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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慶州 月城]

천 년의 신라를 다스린 곳

101년(파사왕 22)

경주 월성 대표 이미지

경주 월성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 개요

신라 월성에 대한 기록은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경잡기(東京雜記)』 등에 등장한다.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조에 101년(파사왕 22) 월성을 쌓고 왕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외 신월성(新月城)이나 만월성(滿月城), 반월성(半月城)이라고 부른다.

경주 월성의 동쪽으로 월지(月池)와 동궁(東宮)이 있고 북쪽으로 첨성대와 대릉원이 있다. 월성의 서쪽으로 남산과 연결되는 월정교(月淨橋; 사적 제457호)가 있고 남쪽으로는 일정교(日淨橋; 원래는 춘양교春陽橋로 고려시대 때 일정교로 부름)가 있다. 여러 차례 발굴조사로 월성 주변으로 도랑(垓子)를 둘러져 있고 청동기시대부터 통일신라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와 유물을 발견하였다. 목간을 비롯하여 재성(在城)이 새겨진 수막새 등 수많은 기와류와 토기류, 사람 뼈와 동물 뼈와 식물 씨앗 등이 출토되었다.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월성 안에는 조선시대에 만든 석빙고(보물 제66호)가 있다.

2 성벽과 도랑 속 신라 왕궁의 비밀

월성의 구조 등에 대한 정보는 1915년 일제강점기 때 성벽 하부 층위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이루어졌고 1979년부터 월성 동문지 발굴과 월성 해자 등 지속적으로 조사하였다.

2007년 지하 레이다 탐사를 통해 월성의 전체적인 양상과 땅속에 건축물 등의 흔적이 있음을 파악하고, 월성에 대한 보존 정비 계획을 세워 현재까지 중앙 건물지와 서성벽, 문지(門址), 해자 등을 발굴하고 있다.

월성의 성벽은 서로 다른 흙을 번갈아 쌓아 올린 후 자연석을 무질서하게 깔면서 만들었다. 성벽의 아래는 단단하게 땅을 다지기 위해 식물의 잎과 줄기 등을 얇게 층층이 깔아서 만드는 방법(부엽敷葉공법)을 이용하였다. 또 조개껍질과 같은 석회를 층층이 깐 흔적도 확인되는데, 이는 방수나 마감재로 사용한 것이다. 성벽을 쌓는 방법은 크게 3단계로 나뉜다. 먼저 마사토를 다져올린 후 소토알갱이와 사질점토, 석회를 순서대로 쌓아 올리는 층다짐 공법을 이용하였는데, 이때 건물의 폐기물인 벽체도 재활용하기 위해 같이 넣어서 쌓아 올렸다. 마지막으로 점성이 강한 점토를 얇게 깐 후 흙이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4~5단 정도 자연석을 놓아 마무리하였다. 이처럼 여러 종류의 흙과 다양한 성토 방법으로 성벽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월성의 성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고 적으로부터 침입을 막아내면서 긴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다.

월성의 서쪽 성벽의 바닥층과 성벽 성토층의 경계면에서 2구의 인골과 4점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아마도 성벽 축조가 무사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땅의 신(地神)에게 제물로 바친 희생자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나란히 누워있는 두 사람은 따로 구덩이를 판 흔적은 없었고 머리를 북동쪽으로 두고 있었다. 한 사람은 하늘을 바라본 채 바르게 누워있고 다른 한 사람은 옆 사람을 바라보도록 상체를 옆으로 튼 자세였다. 인골에는 나무껍질(樹皮)이 부착되어 있었고 외상의 흔적도 없었다. 성벽 아래에서 확인된 2구의 인골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제물로 바친 인신제의(人身祭儀)일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과 비슷한 사례로서 국립경주박물관부지 내 통일신라 우물 속에서 발견된 인골(10세 미만의 어린아이 뼈로 추정)도 비슷한 사례로 추정되며, 경주 황남동 376번지 건물 초석 아래에 개의 두개골도 건물의 안전을 바라는 마음으로 묻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인골과 함께 출토된 토기가 대략 5세기 전후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서쪽 성벽의 축조 시기를 그 즈음으로 볼 수 있고, 성벽을 보수한 흙 속에서 6세기 무렵의 유물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아무리 최고의 기술력으로 성벽을 쌓아 올렸다고는 하나 긴 세월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290년(유례이사금 7)에 홍수로 월성이 무너지고 487년(소지마립간 9)에 월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475년(자비마립간 18)부터 487년(소지마립간 9)까지 명활성이 신라의 왕궁 역할을 잠시 한 뒤 다시 왕궁을 월성으로 옮겼을 때도 방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수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679년(문무왕 19)에 궁궐을 다시 고쳤다는 기사가 전하는데, 중앙 건물지(C지구) 발굴조사에서 확인한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가 새겨진 연호(679년을 뜻함)명 기와는 이때 월성을 수리하였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월성은 도랑(垓子)을 경계로 월성의 내부와 외부로 구분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월성 주변에는 삼국시대 이전의 건물지도 확인되고, 월성이 왕궁으로 역할을 다하는 동안에 약 70여 동의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건물은 월성을 운영하기 위한 여러 관청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건물지 아래에 지진구나 황칠(黃漆)유개합 등을 넣어두는 제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지하 레이다(GPR) 탐사로 표면 30㎝ 아래에 통일신라 건물지가 분포하고 있는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였고 지금까지 발굴조사로 수습한 약 10만여 점의 유물 중에 고려나 조선시대의 유물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신라 멸망 이후 그대로 잘 보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월성 내부에는 약 17동의 건물지가 계획적으로 조성되었고 3호 건물지에서 확인된 다량의 벼루 편들은 신라 월성의 문자생활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월성을 에워싸고 있는 도랑은 성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 외부의 침입 방지, 식수 확보 및 오수 배출, 물자 운반, 연못이나 원지 등의 조경시설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월성 해자는 자연 하천인 남천을 활용하면서 나머지 부분은 인위적인 도랑을 파서 만들었다. 시기에 따라 돌을 사용한 석축해자(최대 길이 약 150m, 최대폭 약 50m, 석축 최대높이 0.8m)와 돌을 사용하지 않은 수혈해자(최대폭 약 58m, 최대 깊이 1.8m)로 구분된다. 먼저 땅을 파서 돌 없이 도랑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그 위에 석벽을 쌓아 올려 다시 사용하였다. 월성 북쪽의 해자는 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천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돌을 이용하지 않은 수혈해자에서 5~7세기대 유물이 나왔고, 석축해자에서는 8~9세기대 유물이 나왔다. 월성 해자는 사람이 못 건널 정도로 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해자에서 출토된 가시연꽃의 존재로 보아 해자 바닥이 거의 뻘층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건널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성 내부의 우물(잔존 깊이 5.4m, 상부 지름 1.5m)에서는 도장무늬토기와 동이, 병 등 통일신라 토기 및 연꽃무늬 수막새, 넝쿨무늬 암막새 등 기와류, 벼루 다리 편과 방추차, 동곳, 나무 두레박 등이 출토되었다.

3 월성을 기록하다

월성에 대한 여러 기록 중에는 문헌 외에도 목간(木簡)과 기와나 토기에 새겨진 여러 문자 자료가 있다. 목간은 지금의 종이와 같은 것으로 길쭉한 나무 위에 간단한 글을 써서 정보를 전달하거나 남기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양이 산성이 강한 탓도 있지만 유기질인 나무이기에 남아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초기에 조사된 월성 목간은 주로 행정문서용으로 종이 구입과 보고,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문제, 윗사람의 명령 지시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2016년~17년에 출토된 목간 중에 ‘병오년(丙午年)’이라는 완전한 간지(干支) 목간이 처음 발견되었다. 병오년은 526년(법흥왕 13), 또는 586년(진평왕 8)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오년 목간에는 지방민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일벌(一伐)이라는 관직을 가진 자가 이들을 통제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즉 6세기 무렵 지방민을 동원할 정도의 대규모 정비 사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목간에는 전중대등(典中大等)이라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관직명이 등장하였고 중국 주(周)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의 이름도 보인다. 신라는 6세기 이전에는 신라 고유한 말로 이름을 지었으나 6세기 후반 즈음에는 중국의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목간 외에도 기와나 토기에 찍거나 새긴 문자 자료가 있다. 확인되는 문자 자료는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 한(漢), 한지(漢只), 정도(井桃),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 정(井), 주(朱), 본(本), 동궁(東宮; 태자, 또는 태자가 사는 곳), 전인(典人; 신라의 하위 행정기관)과 도부(嶋夫; 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긴 사람 이름으로 추정) 등이 있다. 어떤 특정 시점을 지칭하거나 신라 6부 및 궁궐과 연관된 자료로 추정된다. 토기나 기와에 새겨진 문자는 한문에 익숙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구분한다.

4 월성에 잠든 동식물로 경관을 복원하다

경주 월성하면 흔히 벚꽃이 만발한 풍경을 먼저 떠올린다. 그렇다면 신라 시대 월성은 어떤 풍경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까? 월정 해자는 늘 물이 있는 곳이고 그 바닥은 뻘층이었기 때문에 유기물질인 동물뼈와 나무제품, 다양한 식물 씨앗들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동물뼈는 소, 말, 개, 멧돼지 등을 비롯하여 곰, 강치, 사슴류, 상어, 돌고래, 참돔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소, 말, 개, 멧돼지, 사슴 등은 무덤이나 조개더미(貝塚)에서 주로 출토되며 통일신라 우물에서도 제의에 이용된 수많은 동물뼈와 식물 씨앗들이 확인되기도 한다. 다양한 동물들은 주로 먹거리나 농사나 운송에 필요한 노동력 때문에 이용되었을 것이며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이 멧돼지이다. 특히 곰의 경우는 가죽을 이용한 사례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 소와 말의 어깨뼈(肩胛骨)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의에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물 뼈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뼈가 부러졌던 흔적(骨折)이 있는 멧돼지 앞다리 뼈나 개의 어깨뼈, 이빨에 염증이 있는 경우도 있다.

현재까지 월성에서는 벼·밀·콩 등의 곡식류, 박·외류 등의 채소류, 복숭아·자두와 같은 과실류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약 2만여 점의 가시연꽃 씨앗이 확인되어 당시 월성 해자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또 가시연꽃의 배유(胚乳)는 먹기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호두의 친척뻘 되는 가래나 개암, 잣과 같은 견과류도 확인되었다. 특히 잣 껍질 중에는 같은 위치에 매우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경우가 확인되어 무언가에 매달아서 사용했던 것이라 본다.

또 토층의 꽃가루를 분석한 결과 월성의 봄은 복사나무, 자두나무, 벚나무가 가득했고, 여름에는 가시연꽃이 한가득 군락을 이루면서 개연꽃, 마름, 붕어마름 등이 해자와 연못을 가득 메웠을 것이다. 월성 주변의 가을은 느티나무와 느릅나무가, 구릉과 산지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숲뿐만 아니라 밤나무, 서어나무류, 오리나무 등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식물 씨앗 중에 복숭아씨의 경우는 단순한 먹거리로만 보기 어렵다. 예로부터 복숭아는 불로장생,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벽사라는 상징성을 담고 있다. 월성 해자에서 확인한 복숭아씨는 일부 불탄 흔적도 확인되며 우물에서도 늘 확인되고, 또 일정한 층을 이루기도 한다. 복숭아의 한쪽 끝에 일부러 훼손한 흔적도 있기 때문에 물과 관련된 제의에 복숭아씨를 사용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월성 해자에서 발굴된 나무제품으로는 목간, 그릇, 빗, 방패, 자, 두들개, 건축 부재 등이 있다. 나무는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고 가공이 편리해 고대로부터 생활용품의 주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또 도끼, 칼, 못과 같은 철제 유물과 화려한 금동제 장식이나 작은 금동불상 등도 있다. 이러한 유물은 신라의 기술과 생활 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준다. 또 특수한 사례로서 방패 모양의 목제품과 가장 오래된 배 모양 목제품도 발견되었다. 배 모양 목제품은 불에 그을린 흔적으로 보아 제의에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준구조선(통나무 배에서 정교한 선박으로 발전하는 중간 단계)의 형태를 띠고 있다. 방패 모양 목제품은 붉은색과 검은색이 칠해져 있는데, 고구려의 안악3호분 행렬도에서 유사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방패 모양과 배 모양 목제품은 소나무 속 연송류(잣나무)로 만들었는데 신라 촌락에 대한 내용을 적어놓은 문서에 의하면 뽕나무, 호두나무, 잣나무를 이전에 심은 것과 새로 심은 것을 따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는 마을 마다 잣나무를 비롯한 특정 나무를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촌락에 대한 내용을 적어놓은 문서에 통일신라 시기 서원경 지방(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4개 마을의 장부기록으로, 촌락의 경제 상황과 국가의 세무 및 각종 행정 정책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문서에는 뽕나무, 호두나무, 잣나무에 대해 이전부터 자라고 있었던 그루 수와 새로 심은 그루 수를 따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최초의 인공조림 기록으로 잣나무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나무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사람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물질자료로서는 토우나 토용, 석인상 등이 있다. 월성 해자에서도 사람과 동물을 작게 본떠 만든 토우가 나왔다. 사람은 두 팔을 벌린 모습, 말을 탄 모습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터번을 쓴 소그드 사람(중앙아시아의 이란계 민족)으로 추정되는 토우도 있어 신라와 서역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동물 토우는 말, 염소, 돼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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