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함평 초포리 유적

함평 초포리 유적

함평 초포리 유적과 부장·매납

미상

함평 초포리 유적 대표 이미지

함평 초포리 출토 유물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작두를 타고 방울을 흔들며 무당이 굿을 하고 있다. 신은 무당의 몸에 들어가 그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지금은 무당을 사이비라고 하지만, 청동기시대의 무당은 지배자였고, 신 그 자체였다.

함평 초포리 무덤의 주인은 방울을 가지고 있다. 방울뿐 아니라 칼과 거울도 가지고 있다. 방울은 무속(巫俗)을 뜻한다. 칼은 무력, 거울은 이데올로기, 옥은 재물을 뜻한다. 제사와 정치가 하나였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의 모습이다.

2 함평 초포리 유적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나주평야가 넓게 펼쳐지고 영산강의 지류인 해보천과 조사천이 모이는 그곳에서 무덤이 발견되었다. 1987년에 주민들이 마을 안길의 진입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였지만 빠르게 신고되어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무덤은 파기도 어려운 암반층을 지면에서 아래로 갈수록 좁게 파내려갔다. 발견 당시 내부에서 돌이 많이 나왔다고 하며, 바닥에는 나무널의 흔적이 있고 그 주변에는 돌널처럼 강돌을 채워넣었기 때문에 원래는 돌무지 나무널 무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물은 무덤 바닥, 널 내부와 함께 무덤의 벽과 널 주위를 두른 돌 사이에서 출토되었다. 무덤 바닥에서 출토된 유물은 천하석으로 만든 곡옥 한 쌍, 한국식 동검, 즉 세형동검 두 자루, 잔무늬거울 3점이 있다. 곡옥은 두 개가 한 쌍을 이루고 있어 귀걸이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시신은 귀걸이가 놓인 남쪽으로 머리를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신의 허리 우측에 칼과 거울이 있었는데, 거울 위에 칼을 올려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널 위에서 세형동검 한 점이 출토되었는데 널을 안치하고 그 위에 피장자의 동료나 가족이 죽은 이를 기리며 부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무덤 구덩이의 벽과 나무널 사이를 메운 돌무지 틈에서 출토된 유물들로서, 소위 의기(儀器)라고 할 수 있는 방울들이다. 손잡이가 달린 외방울과 쌍방울이 출토되었는데, 주인공의 머리 좌우에 끼워져 있었다. 죽은 이가 손을 들면 바로 쥘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이외에도 중국식 청동검, 투겁창, 도끼, 끌, 새기개 등의 유물이 비슷한 시기의 무덤 중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3 방울의 의미

금속이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아마도 광택과 소리일 것이다. 반짝이는 광택은 금속만의 아름다움이며, 여기에 부딪치면 울리는 청명한 금속의 소리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만들 수 없는 새로운 소리였다. 무당은 사람들을 현혹한다. 보통의 광택과 소리가 아닌 특별한 금속만이 가진 특징으로 사람들을 더 쉽게 현혹했을 것이다.

방울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광택과 소리는 함께 주목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가 방울이라 부르는 것은 크게 둥근 방울과 종모양의 방울로 한자로는 령(鈴)과 탁(鐸)으로 나누어 쓴다. 종모양 방울은 말이나 소 등 주로 가축의 목에 매달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궁중의례에 사용되는 악기 중 편종도 이러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런 종모양 방울은 일본 야요이시대에 거대하게 만들어져, 소리를 듣는 방울에서 보이는 방울로 변화하기도 한다.

둥근 방울도 청동기시대부터 확인되지만 일반화되는 것은 바로 초포리 무덤이 만들어지던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이다. 쌍방울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을 형태만 보고도 알 수 있다. 이런 방울을 흔드는 사람. 바로 무당인 것이다. 무당이지만 그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많은 부장품이다. 여기에는 중국식 청동검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중국에서 쓰는 청동검을 이곳에서 모방하여 이 지역에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초포리 무덤의 유물은 크게 실용품으로서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가 있고, 의기로서 방울들이 있다. 이런 양상은 청동기의 부장과 매납이라는 큰 틀과도 연결된다.

4 청동기의 부장과 매납

청동기가 출토되는 맥락은 크게 부장과 매납으로 나뉜다. 부장이라는 것은 무덤에 넣어준다는 의미로, 쉽게 말해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가 여기에 속한다. 초기철기시대에는 다양한 청동기들이 출토되기는 하지만 정식 조사에 의해 밝혀진 예가 많지 않기 때문에 논의의 진전은 쉽지 않다. 그나마 대강의 실태를 알 수 있는 대전 괴정동 분묘의 상태를 살펴보면, 곡옥은 귀걸이로 사용되었고 세형동검은 허리에 차고 있는 상태였으며 방패모양 청동기, 대쪽모양 청동기들은 발치에 모아서 안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치의 별도 공간에 청동기를 부장한 첫 사례이다. 잔무늬거울이 출토되는 함평 초포리에서는 장대 투겁 방울, 쌍방울을 비롯한 방울류와 중국식 청동검, 청동새기개, 청동끌, 청동도끼, 꺾창 등은 널 바깥에서 출토되었고, 청동검과 잔무늬거울, 구슬 등은 널 안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살아생전 가장 많이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손에 쥘 수 있는 방울을 시신의 머리 위 돌무지 사이에 끼워넣은 것이 주목된다.

널 안의 구슬은 귀걸이로 죽은 이의 귀에 매달려 있었고, 잔무늬거울과 청동검은 거울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청동검을 포개어서 놓았다. 이렇게 칼과 거울을 짝지어 놓는 사례는 포항 성곡리 Ⅱ-7호 널무덤에서도 확인된다. 이것은 도교에서 사악한 귀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주목된다. 이렇게 널 안과 밖의 부장품에 대한 차이는 장수 남양리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대체적으로 널 안에서는 죽은 이가 실제 사용한 청동검과 장신구(유리구슬 등)가 출토되고, 널 바깥에서는 멀리 다른 나라에서 수입된 중국 전국계 철도끼, 새기개 등과 함께 잔무늬거울 등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깨어진 것을 부장하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청동기시대 남해안에서는 깨진 비파형동검을 무덤에 넣는 것이 눈에 띈다. 잔무늬거울 시기의 경우 논산 원북리 나-1호 널무덤에서 온전한 거울이 발견되었지만, 나머지 나-6호, 다-1호 널무덤에서는 깨어진 것이 출토되었다. 나-6호 널무덤에서는 거울의 파편 4점이 출토되었는데, 서로 붙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출토된 청동검 역시 파편이다. 그리고 다-1호 널무덤에서는 거울과 청동검 모두 깨어진 것이 하나씩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나-1호 널무덤에서는 청동 새기개, 나-10호 널무덤에서는 청동검의 파편이 출토되어 이 유적 전체가 깨어진 것 혹은 깨뜨려서 부장하는 전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사한 사례는 바로 다음 시기의 영천 용전리 널무덤을 들 수 있는데, 아마도 ‘훼기(毁棄)’라는 전통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귀한 것을 무덤에 부장하면 그것이 탐나서 무덤의 도굴과 같은 피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모두 깨뜨려서 부장하는 것이다.

5 청동기의 매납

매납이라는 것은 염원을 가지고 어딘가에 바친 것이다. 땅에 파뭍거나, 돌무지를 쌓아덮거나, 큰 바위의 틈에 끼워 넣는 등 다양한 형태로 발견된다. 대체로 무덤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 출토되는 모든 청동기가 여기에 속한다.

문제는 산속에서 잃어버린 칼이 흙에 뭍혀 훗날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산에서 맹수나 산적의 습격을 받지 않기를 기원하는 등의 매납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도 하다.

초기철기시대의 이른 시기에는 청동기만 사용되고 철기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이 시기에는 거친무늬거울이 사용된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되는 매납의 사례는 고흥 소록도 유적 출토품이다. 거친무늬거울과 돌도끼, 돌화살촉 등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화살촉과 도끼를 넣고 거친무늬거울로 뚜껑을 덮듯 마감하였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예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의미에 대해서는 논의할 근거가 부족하지만, 무언가의 염원을 담아서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외에 구덩이 바닥에 청동검이 박혀있는 사례가 있는데, 합천 영창리 유적에서는 22호 구덩이 안에서 칼끝이 없는 청동검이 땅에 박혀 출토되었다. 같은 유적 28호 구덩이에서는 세형동검과 청동화살촉, 뼈 등이 출토되었는데, 가죽과 같은 유기질로 싸여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청동검은 흡사 22호 구덩이에서 출토된 청동검의 윗부분처럼 보이지만 서로 붙지는 않는다. 대전 문화동 유적에서는 구릉 꼭대기에서 세형동검이 땅에 박혀서 출토되었고, 영암 신연리 유적은 낮은 구릉의 돌무지 사이에서 한국식 청동창과 칼손잡이 꾸미개가 출토되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초기철기시대 중‧후기에는 잔무늬거울이 사용되는데, 이 시기에는 중국 전국시대의 철기가 한반도에서 확인된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매납유적으로 지리산 자락의 산청 백운리의 돌무지 속에서 청동검, 청동창, 청동새기개가 출토되었다. 산속 깊은 곳에서 출토된 사례이다. 함평 장년리 당하산 유적에서도 청동검이 구덩이에서 출토되었는데, 부러지지 않고 구부러진 채 땅에 박혀서 출토되었다. 성분을 살펴보면 주석 7%, 구리 85%, 납 3%로 주석이 적고 구리의 함량이 많아 구부러졌으며, 실제 무기로 사용할 수 없어서 실용성을 잃은 것을 알 수 있다. 군산 관원리 유적에서는 구덩이에서 청동창, 철검, 검은간토기가 출토되었는데 그중 청동투겁창만 땅에 박혀서 확인되었다. 이렇게 땅에 박힌 칼이나 창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확인되는데 세이마-톨비노 청동기문화의 제사와 유사성이 있다. 이 문화에서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는 그 자체가 전쟁의 신으로, 그것을 땅이나 벽에 꼽는 행위는 귀신을 내쫒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외에 완주 상림리에서는 중국식 청동검 26점이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언덕 경사면에 칼끝을 동쪽으로 향해 나란히 배치되었는데, 26점 모두 각기 다른 형태로서 같은 거푸집에서 만들어진 것은 없고 주조한 뒤에 손질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웃한 함평 초포리 유적의 청동검이 무덤에서 발견된 부장품인 반면, 이것은 대량매납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잔무늬거울은 일본에서 제사와 관련된 사례가 많다. 일본 규슈 오고리(小郡)시 와카야마(若山) 유적에서는 구덩이 안에 거울 두 점이 토기에 담겨서 출토되었다. 그리고 오사카 오호나가라(大縣) 유적과 나라 나가라(名柄) 유적은 산을 사이에 두고 위치하는데 각기 잔무늬거울이 출토되었다. 모두 무덤이 아니기 때문에 매납으로 보인다.

청동은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최초의 인위적인 금속이다. 금속이 가진 광택과 소리는 자연상태에서는 보기도 듣기도 힘든 것으로 이런 특징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 신기하고 특별함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무덤에 부장되거나 염원을 담아 신에게 바치는 귀중한 것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