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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은사지[慶州 感恩寺址]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된 문무왕의 자취가 깃들다

682년(신문왕 2)

경주 감은사지 대표 이미지

경주 감은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사적 제31호 감은사지(感恩寺址)는 경주 시내에서 감포 쪽으로 약 36km 거리의 동해변에 위치한 절터이다. 감은사는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이 아버지인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을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현재 감은사의 가람을 구성하였던 건물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국보 제112호 삼층석탑 2기는 지금까지 옛 금당(金堂) 자리 남쪽에 남아있다. 감은사는 호국사찰(護國寺刹)로서 동해의 문무왕릉과 함께 문무왕의 호국사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雙塔式) 가람이 확인되었고 석탑에서 여러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불교건축과 공예품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2 통일신라의 호국사찰 감은사의 창건 배경

신라 역사 전반에 걸쳐 일본열도로부터 건너온 왜구(倭寇)들이 빈번하게 동해안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신라 제30대 문무왕은 왜구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동해에 사찰을 창건하고자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 「만파식적(萬波息笛)」에는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인 문무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이 기록에는 뒤이어서 ‘사중기(寺中記)’의 기록이 인용되어있다. 여기에서 문무왕은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 그 후에 바다의 용이 된다. 이후 절은 문무왕의 아들인 에신문왕 의해 682년(신문왕 2)에 완공된다. 이때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언을 받들어 아버지의 뼈를 간직한 곳의 이름을 대왕암(大王岩)이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감은사라고 하였다.

감은사 창건의 목적과 창건 시기를 살펴보면 감은사는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호국사찰(護國寺刹)로서 문무왕 때에 공사가 시작되어 신문왕 때에 완성된 절이라고 할 수 있다. 감은사가 담당한 호국사찰의 기능은 나라를 지키고자 한 문무왕의 호국정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는 감은사 금당(金堂) 바닥의 섬돌 아래에 문무왕을 위해 뚫었다고 하는 구멍의 제작 배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에 의하면 이 구멍은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두루 돌아다닐 수 있도록 동쪽을 향해 만든 것이었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에 따르면 문무왕은 평소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인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무왕이 호국대룡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삼국유사』 「만파식적」에서 신문왕 때에 동해의 작은 산이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 기이한 상황에서도 확인된다. 이때 신문왕의 명령으로 점을 본 일관(日官)은 지금 문무왕이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압하며 수호하고 있다고 왕에게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문무왕이 용이 되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7 신라본기 문무왕 21년 조에도 보인다. 해당 기록에 의하면 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있는 큰 돌에 장사지냈다는 내용과 함께 속전(俗傳)에는 왕이 변하여 용이 되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삼국유사』 「왕력(王歷)」에 문무왕의 왕릉이 감은사 앞 동해에 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감은사는 문무왕릉에서 매우 가까이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설화적인 내용이지만 문무왕이 용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였다는 기록들을 바탕으로 문무왕의 호국사상이 동해의 감은사와 문무왕릉으로 구현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3 통일신라시대 쌍탑식 가람배치와 구조적 특징

감은사지는 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전형적인 쌍탑식(雙塔式) 가람으로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창건 당시 강당(講堂)·금당(金堂)·중문(中門)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었고 금당과 중문 사이의 좌우 공간에 탑이 대칭적으로 세워졌다. 이러한 쌍탑식 가람배치는 통일 직후 건립된 사천왕사(四天王寺)의 목탑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되며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보편적인 형태로 발전하였다. 쌍탑식 가람배치는 단탑식(單塔式) 가람배치에 비해 부처를 모시는 전각인 금당 앞에 넓은 공간이 있어 의례를 행하기에 편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쌍탑식 가람배치의 기원은 현재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중국 사찰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람배치가 같은 시기 중국에서도 보편적인 형태가 아니었다는 점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불교 건축의 측면에서 단탑이 쌍탑으로 전환된 이유에 대해서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과 불상을 봉안한 금당이 사찰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초기 사찰에서는 부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던 탑이 예배의 주요 대상이었다. 하지만 후대에 부처의 형상이 금당으로 옮겨지고 나서는 탑의 규모가 점차 작아지고 부처를 안치한 금당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웅장해졌다. 탑이 하나일 때에는 사찰의 중심에 위치한 탑이 중심적 구조물로 기능하지만, 탑이 두 개일 때는 탑이 금당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장식적 구조물로 기능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 이전에는 금당보다 탑이 더 높은 격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이후 시간이 경과하며 가람의 배치와 탑의 규모에 변화가 생겼다고 이해할 수 있다.

감은사지 금당터의 남쪽에는 국보 제112호로 지정된 동·서 삼층석탑이 있다. 이는 신라와 백제의 삼국시대 말기 석탑 양식이 하나로 집약된 새로운 양식을 지닌 신라 석탑의 시원적인 존재이다. 2개의 삼층석탑은 거대한 규모의 석탑으로 시대에 따라 부분적으로 다소의 변화는 있지만 이러한 형식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신라 석탑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 두 석탑은 건립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자연환경에 노출되어 붕괴 및 훼손의 위험이 매우 컸다. 이에 서쪽과 동쪽 탑을 각각 1959년과 1996년에 해체·보수하였고, 이때 각각의 석탑에서는 사리함과 사리병을 비롯하여 사리를 봉안하는 용기인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그 구성을 살펴보면 각각 사리와 함께, 수정 사리병과 실제 건물과 같은 전각형(殿閣形) 금동 사리 내함(內函), 금동 사리 외함(外函) 등이 있다.

두 석탑에서 발견된 외함은 방형(方形)으로 각 4면에는 사리를 수호하는 존재인 사천왕(四天王)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두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 내함은 전체 규모가 거의 같으며 대좌, 사리병, 천개 등으로 구성된 전각형 사리기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반면에 사리기의 제작기법·세부모양·조형물 등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보물 366호인 서탑의 사리 내함은 기단(基壇) 위에 불상이나 보살상의 머리 위를 가리는 덮개의 일종인 보개(寶蓋)를 올린 형태이다. 보물 1359호인 동탑의 사리 내함은 기단 위에 난간을 둘러 사방에서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이며 그 주위에는 사천왕상과 스님상이 둘러서 배치되어 있다.

쌍탑식 가람배치과 함께 금당 하부의 특수한 석조 구조는 감은사지의 구조적 특징을 잘 나타낸다. 발굴을 통해 금당 아래의 바닥에서 일정 높이 위에 돌을 깎아 만든 기초 시설을 발견하였고 그 위에 금당이 세워진 것이 밝혀졌다. 이 시설을 통해 금당 지하에 별도의 지하 공간을 만든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삼국유사』 「만파식적」에서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두루 돌아다닐 수 있게 감은사의 금당 섬돌 아래에 구멍을 뚫었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즉 문무왕이 죽어서 호국대룡이 되어 적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건축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감은사지에서는 금당 좌우에서 발굴된 익랑(翼廊)이 존재가 주목된다. 익랑은 금당을 중심으로 앞의 탑이 있는 영역과 뒤편의 영역을 구분할 수 있게 해 준다. 감은사는 다른 사찰 터와 비교하면 종방향보다 횡방향의 길이가 긴 편이지만, 그 사이를 익랑으로 나누었던 것으로 보아 익랑 제도의 시대적 유행 경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문왕 이후 감은사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제36대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이 각각 한 차례씩 감은사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혜공왕 때 완성된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鍾銘)」에 역관(役官)의 직명에 해당하는 ‘검교감은사사(檢校感恩寺使)’라는 명문이 한 군데 보인다. 검교사는 왕실사원을 관리하던 관청의 장관직에 해당하는 명칭이다. 따라서 감은사는 최고의 사격을 지닌 성전사원(成典寺院)의 위치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후 감은사는 여러 지리지를 통해 조선 중기인 17세기까지 존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감은사의 폐사(廢寺) 기록은 조선 후기 정조(正祖) 때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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