨어진 지역들

대평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의 특징적인 유물은 붉은색 칠이 된 목이 긴 항아리, 겹아가리 토기와 몸통에 가로로 선이 그어진 그릇 등이 있다. 붉은색 칠이 된 목이 긴 항아리는 점차 양파와 같은 모양의 붉은간토기로 바뀐다. 겹아가리 토기는 한반도 서북부에서 보이는 것과 조금 다른 것으로 대접과 같은 형태이다.

몸통에 가로 선이 그어진 토기는 겹아가리 토기에서 변화한 것인데, 생물의 진화과정에서의 기관과 같이 원래 겹아가리 토기에 있던 이중의 점토띠가 점차 사라지면서 점토띠의 경계를 그려놓은 것이다. 생물학에서 흔적기관을 통해 진화의 방향을 찾는 것과 같이, 고고학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통해 변화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런 토기들은 청동기시대의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덧띠문토기와 함께 발견된다. 이들은 덧띠문토기문화를 가진 이들 중 어떤 집단이 한반도 남부에 영향을 줬는지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런데 이런 붉은간토기를 비롯한 특이한 토기들은 중국 태자하(太子河) 유역의 마성자(馬城子) 문화에 속하는 유적에서 출토된 것들과 유사하다.

하지만 양 지역 간의 거리는 900km가 넘고, 한반도 내에서 태자하와 남강유역 사이를 이어줄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마성자 유적은 동굴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유명한데, 남강댐 일원에는 동굴무덤이 존재하지 않으며 유물은 유사하지만 출토되는 유구나 그 맥락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만약 관련성을 가진다면 바닷길을 따라 단번에 이동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흔적없이 중국 동북과 한반도 남부를 이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는 단지 이것뿐만은 아니다. 남강댐 바로 아래의 대평 사람들과 같은 문화를 가졌던 평거동 유적에서 발견된 번개무늬토기편도 우리의 주의를 끄는데, 이와 유사한 것이 압록강 유역의 용천 신암리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것 역시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직선거리로 600km 떨어진 진주 남강 유역에서만 확인된다.

사실 남강댐 수몰지구에서는 논이 발견되지 않았다. 논에서 재배되는 벼는 날씨와 강우량에 많은 영향을 받는 작물이다. 생장기인 여름에는 높은 온도가 필요하고, 장마와 같이 많은 비가 와야 자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도 벼의 경작은 한반도 남부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옥수수와 같은 밭작물을 주로 경작하고 있다. 마침 대평마을에서는 대규모의 밭이 발견되었지만 논은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어쩌면 한반도 남부에 자리잡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그들이 처음 접한 청동기문화의 원류가 어딘가에 따라 논농사나 밭농사, 더 세부적으로는 벼나 콩, 팥 같은 작물의 재배의 방식도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멀리 떨어진 양 지역의 사람들이 교류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과연 어떤 이유로 멀리 떨어진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남부의 문화가 연결된 것일까? 아직 해답은 없지만 많은 고고학자들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4 갑자기 사라진 대평 사람들

청동기시대 전 기간에 걸쳐 ‘도시’를 이루며 살던 대평 사람들은 청동기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다음 시기의 토기인 덧띠토기문화의 양상은 전혀 확인되고 있지 않아 이 사람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해서 연구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중 하나의 가설은 일본으로 이주해 갔다는 것이다. 새롭게 다양한 청동기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철기를 만드는 덧띠토기문화의 사람들이 한반도 남부로 내려오면서 원래 자리잡고 있던 청동기 사람들은 새로운 초기철기사람들과 경쟁하게 되고, 그 경쟁에서 밀리면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벼농사로 대표되는 야요이문화를 꽃피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주민들이 바로 대평 유적과 관련된 사람들이라는 의견이다. 문화적으로 유사성은 충분히 인정되지만, 집단의 이주라는 대규모의 상황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히 검토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단편적으로 보이는 남강 유역의 덧띠토기문화는 이전의 대평이나 옥방마을과 비교하면 사회의 퇴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정도이다. 과연 대평 마을의 마지막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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