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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남대총[慶州 皇南大塚]

왕릉, 죽음의 궁전

미상

경주 황남대총 대표 이미지

경주 황남대총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경주 중심부에 솟아있는 낮은 구릉들이 신라시대의 무덤이라고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즈음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06년 이마니시 류가 경주 황남동 남총(南塚)을 발굴하면서 신라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에 대한 초보적인 인식이 이루어졌고, 이후 금관총(金冠塚), 서봉총(瑞鳳塚),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등의 신라 왕릉급 무덤들이 조사되었다.

광복 이후 1946년 우리의 손으로 처음 호우총(壺衧塚)을 발굴한 이후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처음 경주 사적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가장 큰 무덤인 98호분인 황남대총(皇南大塚)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자 했으나, 신라 왕릉 조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탓에 황남대총 맞은편에 있던 천마총(天馬塚, 155호)를 먼저 조사한 후 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황남대총을 세심하게 발굴하였다.

황남대총은 두 개의 무덤이 남북으로 맞붙어 있는 가장 큰 무덤, 황남동에서 가장 큰 무덤(남북 길이 120m이며 동서 지름 80m, 높이 약 22m)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 개의 무덤이 붙어 있기 때문에 표형분(瓢形墳)이라고도 한다. 발굴은 북분(北墳)부터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남분(南墳)부터 만든 후에 북분을 덧붙여 만들었다. 거대한 봉분과 다양하고 화려한 유물을 통해 당시 신라의 최상위층의 신분을 지닌 5세기 무렵 마립간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황남대총은 사적 제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경주 대릉원 내에 천마총 등의 무덤과 함께 관리되고 있다.

2 최고 기술력으로 만든 죽음의 공간

무덤은 죽은 자를 위한 별개의 공간이다. 현세의 모든 권위를 죽어서도 이어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조영물이기에 죽은 자의 살아생전 권위와 힘을 과시하는 또 다른 상징물이다. 신라의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 부르던 시기가 있었다. 대체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근거로 17대 내물마립간(재위 356~402)에서 22대 지증마립간(재위 500~514)까지인데, 지증마립간이 지증왕으로 호칭을 바꾸면서 마립간 시대는 막을 내렸다. 5세기를 중심으로 6세기 초까지 마립간 시기의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며 무덤 안에 부장된 유물의 질과 양이 풍부하여 고대 신라의 문화 양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황남대총은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남분은 주곽과 부곽을 따로 만든 왕의 무덤이고, 북분은 주곽만 있는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부곽까지 딸려있는 남분에서 11,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금관이 출토된 북분은 1,200여 점 정도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봉분을 쌓아올리는 공간의 바닥을 정리하고 나무널(木棺)과 덧널(木槨)을 만든 후 그 주위에 강돌로 돌무지를 쌓고 그 위로 흙을 쌓아올리는 지상식 무덤이다. 작은 무덤일 경우는 이런 과정으로 돌무지와 흙으로 쌓아올려 무덤을 만들 수 있지만, 높이가 20m 전후의 큰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구조적 장치가 필요하다. 즉 돌무지를 쌓기 위해 만든 나무틀[木製架構]이 바로 그것인데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조사 때 밝혀졌다. 봉분 흙을 제거하고 매장주체부인 덧널 주변의 돌무지 속에서 나무 기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구멍들이 발견되었다. 즉 돌덧널(石槨)처럼 정연하게 벽석을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덧널 주변에 무질서하게 돌들을 쌓아올렸기 때문에 돌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무 기둥으로 나무틀 구조물을 만들었던 것이다. 다만 나무 기둥은 이미 썩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돌무지 사이에 구멍만 남게 된 것이다.

남분의 나무틀은 덧널 주위에 4줄로 기둥을 박고, 기둥 사이에 가로대를 엮은 다음 가장자리에 버팀목을 대었다. 바깥쪽 2줄의 기둥은 비스듬하게 기댄 버팀목의 기울기에 맞추어 순차적으로 높이를 낮게 만들었다. 주곽과 부곽의 사이에도 격벽을 쌓기 위한 기둥이 있었다. 돌무지의 단면은 나무틀의 형태와 같이 마름모꼴이다. 북분의 나무틀은 기본적으로 남분의 것과 같으나, 2줄로 기둥을 박았고 남분과 접하는 남쪽에 버팀목을 생략한 점에서 다르다. 또한 돌무지의 표면은 매우 가지런하였는데, 이는 돌무지를 쌓은 다음에 봉토를 쌓았기 때문이다. 높게 쌓아 올린 봉토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점성이 강한 흙으로 봉토 표면을 감싸 덮었다.

남분과 북분의 가장 큰 차이는 덧널의 구조이다. 남분에는 주검을 모신 덧널[主槨]과 물건만 넣기 위한 덧널[副槨]을 따로 만들었다. 주곽과 부곽은 동쪽과 서쪽에 일렬로 배치되었다. 북분에는 덧널을 하나만 만들었다. 또한 남분의 주곽은 이중으로 덧널을 설치한 구조였는데, 이것도 북분과 다르다. 남분에 잇대어 북분을 만들었으므로,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덧널이 주곽과 부곽으로 나누어진 형태에서 덧널을 하나만 설치하는 형태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엄청난 토목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황남대총은 무덤 축조에 필요한 노동력과 물적 자원을 집약한 결과이다. 높이 20m 이상에 달하는 남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자재가 현장에서 마련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대략 하루 300명의 인력이 121일 정도 동원되는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막대한 노동력과 시간을 요구하는 거대한 봉분의 가시적인 크기는 덧널을 감쌌던 돌무지의 크기와 양보다는 그 위를 덮었던 흙, 즉 봉토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의 편년을 근거로 남분은 5세기 초부터 5세기 중반 사이로 편년되고, 북분은 남분의 편년에 따라 5세기 중반에서 5세기 중후반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무덤을 만든 시점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만, 무덤의 주인이 내물·실성·눌지마립간 중의 한 명일 것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본래 왕과 왕후가 묻힌 곳이라는 사실과 함께 무덤의 주인이 어느 왕인지 분명해야만 ‘능(陵)’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황남대총이나 천마총의 경우는 왕(마립간)의 무덤임에 틀림없지만 정확히 어느 왕인지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봉토 무덤이라는 뜻을 지닌 ‘총(塚)’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황남대총’이라고 부르고 있다.

3 죽은 자의 권력을 이어받는 산 자의 퍼포먼스, 무덤 의례

마립간 시기 신라는 조상 숭배를 범국가적인 제의로 받들었다. 조상숭배와 관련된 역대원릉(歷代園陵)과 시조사당[始祖廟], 나을신궁(奈乙神宮) 등은 모두 마립간의 권위를 나타내는 국가의 중요 기념물이었다. 마립간이 죽은 후 무덤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은 죽은 자의 권위를 살아있는 자가 이어받기 위한 중대한 의례로서 복잡하고도 화려한 퍼포먼스를 통해 권위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왕릉의 조영은 무덤을 만들고 피장자를 관에 넣어 뚜껑을 덮고 돌과 흙을 쌓아올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덤 속에는 죽은 자가 착용한 물건과 그 주변에 놓아두는 물건들, 제사 음식을 담은 그릇들이 있다. 이런 부장품이 있는 위치와 흔적들로 무덤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의례가 이루어졌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마립간이 죽으면 대내외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조문을 받아야 하고 마립간 곁에 함께 넣어둘 화려한 물건들을 준비해야 한다. 물건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도 있을 터이고 새롭게 만들어 넣어야 하는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또 지름 50m, 높이 20m 정도의 봉분을 만들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에 들이는 시간이 얼마인지, 또 어디서 조문을 받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물질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여기서 간단히 마립간을 모실 무덤을 만드는 상상을 해보자. 먼저 무덤이 들어설 자리의 터를 닦고 덧널을 짜고, 덧널 주위에 돌무지를 쌓아올리기 위한 나무틀을 세운다. 주곽(主槨)은 두 겹으로 만들고 주곽의 서쪽에 여러 물품을 넣는 부곽(副槨)을 만든다. 돌무지는 나무틀에 맞추어 덧널 주위를 감싸면서 약 4m 높이로 쌓는다. 덧널을 중심으로 지름 80m의 담장처럼 생긴 둘레돌[護石]도 만든다. 봉토는 둘레돌과 돌무지 사이에 산에서 퍼 온 흙과 강자갈을 쌓아 만든다. 봉토는 일단 돌무지 높이까지만 쌓는다. 주곽 안에 ‘바깥 널[外棺]’을 짠 다음, 주검을 모신 널[內棺]을 그 속에 안치한다. 또 바깥 널의 부장칸과 부곽에는 준비된 많은 물품과 음식을 넣는다. 바깥 널의 밖에는 순장(殉葬)으로 죽은 어린 여인을 눕힌다. 덧널의 출입구인 뚜껑을 덮고 덧널 위에서 한차례 제사를 지내고 음식과 물건을 둔 채 강돌을 다시 쌓아 올린다. 주곽 쪽은 먼저 쌓은 돌무지보다 높게 쌓고, 부곽 쪽은 돌무지 높이까지만 채운다. 돌무지의 위쪽으로 찰흙을 넓게 바른다. 다시 흙과 강자갈을 밖에서 안으로 채워 넣듯이 쌓아 반구형의 봉토를 만든다. 봉분을 쌓으며 중간과 꼭대기에서 다시 제사를 지내고 큰 항아리에 음식과 물건을 묻는다. 외면에 찰흙을 입혀 봉토가 씻겨 내리지 않도록 마무리한다.

그런데 황남대총 남분에는 의외로 일부러 부러뜨린 물품들이 있다. 부곽과 주곽 위에 둔 굽다리접시는 굽을 부러뜨렸고, 봉분 꼭대기에 묻은 제의 물품 바구니에는 비틀어지거나 부서진 말띠꾸미개가 담겨 있었다. 이렇게 물건을 일부러 부수거나 부순 물건의 편들을 각각 다른 곳에 두기도 하는 행위를 훼기(毁器)라 한다. 이런 행위는 이전 시기의 무덤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덧널무덤에 긴 창을 일부러 구부려서 넣어두는 사례가 있다.

아마 북분도 남분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최근 조사된 서봉총의 사례를 보면 무덤 주변 둘레돌 바깥에 도랑을 만들고 그곳에서 또 한차례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 있고 제단(祭壇)으로 보이는 공간도 확인되었다. 이렇듯 마립간의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 속에서 죽은 자의 권위를 이어받는 산 자의 모습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을 것이다. 선대 권력 계승의 정당성을 확인받는 권력의 교차점, 죽음과 삶의 경계선상에 놓인 것인 무덤인 것이다.

한편, 황남대총 봉분 흙을 제거할 때 무덤을 만들 당시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그릇이 확인되었다. 1m 깊이의 구덩이에 묻은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표면에서 50cm 깊이를 넘지 않게 얕게 묻혀 있었다. 삼국시대인 7세기 대 토기부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도자기까지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통일신라 시기의 대표 토기인 기하학적 무늬나 꽃, 구름 등의 무늬를 도장 찍듯이 찍어낸 도장무늬토기(印花文土器)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7세기부터 10세기까지로 편년되는 토기들의 존재는 삼국시대 말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황남대총 봉분에서 지속적인 매장이나 제사와 같은 행위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4 죽음의 공간에서 펼쳐진 저승길 만찬

산 자의 바람을 담아 만든 죽음의 궁전인 무덤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이다. 신라의 왕릉은 묻힌 자에 대한 한 톨의 기억도 없는 우리에게 여러 이야기와 궁금증을 던져준다. 차가운 돌 속에는 살아생전의 치열하고 화려했던 삶의 잔존물들이 살아있는 자들이 그림자가 되어 그 영광을 이어주었다. 고대의 계세사상(繼世思想)에서 비롯한 관념들은 무덤이 온갖 물건과 갖가지 먹거리로 가득 차도록 만들었다.

황남대총에서 확인된 여러 동물과 식물의 잔존물로 당시 제사에 쓰였던 음식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봉분의 중간보다 높은 곳에서 큰 항아리 4개가 묻혀 있었다. 큰 항아리 안에는 작은 그릇과 짐승 뼈, 물고기 뼈, 조개껍데기가 함께 들어있었다. 이는 음식을 작은 그릇에 담아 큰 항아리에 넣어 둔 모습이다. 뼈로 확인된 고기 음식의 재료는 소·말·바다사자·닭·꿩·오리 등으로 닭이 가장 많다. 조각난 뼈는 음식으로 만들기 위해 잘랐던 것으로 보인다. 물고기류 중 참돔은 최소 2마리로 통째로 넣었고 졸복 2마리는 토막 낸 상태였다. 다랑어·농어·상어·조기는 일부분만 있었다. 패각류는 전복·오분자기·소라·눈알고동·배말류·밤고동·주름다슬기·논우렁이·맵사리·대수리·홍합·해가리비·재첩·반지락·백합·대복·가무락조개 등이 있다. 파충류인 거북이의 조각난 뼈도 있었다. 모두 먹을 수 있는 것이며 이 밖에도 나물과 채소와 같은 음식도 있었을 것이나 확인된 자료는 없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은 이승을 떠나는 이를 위로하고 저승에서도 풍족하게 먹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친 마지막 만찬이었을 것이다.

황남대총 외에도 천마총에서는 항아리에 담긴 30개의 귀한 달걀이 발견되기도 하였고, 식리총의 청동합(靑銅盒) 뚜껑과 바닥, 미추왕릉 제 9구역의 1~3호 무덤, 경산 임당 조영 EⅢ-2호의 그릇 등에 남아있던 볍씨로 볼 때 무덤 속에 밥이 아닌 볍씨 자체를 뿌리거나 가득 넣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최근 서봉총의 둘레돌 주변 큰 항아리 속에서 다량의 굴 껍데기와 조개, 소라, 가리비, 다슬기 등 조개류 1800여 점과 물고기류 5,700여 점이 나왔고 돌고래 앞 지느러미 뼈와 복어, 성게, 도미 등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 종류도 다양한 많은 양의 제사 음식은 당시 신라 사람들의 음식 문화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5 눈부신 보물들과 함께 잠들다

마립간 시기의 신라 왕릉은 하나의 랜드마크처럼 권력과 위세로 압도하기 위해 거대한 산처럼 봉분을 쌓아 만들었다. 당연히 무덤 안에 넣는 물건들도 거대한 봉분만큼이나 화려할 수밖에 없었다. 무덤 속에 금관이나 금 허리띠와 같은 수많은 황금 장신구, 큰 칼과 금동제 장식을 단 여러 벌의 말갖춤, 금·은으로 만든 그릇, 수 만점의 구슬 목걸이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화살과 창, 쇠도끼와 덩이쇠(鐵鋌) 같은 철제품, 고급 칠제품(漆製品), 제사 음식을 담아 올린 수많은 토기, 산과 바다 건너온 희귀한 유리그릇과 청동그릇 같은 외국 물품들은 마립간이 살아생전에 쌓은 업적처럼 봉분을 쌓듯 켜켜이 부장되었다.

한편,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금관이, 남분에서는 금동관이 나왔다. 피장자의 머리 부분에서 나왔기 때문에 죽은 자의 머리와 얼굴 부분까지 씌운 상태였다. 여러 출토품의 정황으로 보아 북분은 여성의 무덤이고 남분은 남성(인골 분석 결과 60대 남성)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데, 남자였던 마립간이 금관이 아닌 금동관을 썼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황남대총의 금관은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의 금관처럼 대륜부에 ‘山’자모양의 가지와 사슴뿔 모양의 가지가 있는 형태이다. 표면에 수많은 달개장식과 곱은 옥이 달려있고 대륜부 아래로 굵은고리 귀걸이 장식이 달려있는 매우 화려한 금관이며, 금관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무덤 속에 부장된 수많은 물건 중에는 고구려, 중국, 왜(일본), 서역과 관련 있는 것들도 있다. 고구려에서 자주 보이는 금귀걸이와 새 깃털 모양의 관 장식, 뚜껑에 ‘十’모양의 꼭지가 달린 금속합(金屬盒), 중국 북방평원에서 주로 보이는 청동거울(조문박국경鳥文博局鏡)은 삼베와 비단으로 감싼 채로 출토되었다. 쇠로 만든 거울(鐵鏡)은 고구려와 중국 북연에서 출토된 사례가 있다. 또 황남대총에서는 많은 양의 유리그릇이 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타출 기법으로 다양한 무늬를 넣은 은잔도 중국 중원이나 북방 지역과 연계시켜볼 수 있는 물건이며, 중국 자기인 흑갈유반구병(黑褐釉盤口甁)도 발견되었다.

왜(일본)와 관련 있는 것들은 완제품보다는 물건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재료인 경우가 많다. 일본열도 큐슈 지방 남부와 오키나와 근처에 서식하는 아열대 고둥의 껍데기인 이모가이(芋貝)와 야광패(夜光貝)를 이용해 만든 물건도 있다. 원뿔처럼 생긴 ‘이모가이’라는 고둥은 잘 다듬어서 말띠꾸미개에 끼워 넣어 장식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는 황남대총 남분 이외에 금관총(金冠塚)과 천마총 등 신라의 여러 무덤에서 확인된다. ‘야광패’는 광택이 아름다운 고둥인데 나전의 재료로 쓰인다. 왜(일본)에서는 국자로 만들어 사용하며, 신라에서는 야광패 국자의 가장자리를 금동제 테두리로 둘러 장식하였다. 곱은옥[曲玉]의 재료인 경옥(硬玉)도 수입되었는데 비취(翡翠)라고 하며, 한반도에서 산출되지 않는 옥 종류이다.

이모가이와 야광패 외에도 앵무조개를 이용한 잔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유물이었다. 앵무조개잔은 중국 서진(西晉)과 동진(東晉) 시기 무덤에서 나온 3점의 앵무배 뿐이고 일본에도 없으며, 현재까지 유일하게 황남대총 남분에서 앵무조개잔(鸚鵡杯)만이 있다. 앵무조개를 이용한 사례는 조선시대에도 일부 확인될 뿐이다.

외국 물건 중에 귀중한 교역품 중 하나로 로만글라스(Romanglass)가 있다. 봉수형병, 굽다리완, 완 등 다양한 형태의 유리그릇은 실크로드를 거쳐 들어온 것으로 황금보다 귀중한 교역품이었다. 성분을 분석해보니 거의 소다석회유리(Na2O-CaO-SiO2)로 밝혀졌으며, 이는 서구형 소다유리라고 한다. 남분 출토품은 띠를 덧대거나 입술을 둥글게 말아둔 점으로 보아 초기 비잔틴 시기에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만든 것이다. 북분에서 출토된 커트글라스는 사산조 페르시아 계통이고, 물결무늬 굽다리잔은 유럽에서 유행한 후기 로만글라스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희귀한 물건이 있다. 비단벌레로 장식한 말안장과 말띠꾸미개다. 금속 성분이 있어 단단하고 빛깔이 고운 비단벌레의 날개만으로 안장과 말띠 꾸미개의 앞면을 장식한 뒤 그 위에 다양한 무늬가 뚫린 금동제 판을 덮어 만든 것이다. 햇빛이 있는 곳에서는 황금보다 더 반짝거리는 효과를 나타낼 수 있으며, 비단벌레로 장식한 말안장 위에 올라탄 마립간의 모습은 어느 누구보다 당당한 위엄을 표출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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