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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 유적

창원 다호리 1호 널무덤과 붓·손칼

미상

창원 다호리 유적 대표 이미지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붓·삭도·목간(재연품)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경상남도 창원의 주남저수지. 이곳 갈대밭에서 다호리 1호 널무덤이 발굴되었다. 도굴에 피해를 입어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도굴꾼들은 널을 열어 그 안에 있던 유물만 가지고 가고 널 아래 놓여 있던 유물들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몰라 그대로 놔두고 떠났다. 널 아래 놓여 있던 유물들만으로도 실로 놀라웠다. 중국 한나라의 청동거울을 비롯하여 오수전(五銖錢), 허리띠 등을 비롯하여 많은 양의 쇠도끼와 청동검, 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기원전 1세기대 변한의 지배자는 철기를 매개로 중국 한과 교역을 하였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출토된 유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청동기나 철기가 아닌 붓과 삭도(削刀)라 불리는 조그만 손칼이었다.

2 최초로 발견된 통나무널

다호리 유적은 주남저수지 변의 물이 많은 땅에 자리잡고 있다. 땅을 파면 물이 흥건하게 솟아나기 때문에 다호리 유적의 무덤들은 모두 물에 잠겨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덕분에 칠기나 나무로 만든 널과 같은 유기물이 잘 남아 있었다.

다호리 1호 널무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참나무로 만든 널이었다. 이전까지 나무로 만든 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모두 썩고 없어져 실제 나무널은 출토된 사례가 없었다. 그런데 출토된 나무널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다. 보통 네모난 상자와 같은 널을 상상하지만, 이것은 둥근 통나무의 반을 갈라 속을 파내어 시신 안치 공간을 만든 것이다. 뚜껑은 다시 반으로 갈라 총 세 부분으로 나뉜다.

특이한 점은 널을 옮길 때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는 구멍이었다. 널의 발치 쪽 옆면에는 ‘ㄴ’자형으로, 머리 쪽에는 위아래 각각 2개의 홈을 파서 줄을 걸 수 있게 하였다. 이런 구멍과 홈은 일본 고훈(古墳)시대에 무거운 돌이나 관을 옮기기 위해 사용한 수라(修羅)라는 도구에서 보이는 것과 유사하다. 수라는 나무 썰매와 같은 것으로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때, 그 위에 올려 놓고 줄다리기를 하듯 사람들이 줄을 당겨 짐을 옮기는 도구이다. 우리나라에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지만 청동기시대 고인돌이 많은 한반도에서도 이러한 도구가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통나무널은 중국 중원보다 더 내륙의 사천(四川)지역 전국시대 무덤에서 보이는 배모양 나무널과 유사하다. 하지만 한반도 남부와 지리적으로 너무 멀고, 중간을 이어줄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소뿔모양 청동기나 청동새기개 등 한반도 남부의 다른 유적에서 발견된 것들과 유사하기 때문에, 중국 사천(四川) 지역과 한반도 중남부 현재 창원 지역 간의 접촉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처음 확인된 나무널이지만 만든 방법으로 보아 아주 발전된 형태로, 나무널을 만드는 기술이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오랫동안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3 장례의 과정

무거운 통나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운구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라와 같은 것을 이용해 널을 끌어 옮겼을 것이다. 물론 시신과 함께 운구했는지, 아니면 널만 따로 운반해 무덤에 설치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본 스야마[巢山]고분의 사례나, 널 아래 남겨진 동아줄의 흔적을 볼 때 시신을 운구하는 용도로 널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다호리 1호 널무덤은 이전과 달리, 아마도 다른 곳에서 상을 치르고 널에 시신을 안치하여 장지까지 운구한 첫 번째 사례가 된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을 통해 유추하면 먼저 죽은 이가 살던 집 근처에서 널에 시신과 부장품인 칠초동검, 철검, 나무그릇, 유리구슬 목걸이, 쇠도끼 등을 넣고 뚜껑을 덮은 다음,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나무 못을 빗장 끼우듯이 질러 넣어 고정한다. 거기에서 널의 구멍과 홈에 동아줄을 엮어 장지까지 옮긴다. 장지에는 깊이 2m가 넘는 구덩이를 미리 파고 중앙에 요갱이라 불리는 부장품을 넣는 공간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요갱에는 대나무 바구니에 과일을 올린 그릇을 담아 넣고, 주변에 쇠도끼를 놓은 뒤, 마지막으로 밤을 뿌렸다.

그 뒤에 끌고 올 때 사용한 끈을 그대로 이용하여 널을 내려 자리를 잡고, 사용한 줄은 위쪽 끊어버리고 아래쪽은 그대로 놔두었다. 만약 시신이 운구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래쪽의 줄을 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시신이 있기 때문에 널을 손대지 않고 그냥 그대로 줄을 놔둔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으로 널과 구덩이 사이의 공간에 흙을 채우고 거기에 칠기와 철기 등을 함께 놓는다. 여기에 넣은 것들은 죽은 이와 가까운 사람들의 물건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여러 번에 걸쳐 죽은 이를 위로하기 위해 물건들을 바쳤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흙을 덮어 얕은 봉분을 쌓아 무덤을 완성했다.

4 문자생활을 하는 지배자층

그렇다면 이러한 무덤을 만들게 한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거운 통나무널을 끌어 장지까지 옮기고, 무덤 안에서 당시 사치품인 중국 한나라의 청동거울이나 오수전, 허리띠 같은 주요 유물이 발견되므로 이 지역을 다스리던 지배자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전까지 한반도 남부의 지배자는 함평 초포리나 화순 대곡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잔무늬거울과 청동방울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방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무당과 같은 샤먼적인 성격이 강한 지배자였다. 하지만 다호리 1호 널무덤의 주인공은 전혀 달랐다. 그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 중에는 붓과 동그란 고리가 달린 자그마한 손칼이 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붓은 글을 쓰는 도구이다. 삭도 혹은 서도(書刀)라고도 불리는 칼은 당시 종이가 귀했기 때문에 대나무나 나무 등을 깎아 만든 목간, 죽간에 글자를 써서 기록할 때, 글자가 틀리면 그 표면을 깎아 버리는데 사용한 일종의 지우개였다. 물론 이 붓과 지우개의 주요한 용도는 철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과정 속에서 일종의 영수증을 작성하는 도구였다고 생각된다. 즉 다호리 1호 널무덤의 주인공은 기록을 남기고, 문자를 사용하고, 철을 매개로 교역을 하는 지적인 지배자였던 것이다.

사실 한반도에서도 다호리 유적보다 이른 시기의 유적에서 청동새기개가 발견된 바 있다. 그것이 중국에서는 지우개 역할을 하였음을 알고 있었지만 단지 새기개라고 분류했었다. 그 이유는 짝을 이루는 것이 도끼나 끌과 같은 공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원 다호리 1호 널무덤에서는 붓이 출토되기 때문에 이 손칼이 단순한 공구가 아니라 목간을 깎아 지우는 지우개 용도로 사용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다호리 유적의 소멸

갈대밭의 나라인 다호리 유적은 나무로 만든 널을 쓰는 시기에만 무덤이 만들어진다. 그 이전 시기의 유적도 없고, 그 다음 시기의 것들도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널무덤은 평지와 언덕의 경계에 만들어지고 그 다음 시기의 덧널무덤은 언덕 위에 만들어진다. 다호리 주변의 모든 언덕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덧널무덤은 보이지 않았다.

이후 다호리에서 확인된 무덤은 5~6세기대의 돌덧널무덤이다. 2~4세기의 나무덧널무덤은 보이지 않고 이후의 무덤만 관찰된다. 기원전 1세기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무덤이 자리잡고 있던 다호리 유적이 기원후 2세기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웃한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 기원 전후한 시기에 눈에 띄는 나무널무덤은 없지만, 162호 무덤처럼 기원후 2세기 덧널무덤이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일찍 출현하는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일부 사람들은 창원 다호리의 사람들이 김해 양동리나 대성동으로 이주했다는 의견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왜냐하면 김해 대성동이나 양동리에도 널무덤이 있어서 다호리 1호 무덤이 만들어질 때 이미 사람들이 거기에 터를 잡고 있었고, 널무덤에서 덧널무덤으로의 변화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만약 새로운 지배 집단이 이주했다면 기존의 것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무덤에도 반영된다.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몰락한 가야에서 신라계통의 무덤과 그릇이 출토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러한 것들은 전혀 발견되지 않아 다호리 사람들의 동향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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