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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 침촌리 유적

개석식 고인돌이 대규모로 분포하는 대동강 유역의 대표적인 유적

미상

황주 침촌리 유적 대표 이미지

황주 천진동 고인돌 무덤방 모습

『조선유적유물도감』2,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88

1 유적의 위치와 고인돌 분포

황해북도 황주군 침촌리의 정방산 서북쪽에 있는 대동강 유역의 대표적인 고인돌 유적 가운데 한 곳으로 56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한다. 정방산 기슭과 들판에는 고인돌이 수십 기씩 떼를 지어 분포하고 있다. 정방산 서쪽 산꼭대기에서는 고인돌을 만들기 위한 돌을 떼어낸 채석장이 2곳 조사되었고 주변에서 같은 시기의 집터도 발굴되었다.

침촌리 유적의 고인돌은 1958년 발굴된 천진동과 극성동, 1959년 조사된 긴동과 신대동 마을에 대부분 위치한다.

2 침촌리 고인돌의 발굴조사

침촌리 고인돌 유적은 지금까지 30여 기가 발굴되었는데 개석식(蓋石式)이면서 묘역(墓域)이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 학계에서는 이런 특이한 구조의 고인돌을 “침촌형”이라 부른다.

1) 천진동 고인돌
마을 뒤 언덕에 ‘ㄱ’자 모습으로 6기의 고인돌이 분포한다. 북쪽에 있는 고인돌(1~3호)은 무덤방의 구조가 비슷하며 무덤마다 개별적인 묘역을 가지면서 서로 떨어져 있다. 그러나 남쪽 고인돌(4~6호)은 14.4×6m 되는 하나의 돌무지[積石] 안에 남북 방향으로 줄지어 있으며 덮개돌이 없는 돌널도 4기가 조사되었다.

1호 고인돌의 무덤방은 두꺼운 판자돌로 긴 벽을 만들고 그 사이에 얇은 판자돌을 끼워 넣은 모양새다. 나머지 고인돌은 얇은 판자돌을 가지고 무덤방을 만들었는데 바닥은 강자갈을 깐 다음 판자돌을 놓았거나 그냥 강자갈만 깐 것으로 크게 구분된다.

5·6호 고인돌은 하나의 덮개돌 밑에서 돌널의 무덤방이 2기씩 조사되었다. 이것은 한 돌무지 안에 여러 기의 무덤방이 있는 묘역식 고인돌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묻힌 사람의 친연 관계를 시사한다. 이러한 장례 습속으로 보아 아마도 핏줄을 바탕으로 한 가족무덤일 가능성이 많으며 공동무덤의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껴묻거리는 슴베 있는 돌창, 턱자귀, 돌화살촉, 팽이형 토기 조각, 대롱구슬 등이 찾아졌다.

2) 극성동 고인돌
정방산의 서쪽 기슭에 위치하는 이곳에는 300m 범위에 10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13기의 고인돌이 발굴되었는데 10~12×25m 범위로 형성된 돌무지가 묘역을 이루면서 그 안에 8기(1·3·6~11호)가 자리한다.

1호와 11호 고인돌의 덮개돌 밑에는 각각 무덤방이 2기씩 있고 3호에서는 3기가 조사되어 천진동 5·6호 고인돌과 비교된다. 6호와 7호는 얇은 판자돌을 가지고 무덤방을 만들었는데 그 바로 옆에 두꺼운 돌을 세워 무덤방을 튼튼하게 보강하였다. 바닥은 맨바닥이거나 잔자갈을 깔았다. 8호는 무덤방의 긴 벽 쪽에 두꺼운 돌을 세우고 그 사이에 얇은 판자돌을 끼워 마구리돌 역할을 하게 만들었는데 천진동 1호 고인돌과 비슷한 구조다. 껴묻거리는 돌무지 속에서 반달돌칼, 편암의 가락바퀴, 돌화살촉, 갈색 민무늬 토기 조각 등 주로 깨어진 것들이 찾아졌다.

3) 긴동 고인돌
정방산 서북쪽 기슭의 길 옆에 한 줄로 8기의 고인돌이 분포하는데 5기(3~7호)가 발굴되었다. 발굴조사된 고인돌 4기(3~6호)는 길이 11m, 너비 3~5m, 높이 0.5~0.6m 되는 돌무지 안에 자리한다. 돌무지는 가운데에서 가장자리로 갈수록 점차 낮아지는 모습이다. 무덤방은 5㎝쯤 되는 얇은 편암 판자돌을 세워 만들었으며 그 주변에는 40~60㎝ 되는 큰 돌을 쌓아 튼튼하게 보강하였다. 무덤방의 바닥에는 잔자갈을 깐 다음 그 위에 판자돌을 놓았다.

7호 고인돌은 덮개돌 밑에서 2기의 무덤방이 조사되어 천진동 5·6호나 극성동 1·11호와 비슷한 구조로 보인다. 껴묻거리는 돌무지에서 돌로 만든 턱자귀, 돌창 조각이 찾아졌고 무덤방에서는 돌창과 슴베 있는 돌화살촉이 조사되었다.

4) 신대동 고인돌
독가마산 기슭의 좁은 골짜기에 14기의 고인돌이 분포한다. 이곳의 고인돌은 대부분 덮개돌 밑에 개별적으로 돌무지가 있는데 반해 2~4호는 하나의 돌무지 안에 함께 있는 묘역식이다. 무덤방은 두께 20~30㎝쯤 되는 화강암 판자돌을 이용하여 긴 벽을 만들고 그 사이에 얇은 판자돌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무덤방 둘레에 큰 막돌을 쌓아 놓았다. 무덤방 안에서는 지름 75㎝ 되는 돌돈[石貨]이 넓적한 편암을 손질하여 둥글게 만든 것으로 지름 40~60㎝, 두께 2~3㎝쯤 된다. 이것을 돌감으로 돌검, 돌창, 반달돌칼 등 여러 석기를 만들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다른 것과 교환이 가능했을 것으로 해석하여 돌돈넓적한 편암을 손질하여 둥글게 만든 것으로 지름 40~60㎝, 두께 2~3㎝쯤 된다. 이것을 돌감으로 돌검, 돌창, 반달돌칼 등 여러 석기를 만들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다른 것과 교환이 가능했을 것으로 해석하여 돌돈이라고 부른다.이 찾아졌다.

이밖에도 중학교 운동장 동쪽에서 2기의 고인돌이 발굴되었다. 북쪽에 있는 1호는 지표면에 덮개돌이 놓여 있었고 무덤방 주변에는 막돌을 쌓아 보강한 묘역 시설도 조사되었다. 2호도 얇은 판자돌 2매로 무덤방의 긴 벽을 만들고 그 옆에 막돌을 쌓아 놓았다.

3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의 보금자리

1959년 긴동 고인돌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 정방산 서북쪽의 침촌중학교 옆 밭(1~3호)과 천진동 마을(4호)에서 집터를 조사하였다.

집터는 표토에서 30㎝쯤 아래에 있었는데 길이는 6m 안팎이고 너비는 3.5m쯤 되며 움의 깊이는 10㎝ 밖에 되지 않아 지상가옥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평면 생김새는 긴 네모꼴이고 면적은 20~24㎡쯤 된다.

집터의 바닥은 진흙을 깔고 불 다짐을 하였다. 3호를 보면 화덕시설은 집 가운데에 위치하면서 바닥보다 조금 높게 진흙을 깔고 불을 피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벽 가장자리에서 기둥 구멍과 저장 구덩이 조사되었다.

이들 집터는 숯과 재가 가득 채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거주 과정에 불이 난 것으로 판단된다. 집 안에서는 팽이형 토기를 비롯하여 돌창, 돌화살촉, 돌도끼, 턱자귀, 돌끌, 돌대패날, 반달돌칼, 갈돌, 돌돈 등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연모가 찾아졌다.

4 북한 고고학에서 침촌리 고인돌이 가지는 의미

북한에서는 황해북도 지역의 황주천 유역과 정방산 일대의 고인돌을 대대적으로 발굴조사한 1970년대 이후 그 조사 결과에 따라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는 지역의 지명으로 형식을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 분류는 1차적으로 무덤방 주변의 돌무지 시설(무덤 구역) 유무에 따라 ‘침촌형’과 ‘오덕형’으로 구분하였다. 침촌형은 개석식 고인돌에 해당하며 황주 침촌리의 정방산 서북 기슭에서 집중 조사되었기에 이름 붙였다. 오덕형은 탁자식으로 황주천 유역의 연탄 오덕리에서 많이 발굴되면서 한 형식으로 설정되었다.

침촌형 고인돌은 한 무덤 구역에 있는 무덤방 수에 따라 여러 기가 있는 것(‘집체 무덤’)을 제1~3유형, 1기 있는 것(개별 무덤)은 제4~5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제1유형은 무덤방을 얇은 판자돌로 만든 돌널 형태이고 제2유형은 돌널 뿐만 아니라 두툼한 돌로 만든 것도 섞여 있다. 제3유형은 두툼한 돌을 가지고 만든 무덤방이 여럿 있는 것이다. 제4유형은 두툼한 돌로 만든 무덤방이 1기 있는 경우, 제5유형은 무덤방의 3벽을 모난 돌로 쌓고 나머지 벽은 판자돌을 세워 놓은 것이다.

침촌리 유적에서 천진동 고인돌은 침촌리 제1·4유형이 섞여 있다. 극성동은 제2유형, 긴동은 제1유형, 신대동은 제3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오덕형 고인돌은 굄돌과 덮개돌의 손질 모습, 고인돌의 높이, 굄돌을 세우는 과정 등을 기준으로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침촌형 고인돌의 변천 과정은 제1유형에서 제5유형으로 순차적으로 변화하며, 침촌형 제3유형에서 오덕형 제1유형이 분화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개석식인 침촌형 고인돌이 오덕형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침촌형, 오덕형 이외에도 돌 쌓기 한 무덤방의 특징을 고려한 ‘묵방형’, 무덤방이 움 구덩[土壙]인 ‘석천산형’, 덮개돌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면서 돌을 둘러놓은 ‘제주형’ 등 5가지로 나누고 있다. 또한 침촌형을 무덤방 만드는데 쓰인 판자돌의 두께에 따라 3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북한 학계의 고인돌 형식 분류는 건축학적인 발전 단계를 사회 발전 과정과 연관시키고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된 자료가 빈약하여 그러한 해석을 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적합하지 못한 면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 보다 객관적인 자료인 껴묻거리나 유적 입지 등을 고려한 종합적인 해석을 기반으로 고인돌의 형식 분류 및 선후관계를 밝혀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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