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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진라리 유적

청도 진라리 유적과 간돌칼

미상

청도 진라리 유적 대표 이미지

청도 진라리 유적 출토 간돌칼

국립경주박물관

1 개요

경상북도의 가장 남쪽. 밀양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청도. 청도를 가로지르는 다로천 하류 진라리의 고인돌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간돌칼이 출토되었다. 보통 간돌칼의 두 배가 넘는 크기로 길이가 66.7cm에 이르며, 손잡이는 넓게 벌어져 있어서 손으로 쥐기도 어렵고 휘두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큰 칼을 만들게 된 것일까?

2 청도 진라리 유적

낙동강과 만나는 다로천을 따라 많은 고인돌이 알려져 있다. 다로천 하류에 위치한 진라리 유적에서도 발굴조사 결과 고인돌 5기와 원래 자리에서 옮겨진 덮개돌 4개, 집자리 93채, 고상건물 3채 등 모두 136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1호 고인돌의 덮개돌은 8톤에 이르며, 아래에는 돌널이 만들어져 있다. 돌널 주위에는 돌을 깔아 무덤의 경계를 표시하였다. 3호 고인돌은 1호와 달리 덮개돌이 없어진 상태였다. 여기에서 돌화살촉 10점 등과 함께 확인된 간돌칼 1점은 한반도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큰 간돌칼이었다.

모두 93기가 확인된 집자리는 평면 형태에 따라 3개의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은 평면이 아주 긴네모꼴 형태이다. 이 가운데 가장 큰 B1호 집자리는 크기가 가로 1,470cm, 세로 444cm, 깊이 20㎝로, 내부 면적이 50.3㎡에 이르는 대형의 것이다. 벽도랑과 돌두름식 화덕자리가 집안에 설치되어 있으며, 특이하게도 내부에서 많은 유물이 생활하던 상태 그대로 발견되어, 화재나 홍수 등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집과 가재도구를 놔두고 떠난 것으로 추측케 한다. 여기에서는 골아가리짧은빗금무늬와 골아가리구멍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으며, 돌화살촉, 도끼, 반달돌칼 등도 확인되어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생계 경제를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긴네모꼴 형태로서 대부분의 집자리가 여기에 속한다. 크기는 A4호 집자리가 가로 560cm, 세로 320㎝, A7호 집자리가 가로 468cm, 세로 252cm, 깊이 25㎝ 등으로 평균 면적이 20.1㎡이다. 집안에는 벽도랑 없이 벽기둥만 보이며, 내부에서는 출토된 유물은 첫 번째 유형의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유사하다.

세 번째 유형은 평면이 둥근 송국리형집자리와 네 모서리의 각을 죽인 네모난 집자리로서, A1호 집자리의 경우 지름 490cm에, 깊이가 25㎝ 정도이다. 내부에 화덕 없이 가운데 구덩이를 중심으로 양쪽에 기둥구멍이 있는 것과 가운데 구덩이가 없는 것으로 나뉜다. 유물은 바리, 항아리와 돌화살촉, 매부리형석기 등이 출토되나 그리 많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큰 간돌칼을 만들었던 이들이 바로 세 번째의 집자리에서 살던 사람으로 생각된다.

3 왜 이렇게 큰 칼을 만들었을까?

공교롭게도 청도 진라리 인근의 예전동에서는 두 자루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다. 보통 검이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 다르게 이들은 깊은 산속의 산비탈 돌무지 속에서 발견되어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장소에서 제사를 지내고 신에게 바쳐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청동검은 날이 곡선적인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으로서, 이러한 비파형동검은 시간이 지날수록 날이 날카로운 직선으로 바뀌어 초기철기시대에는 한국식동검, 즉 세형동검이 된다. 이에 반해 간돌칼은 비파형동검과 함께 발견된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 출토품의 사례와 같이 처음에는 직선적인 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갈수록 길이도 길어지고, 손잡이도 커져 실제 무기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중국의 경우 기원을 전후하여 쇠칼이 검(劍)에서 도(刀)로 바뀌게 된다. 쇠를 다루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잘 부러지지 않으면서도 더 긴 칼을 만들 수 있게 되며 나타난 변화이다. 검은 펜싱에서와 같이 주로 찌르는 공격에 사용하는 무기였지만 더 길어진 도는 휘두를 수 있게 되면서 베는 도구로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무기의 변화는 모양에도 차이를 나타내게 되는데, 검은 정확한 위치를 찌르기 위해 좌우 대칭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간돌칼이나 청동검은 모두 좌우 대칭으로 양쪽에 날을 가지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도는 한쪽 방향으로만 베기 때문에 칼날이 보통 한쪽만 있고 칼날의 끝단도 직각삼각형에 가까운 형태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칼이 서로 부딪쳤을 때 깨어지지 않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무게도 가벼워야 나타날 수 있다. 이에 반해 간돌칼을 깨어지지 않게 하려면 더 두껍게 만들어야 하고, 그러면 더 무거워지는 문제가 있었다. 즉 철로 만든 칼과 같이 베기 위한 도구로 변화하기는 어려운 조건이었던 것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손잡이이다. 원래 간돌칼의 손잡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가 명확하기 때문에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런 손잡이가 점차 거대해져, 결국 김해 무계리 고인돌이나 부산 괴정동 유적 등지에서 출토된 간돌칼은 칼날의 길이보다 손잡이가 더 커지게 된다. 즉 칼날은 줄어들고 손으로 쥐고 가눌수 없을 정도로 손잡이만 커지는 기형적인 형태로 변화한다. 무덤에 껴묻기 위해 만들거나 제사에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용도가 제한된 것이다.

4 간돌칼의 시대

한반도에서 간석기는 신석기시대부터 만들어지지만 가장 발달했던 시대는 청동기시대이다. 간석기 가운데 가장 큰 축에 속하는 간돌칼은 청동기시대에 등장하여 한국식동검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한반도를 대표하는 무기 형태의 도구였다. 청동기시대에 비파형동검도 만들어지지만 그 숫자는 적기 때문에 주요한 무기 형태를 나타내는 도구로 간돌칼이 사용된 것이다.

간돌칼은 동북아시아 중에서도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중국의 간돌칼은 유경식, 즉 슴베를 만들어 나무자루에 끼워 사용하는 방식이 많기 때문에 한반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이며, 일본에서 발견되는 간돌칼은 초기에 한반도의 간돌칼이 그대로 전해졌으나 점차 일본식의 간돌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한반도의 간돌칼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동검의 영향을 받아 간돌칼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초기의 간돌칼에는 칼날에 홈을 파 칼로 찔러서 뺄 때 잘 빠지도록 하는 피홈이 있었는데, 이러한 간돌칼의 피홈이 동검에 있는 피홈을 모방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동검과 간돌칼 중 어느 것이 먼저 출현한 것인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나오면서 동검의 영향으로 간돌칼이 만들어졌다는데에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한반도의 간돌칼은 손잡이의 형태에 따라 크게 이단병식, 일단병식, 유경식으로 나뉘어진다. 이단병식은 진라리 출토품과 같이 손잡이가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며, 일단병식은 부여 송국리 널무덤 출토품과 같이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시간에 따른 변화로서 처음에는 이단병식이었다가 일단병식으로 바뀌며, 유경식은 이른 시기부터 늦은 시기까지 별개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단병식이라 하더라도 진라리 출토품과 같이 상단과 하단 사이에 띠처럼 돌출된 부분이 있는 것은 늦은 시기에 해당된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장된 크기로 손잡이가 만들어지는데, 이는 실제로 사용되는 것들과 다른 용도에서 만들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5 간돌칼의 상징성

청동기시대 죽은 이를 위해 무덤에 넣는 것은 청동으로 만든 칼이나 창, 돌로 만든 칼과 화살촉, 구슬, 붉은간토기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많이 출토되는 것은 돌로 만든 칼과 화살촉이다. 칼은 허리춤에서 발견되는데, 살아생전에 자신이 사용하던 칼을 무덤에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살촉은 새로 만들어 넣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무기 형태의 석기를 무덤에 지닌 사람은 군사적인 지도자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간돌칼과 돌화살촉이 청동기시대 일반적인 무덤에서 발견된다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청동기시대는 신석기시대와 달리 계층이 명확히 분화되는 사회이다. 또한 벼농사로 인해 많은 곡물이 수확되었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아니면 빼앗기 위해 전쟁과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청동기시대에는 무엇보다도 싸움을 잘하는 이들이 존중받는 사회였을 것이다.

이웃한 청도 신당리 고인돌에서도 간돌칼과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무덤 안 죽은 이의 머리가 있던 곳에서는 화살촉의 머리부분이 발견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무덤을 만들기 위해 땅을 고르던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두 부분이 일부러 구멍을 내 조심스럽게 깨어진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전장에서 화살을 맞은 무덤의 주인이 바로 죽지 않고 마을로 옮겨져 화살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 도중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이와 같이 청동기시대는 통합을 위해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그런 상황 속에서 군사적 지도자가 지배자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을 간돌칼이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군사적 지도자를 상징하던 간돌칼은 의례에 사용되는 제기로 바뀌고 무기는 한국식동검이라는 더 날카롭고 강력한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간돌칼은 손잡이가 기형적으로 커지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크게 만들었기 때문인지 청도 진라리 고인돌 간돌칼의 날과 손잡이의 경계를 이루는 길쭉하게 튀어나온 부분의 한쪽이 부러진 채 발견되었다. 단순히 사용하다 부러진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부러뜨린 것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부러 부러뜨린 것이라면 무덤에 넣기전에 칼의 일부를 부러뜨리는 의례를 지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훼기라고 하는데, 지상에서 못쓰게 만듦으로써 저세상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6 왜 청동검이 아니라 간돌칼일까?

그렇다면 왜 청동기시대 지배자의 상징이 청동검이 아니라 간돌칼일까? 비파형동검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이기는 하지만 한반도 전체를 통틀어 100점 남짓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에 반해 간돌칼은 무수히 많이 출토되고 있다. 결국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지배자의 상징은 간돌칼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재료와 기술력의 문제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무래도 청동검의 재료가 되는 구리와 주석을 구하는 것보다 적절한 돌을 구하는 것이 쉬었기 때문일 것이고, 청동기를 만들려면 광석을 캐는 것에서부터 거푸집을 제작하여 쇳물을 붓는 것까지 전문적인 장인들의 기술력이 있어야 하는데 반해, 간돌칼은 돌결을 좌우 대칭으로 만드는 기술 정도로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기술이 발전하고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청동기의 제작이 일반화되는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면, 간돌칼은 의례용구로 바뀌어 점차 사라지고 무기로서의 역할은 한국식동검과 철검이 대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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