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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갑주[伽倻 甲胄]

중장기병의 실체, 가야사를 다시 이해하다

미상

가야 갑주 대표 이미지

판갑옷

e뮤지엄(국립김해박물관)

1 개요

갑주(甲冑)는 갑옷과 투구를 말한다. 보통 적과 싸울 때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는 쇠로 만든 옷과 모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철기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동물 뼈나 나무(혹은 옻칠한 나무), 가죽 등으로 갑옷을 만들었다. 쇠로 만든 갑옷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전투에 임할 때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위상을 드높이는 기능도 하였다. 또 사람과 함께 전장에 투입된 말도 몸을 보호하기 위한 마주(馬冑)와 마갑(馬甲)으로 중무장하였다.

보통 말과 사람이 전부 쇠갑옷으로 무장한 경우 중장기병(重裝騎兵; 말과 사람이 모두 두터운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병력으로 구성된 부대)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사람의 갑옷 외에 말 갑옷까지 있어야 중장기병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며 주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그 규모와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2 가야의 전사, 모두 쇠갑옷과 쇠투구를 무장했을까?

쇠갑옷은 4세기 무렵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쇠갑옷과 투구는 철로 만든 수많은 무기류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에서 발달한 보호 장비라고 할 수 있다. 격변의 4세기라는 긴장감이 감도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갑주와 마주에 대한 이해의 시각을 넓혀볼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많은 수량의 철제 갑주가 전투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쇠로 만든 갑주는 장군이나 중요 인물에게 한정된 것이고 일반 병사의 경우는 가죽이나 나무 등으로 만든 보호 장비를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갑주는 관이나 관모와 같이 매우 강력한 권력의 상징물로서 보아야 한다.

가야 갑주의 특징을 살펴보자, 갑옷은 철판의 형태에 따라 소량의 큰 철판을 연결해서 만든 판갑(板甲)과 작은 비늘같이 생긴 수 백 매의 철판을 연결해서 만든 찰갑(札甲;비늘갑옷)으로 구분한다. 갑옷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입는 것이기 때문에 착용 시 편하고 유연한 것이 좋고 그래야만 싸울 때에 전투 효과를 상승시킬 수 있다. 그래서 곡선적인 사람의 몸에 잘 맞는 것은 판갑보다는 찰갑이며 찰갑은 조선시대의 갑옷으로도 연결된다. 또 몸통을 보호하는 것 외에 목과 어깨, 팔, 정강이 등을 보호하는 갑옷의 부속구가 있다.

판갑 중에서 가장 수량이 많은 것이 종장판갑(縱長板甲)이다. 4세기 전후에 출현하는 종장판갑은 세로로 긴 철판의 형태와 개수, 뒤판에 연결된 소매판(후동장식판)의 유무, 옆목가리개(측경판)와 뒷목가리개(후경판)의 형태와 장식성, 개폐방식 등을 중심으로 형태가 변화되어 간다. 신라와 가야는 종장판갑 제작을 공유하다가 4세기 전반에 신라는 종장판갑 대신 찰갑을 사용하게 되고 가야는 찰갑을 만들면서도 종장판갑에 장식을 더하면서 계속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뒷목가리개의 형태가 신라는 나팔 모양이고 가야는 반원형에 고사리 모양이나 새 모양의 장식을 더했다.

왜(일본)계 갑옷으로 분류되는 대금계판갑(帶金系板甲)은 왜(일본) 고유의 판갑으로 긴 철판 또는 삼각형 철판을 가로로 연결시켜 만든 갑옷이다. 주로 5~6세기 대 유물에 해당하며 철판 형태가 장방판·삼각판·횡장판으로 변하는 양상이 뚜렷하다. 왜(일본)에서 제작된 대금계판갑은 야마토(大和) 중앙정권이 각 지방정권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분배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출토되는 것은 이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 시기 한국은 우수한 찰갑을 주로 착용하였기 때문에 굳이 대금계판갑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대금계판갑은 왜(일본)와의 교류를 상징하는 물품이었을 것이다. 또는 왜(일본)의 대금계판갑이 우리나라의 종장판갑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영남의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가야(김해 대성동과 두곡, 부산 복천동과 연산동, 합천 옥전, 함안 상백리, 창녕 교동, 고령 지산동 등) 지역에서 많이 확인된다. 그러나 최근 영산강유역(고흥 안동과 야막고분)과 충청도 지역(음성 망이산성)에서도 사례가 늘고 있다.

찰갑은 일정한 크기로 제작된 수 백 매의 작은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갑옷으로 찰갑을 여미는 곳이 앞쪽인 형태(동환식胴丸式)와 옆쪽인 형태(양당식兩當式)로 구분한다. 찰갑은 목가리개, 팔가리개, 팔뚝가리개, 어깨가리개, 무릎가리개 등의 부속구가 있다. 4세기대 찰갑의 철판은 큰 편이어서 유동성이 적은 편이었고 목가리개와 같은 부속구도 없었다. 5세기대부터 철판이 점점 작아지면서 상하 유동성이 확보되었고 찰갑을 보관하기 쉽도록 윗단이 아랫단 속으로 겹쳐지도록 제작되었는데, 이를 궤갑(挂甲)이라고 한다. 따라서 착용과 방어력이 우수한 찰갑을 주로 사용한 가야는 5세기대에는 더 이상 판갑을 만들지 않았다.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는 긴 철판의 형태, 차양의 유무 등으로 구분한다. 긴 철판을 연결한 종장판주(縱長板冑), 작은 철판을 연결한 소찰주(小札冑), 야구모자처럼 앞에 차양이 달린 차양주(遮陽冑), 머리를 감싸는 앞부분이 각이 지듯 튀어나온 충각부주(衝角附冑) 등이 있다. 보통 종장판주와 소찰주는 중국이나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보고 차양주나 충각부주는 대금계판갑과 함께 왜(일본)와의 연결된 것으로 본다.

투구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종장판주이며 신라, 가야, 백제 판갑이 등장하던 시기에 같이 사용되며 가장 늦게까지 착용한 투구이다. 종장판주는 복발(伏鉢)·지판(地板; 긴 철판)·볼가리개·뒷목가리개로 구성된다. 머리를 감싸는 부분을 12~20매 정도의 긴 철판으로 연결하여 만들고 철판의 윗부분을 모아서 얹는 것이 복발이다. 복발 위에는 작은 원통 모양의 철관(鐵管)이 있거나 없는 경우는 복발 위에 구멍이 뚫려있어 깃털 같은 것을 달아 장식과 위세를 나타내기도 한다. 철판의 개수는 40매 이상 늘어나기도 하며 볼가리개도 1개의 철판으로 만들다가 철판의 개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찰갑처럼 작은 철판을 연결해서 만드는 단계로 변해간다. 뒷목가리개는 주로 작은 철판을 연결해서 투구 아래에 매단다. 신라와 가야 유적에서 가장 많이 확인된다.

소찰주는 작은 철판이 사각형이나 오각형 등의 형태로 복발·복판(伏板; 복발과 소찰을 연결하는 타원형의 부속구)·소찰로 구성된다. 복발의 경우 관모 형태이거나 금동으로 장식성이 강한 것도 있다. 고구려, 신라, 가야 유적인 서울 아차산 제4보루, 합천 반계제 가A호분, 고성 송학동 1A-호분, 경산 임당E1-1호분 등에서 확인된다.

차양주는 야구모자처럼 챙(차양)이 달린 것으로 꼭대기는 복발·관(管)·수발(受鉢)로 구분하며 수발에 깃털 같은 술을 매달았을 것이다. 앞으로 튀어나온 차양의 경우 삼각형 모양의 구멍을 뚫어 놓기도 한다. 차양주는 고령 지산동 Ⅰ-3호, 김해 두곡 43호, 고흥 안동고분 등에서 출토되었다.

충각부주는 위에서 보면 앞쪽이 각이 지듯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마치 살구씨처럼 생겼다. 크게 머리를 감싸는 부분과 뒷목가리개, 볼가리개로 구성되며 복판 윗부분에 깃털을 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충각부주는 고흥 야막고분, 김해 죽곡리 94호, 신안 안좌도 배널리 고분, 고령 지산동 32호, 부산 연산동 M3호, 부산 오륜대 고분, 함양 상백리 호생원 등에서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경주 사라리 5호분의 투구는 가로형 철판 2줄을 연결하여 머리를 감싸는 부분을 만들고 볼가리개를 단 형태로 유일한 사례이다.

3 중장기병의 또 다른 실체, 쇠갑옷을 두른 말

말은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장 친숙한 동물 중 하나다. 기본적으로 먹거리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그들이 지닌 힘과 기동력으로 사람을 태우고 짐을 나르고 심지어 전쟁에도 나아가 인간과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래서 소중히 여기는 자산으로서 대접받고 때로는 신성함을 갖춘 존재로서 상징성까지 부여받기도 한다.

전쟁에 참가하는 말은 운송, 기동력 및 전투력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동물이다. 따라서 말을 탄 무사를 보호하는 것처럼 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장비를 갖추어 입혔다. 사람이 입는 갑옷은 판갑(板甲)과 찰갑(札甲; 작은 비늘처럼 생긴 철판)으로 구분되지만 말이 입는 마갑은 찰갑뿐이다. 중국이나 고구려의 경우 벽화나 도용(陶俑)을 통해 사람과 말이 모두 갑주와 마갑주로 무장한 중장기병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지만 가야의 경우는 그런 자료가 없다. 따라서 무덤에서 출토된 말갑옷과 말얼굴가리개(馬冑)는 가야의 중장기병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현재까지 알려진 마갑과 마주가 함께 출토된 곳은 부산, 김해, 함안, 합천, 고령, 경산, 안동, 경주 정도이다. 각각 출토된 것으로 보면 마주는 20개체, 마갑은 18개체 정도 된다.

가장 이른 시기의 마주와 마갑은 중국 호북성(湖北省) 증후을묘(曾侯乙墓)와 포산(包山) 2호묘, 절천하사 춘추초묘(浙川下寺春秋楚墓)에서 출토된 것으로 옻칠제 마주와 마갑이다. 철제 마갑의 실물은 중국 전연(前燕)의 고분으로 알려진 요녕성 조양(朝陽)시 십이대향전창(十二台鄕塼廠) 고분과 북표(北票)시 라마동(喇麻洞)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이후 집안 지역 고구려 왕릉, 한반도 남부의 신라, 가야, 백제의 고분을 중심으로 확인된다. 일본의 마갑은 오오타니 고분(大谷古墳), 카부토야마 고분(甲山古墳), 후나바루 고분(船原古墳)의 마구 매납구덩이, 이치오미야즈카 고분(市尾宮塚古墳) 정도에서만 확인된다.

마주(馬冑)는 말 얼굴 앞부분을 가리는 마스크로 얼굴 덮개, 머리 윗부분과 귀를 가리는 챙, 양 볼과 턱을 가리는 볼가리개로 구분된다. 얼굴 덮개 부분이 분할되는지에 따라 구분이 가능하며 중국 전연(前燕)과 고구려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덮개 부분의 분할 여부에서 일부 시기적인 차이를 확인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마갑은 기본적으로 찰갑이다. 작은 철판을 가죽으로 연결해서 만들기 때문에 무덤에서 수습할 때는 원래의 모습을 알기 힘들다. 철판의 형태가 방형이나 장방형, 사다리 모양 등 다양한 것으로 보아 말의 부위에 따라 각각 다른 철판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갑은 감싸는 부위에 따라 경갑(목, 頸甲), 흉갑(가슴, 胸甲), 신갑(몸통, 身甲), 고갑(엉덩이, 尻甲)로 구분된다.

마갑은 신라와 가야 지역인 부산 복천동·연산동·학소대, 고령 지산동, 함안 도항리와 마갑총, 합천 옥전, 경산 조영동, 경주 황남동·계림로·쪽샘에서 확인되고 백제지역에서는 청주 봉명동 유적, 화천 연천리 유적 정도만 확인되었다. 주로 마갑은 작은 철판의 크기와 형태, 철판을 연결하는 구멍의 위치와 개수, 전체적인 구성에 따라 유형별로 구분할 수 있다.

가야의 중장기병에 대한 것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무덤에서 출토된 마주와 마갑, 마구류를 기반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 부산 복천동 38호에서 보듯 이른 시기부터 갑주와 마구가 함께 확인되기 때문에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奇兵)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 기병과 기마 전술은 말 갑옷으로 무장한 것과 연계해 기동성과 전술에 여러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가야 중장기병의 모습은 마치 고구려의 개마무사와 같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관련하여 국은 이양선 박사가 기증한 말탄사람토기(騎馬人物形土器)는 찰갑을 두른 사람이 큰 방패와 짧은 창을 들고 있으며 마갑과 마주로 무장한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가야의 마갑과 마주는 주로 대형 무덤에서만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전쟁을 지휘하는 소수의 고위 장수가 제한적으로 착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갑옷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판갑이나 찰갑은 기본적으로 딱딱한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쇠옷이다. 부드러운 천과 달리 단단한 철판끼리 연결하고 형체를 갖추는 작업은 쉽지 않다.

따라서 갑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판을 연결하는 방법, 철판 가장자리를 처리하는 방법, 갑옷을 입기 위한 개폐 장치 등에 대한 지식이 먼저 습득되어 있어야 한다. 먼저 철판을 서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철판 가장자리에 1~2개씩 구멍을 뚫어야 한다. 구멍 사이를 통과해서 연결하는 작업은 가죽끈(革綴技法)과 못(鋲留技法)으로 해결한다. 간혹 판갑이나 찰갑을 들여다보면 구멍 주변에 가죽이나 못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구멍의 개수와 잘 남아있는 철판과 가죽의 방향 등을 살펴보면 가죽끈을 어떻게 통과시켜 연결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철판을 연결해서 형체를 갖추었다면 사람의 몸에 맞게 입체적인 형태로 고정할 수 있어야 한다. 연결된 철판들의 위와 아래 가장자리를 일정한 형태로 고정해 주면 평면적으로 연결된 철판들을 몸통의 형상처럼 둥글게 만들 수 있다. 이때 가장자리를 고정하는 방법을 복륜(伏輪) 기법이라고 한다. 가장자리를 가죽포나 가죽끈으로 돌려 감거나 긴 철판을 ‘⊂’로 만들어서 감싸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방법은 연결된 철판을 고정하기도 하지만 단단하고 얇은 철판의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만들어서 착용감을 좋게 만들기도 하고 장식적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단단한 갑옷을 착용하려면 입고 벗기 편하도록 한쪽을 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개폐 장치가 필요하다. 개폐장치는 주로 가슴 앞이나 좌우 옆구리에 있다. 여미는 곳을 고정할 수 있는 개폐 장치는 가죽띠 경첩이나 고리 경첩으로 나뉘는데, 종장판갑은 대체로 가죽띠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대금계판갑은 고리 경첩과 가죽띠 끝을 철판과 못으로 고정하는 가죽띠 경첩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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