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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청[鳳城] 둥산[東山]·시산[西山] 유적

고조선 사람들이 잠든 고인돌 무덤

미상

펑청[鳳城] 둥산[東山]·시산[西山] 유적 대표 이미지

펑청[鳳城] 둥산[東山] 고인돌 유적 전경

『東北亞考古學硏究』,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1997

1 위치와 발굴조사

랴오닝성[遼寧省] 펑청시[鳳城市] 차오허도[草河街道] 관자촌[管家村] 시허자바오자둔[西赫家堡子屯]의 둥산과 시산에 위치한다. 둥산 유적은 1983년 마을 사람들이 채석을 하는 과정에 알려져 1989년과 1992년에 33기(基)의 고인돌을 조사하였고, 시산 유적은 1992년 고인돌 5기를 발굴하였다.

둥산 유적의 고인돌은 산꼭대기와 능선 끝자락에 분포한다. 14기가 있는 산꼭대기 쪽이 밀집 정도가 높으며 5~7m 거리를 두고 3줄로 축조하였다. 능선 아래쪽은 19기가 부채꼴 모양으로 분포하는데 파괴가 심한 상태에서 조사가 실시되었다.

시산 고인돌 유적은 둥산에서 서쪽으로 1㎞쯤 떨어져 있다. 고인돌은 산 능선을 따라 1줄로 분포하는데 가장 아래쪽의 1호만 동서 방향이고 나머지는 모두 남북쪽으로 자리한다.

2 고인돌의 축조와 무덤방

둥산 유적은 산꼭대기의 평평한 곳에 고인돌을 집중적으로 축조한 이후 점차 산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서 지속적으로 무덤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외형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또한 그 자체가 위엄성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이 고인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둥산 유적의 고인돌 축조에 이용한 덮개돌은 유적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재질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운반에 필요한 노동력 문제를 고려하여 결정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덮개돌의 크기는 대체로 길이 200㎝쯤 되며 두께는 40~50㎝로 비교적 두꺼운 편이다. 평면 생김새는 네모꼴이 많고 둥근꼴, 평행사변형 등 다양하다.

둥산과 시산의 고인돌은 굄돌이 없는 개석식(蓋石式)이기 때문에 덮개돌 바로 밑의 50㎝쯤 되는 지하에 무덤방이 축조되었다. 무덤방은 만든 재질과 구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먼저 무덤방의 벽을 막돌과 판자돌을 2~3층 쌓아 만들었지만 부분적으로 흙벽인 것, 돌을 쌓지 않고 4벽을 모두 흙벽으로 한 것 등 여러 가지다. 이 가운데 4벽이 흙벽인 것이 가장 많은데 이 경우 하나의 특이한 점은 무덤방 주변에 넓적한 돌을 깔아 놓은 것이다. 이렇게 일정한 범위에 돌을 깐 것은 무덤방이 흙벽이기 때문에 덮개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장자리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구조물로 해석된다.

무덤방의 평면 생김새는 긴 네모꼴이고 바닥은 판자돌을 깐 것도 있지만 둥산 3·6호 고인돌처럼 맨바닥을 그대로 이용한 것도 조사되었다. 무덤방의 바닥은 고인돌을 산꼭대기나 능선에 축조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높낮이의 차이를 고려한 것으로 밝혀졌다. 무덤방의 긴 방향은 덮개돌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고인돌 유적이 자리한 주변의 자연지세를 최대한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둥산과 시산 고인돌의 무덤방은 산줄기의 흐름과 나란한 북서쪽이나 북동쪽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고인돌을 축조한 당시 사람들이 자연에 크게 의존하며 생활하였기 때문에 자연숭배 사상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둥산 19호와 시산 1호 고인돌에서는 무덤방 바로 옆에서 딸린 널[副棺]이 조사되었다. 이 딸린널은 막돌을 2~3층 쌓아서 만든 돌덧널[小室·耳室]이었으며, 껴묻거리가 놓여 있었다. 둥산 19호에서는 돌도끼와 돌대롱의 치레걸이가, 시산 1호에서는 미송리형 토기가 찾아졌다. 이렇게 무덤방 옆에 껴묻기 위한 딸린널을 만든 것은 고인돌 사회의 사람들이 가졌던 내세관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푸란덴 솽팡 15·16·24호 고인돌에서도 조사되어 서로 비교된다.

3 고인돌에 어떻게 주검을 묻었을까?

사람의 일생은 통과의례에 따라 여러 절차를 거치는데 묻기는 그 마지막 과정이다. 고인돌을 축조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늘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주검을 처리하는 나름대로의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둥산과 시산 고인돌 유적에서도 이러한 의식을 알 수 있는 묻기 방법과 제의가 조사되었다. 묻기 방법은 먼저 무덤방의 크기와 그 과정에 따라 구분해 볼 수 있는데 바로펴묻기와 굽혀묻기 그리고 화장(火葬)을 하였던 것 같다. 바로펴묻기와 굽혀묻기는 주검과 같은 직접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무덤방의 크기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바로펴묻기의 경우 무덤방의 크기는 길이 160㎝, 너비 50㎝ 정도면 가능하다. 그런데 둥산 7·20호와 시산 1·2·5호 고인돌의 무덤방 길이는 100~130㎝ 정도이기 때문에 굽혀묻기를 하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밖의 무덤방은 길이가 160㎝ 이상이기에 바로펴묻기를 하였던 것 같다.

화장은 주검을 처리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며 선사시대부터 유행한 묻기이다. 주검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화장은 최근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많이 조사되고 있어 주목된다. 고고학적 조사 결과에 따르면 화장은 그 비용이 많이 들고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것이 아니고 특별한 경우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둥산 1·8호와 시산 1호 고인돌에서 화장의 자취가 조사되었다. 둥산 고인돌에서는 불탄 사람 뼛조각이 부분적으로 찾아진 것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먼저 화장을 한 다음 뼈를 가져왔던 것 같다. 하지만 시산 고인돌의 경우 무덤방의 바닥돌에 불탄 흔적이 있고 그 위에 많은 숯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무덤방에서 제자리 화장을 하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같은 유적에서도 이렇게 화장 방법이 다른 것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뼈의 보존에 관한 인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재의 중국 동북지역의 고인돌에서는 이러한 화장이 상당히 유행했던 장례 습속의 한 가지로 밝혀지고 있어 고인돌을 축조한 집단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이 지역의 고인돌은 고조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고조선의 사회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죽음은 그 자체가 외경스럽게 인식되었을 것이며 죽은 이를 위해 고인돌을 축조하는 일에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공동체 속에서 나름대로의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고인돌 축조 과정에 동원된 사람들을 위한 향응이나 제연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인돌 유적에서의 제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무덤방 안팎에서 나오는 토기 조각들이다.

둥산 6·7호 고인돌의 무덤방과 그 주변에서는 이러한 제의와 관련된 자료가 조사되었다. 6호 고인돌은 무덤방의 벽과 덮개돌 밑 돌 틈에서 1개체의 토기조각들이 조사되었고 7호 고인돌은 무덤방의 모퉁이에서 같은 개체의 토기조각이 찾아졌다. 이들 토기조각은 바탕흙이나 색깔, 깨어진 정도로 보아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깨뜨린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토기를 의식적으로 깨뜨려 무덤방 주위에 놓거나 뿌린 것은 당시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했던 하나의 의례 행위로 해석된다.

4 고인돌에서 찾아진 껴묻거리

축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발굴 결과 의외로 고인돌에서 껴묻거리는 많이 찾아지지 않았다. 그 결과 고인돌에 묻힌 사람의 정체성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둥산과 시산 고인돌에서는 토기와 석기, 치레걸이 등이 출토되었는데 주변의 고인돌 유적과 마찬가지로 그 수가 적다.

토기는 모래가 섞인 검은색이 많고 가끔 붉은색도 있다. 생김새는 단지[壺]와 항아리[罐] 위주이며 단지에는 밑 부분에 굽이 있는 것도 찾아졌다. 토기의 몸통에는 닭 벼슬 모양 손잡이[鷄冠耳], 가로 손잡이, 세로 손잡이 등이 있다.

토기 가운데 둥산 7·9호와 시산 1호에서 조사된 미송리형 토기[弦紋壺]와 둥산 20호의 목 단지[直領雙耳壺]가 주목된다.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의 표지(標識) 유물 가운데 하나로 북한 지역과 중국 동북지역에서 많이 찾아지고 있다. 표주박의 양쪽 끝을 자른 모양으로 목이 있는 단지이며, 목과 몸통에는 묶음식 줄무늬가 있고 몸통에는 손잡이나 덧띠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둥산과 시산 고인돌에서 출토된 이 토기는 입술, 바닥, 줄무늬에서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푸란덴 솽팡, 번시 신청쯔 등 주변지역의 고조선 시기의 고인돌에서도 조사되고 있어 그 중요성이 더해지고 있다.

목 단지는 길쭉하면서 곧은 목이 있고 몸통에는 가로 방향의 손잡이가 1쌍 있으며 그 바로 위에 문살무늬가 새겨진 좀 특이한 토기다. 이런 단지가 번시 산청쯔 동굴 유적에서도 찾아져 유적의 연대와 문화 성격을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다.

석기는 돌도끼, 돌칼, 돌끌, 돌자귀가 발굴되었다. 주로 나무를 가공하는 연모들인데 당시 사회의 건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녹송석의 돌대롱으로 만든 치레걸이도 조사되었다.

한편 둥산과 시산 고인돌에서는 무덤방에 놓인 껴묻거리에서 규칙성이 찾아진다. 먼저 무덤방에 토기를 껴묻기 할 때 완형 1점을 넣는 것이 기본이고 여러 점을 놓을 때에는 같은 기종(器種)을 껴묻었다. 또 대체로 껴묻거리는 무덤방의 한 쪽 끝에 놓았지만 둥산 6호는 양쪽 모서리에 대칭으로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즉 동쪽 모서리에는 단지와 돌도끼, 서쪽에는 단지와 돌가락바퀴를 껴묻기 하였다.

5 고인돌을 누가 언제 만들었는가?

둥산과 시산 유적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고인돌이 가장 밀집 분포하는 곳으로 개석식 고인돌[大石蓋墓]의 조사와 연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을 만든 중요한 유적이다.

고조선 시기에 널리 이용되었던 장제의 하나인 화장이 조사되었고 고조선의 표지 유물인 미송리형 토기가 발굴된 점으로 보아 이 지역의 고인돌은 고조선 사람들이 묻힌 무덤의 하나다. 이런 점에서 둥산과 시산 유적 뿐만 아니라 주변지역의 고인돌을 축조한 주체는 고조선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다.

둥산과 시산 유적의 고인돌을 축조한 연대는 미송리형 토기와 목 단지가 나오는 푸란덴 솽팡 고인돌과 번시 산청쯔 C동굴 등과 비교할 때 서기전 11세기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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