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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흥륜사지[慶州 興輪寺址]

신라 최초의 절이 창건되다

527년(법흥왕 14)

경주 흥륜사지 대표 이미지

경주 흥륜사지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경주 흥륜사(興輪寺)는 사료에서 확인되는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흥륜사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신라에 온 승려 아도(阿道)가 신성한 7개의 절터 중의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에 건립한 사찰로 전해진다. 이후 폐사되었다가 527년(법흥왕 14)에 이차돈(異次頓)의 죽음을 계기로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이 흥륜사를 크게 짓기 시작하였고 544년(진흥왕 5)에 완성되었다. 이때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 사찰의 이름을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고 하였다. 흥륜사지의 위치는 발굴조사를 통해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 경주공업고등학교 부근으로 추정된다. 현재 사적 제15호로 지정된 흥륜사지는 경주공업고등학교에서 약 1km 떨어져 있는 경주시 사정동 281-1번지 일대이며 1980년대에 새로 지어진 흥륜사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일대에서 ‘영묘지사(靈廟之寺)’, ‘대령묘사조와(大令妙寺造瓦)’ 등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이곳은 선덕여왕 때 창건된 영묘사(靈妙寺)에 해당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2 이차돈의 죽음과 흥륜사 창건

법흥왕 때 이차돈은 불법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불교가 신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흥륜사의 창건도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시행될 수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에 의하면 법흥왕은 백성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애는 사찰을 만들어 불법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는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이 아도와 함께 불법을 펼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을 슬퍼하였다. 이에 법흥왕은 절을 크게 짓고 불상을 만들어 선왕의 공덕을 따르고자 하였고, 527년 천경림에 흥륜사의 터를 잡았다.

천경림은 신라의 신성한 7개의 절터 가운데 하나로서,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에는 각 절터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온 아도(阿道)는 그의 어머니인 고도녕(高道寧)에게 경주 안에는 전불시대(前佛時代), 즉 현재의 부처인 석가모니와 그 이전에 출현한 부처들이 있었던 시대에 7개 절의 터가 있었다는 것을 듣는다. 이 가운데 첫 번째로 꼽히는 절터가 바로 천경림이다. 아도는 신라에 와서 미추왕에게 천경림에 흥륜사를 세워서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 나라의 복을 빌고자 한다고 하였다. 신성한 7개 절터에 대한 기록은 신라가 본래 오래전부터 부처가 계신 땅이었다는 신라인들의 불국토(佛國土) 사상을 나타낸다. 이처럼 신성한 땅에 흥륜사가 지어졌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당대 흥륜사의 높은 위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흥륜사 창건이 국가가 주도한 대규모의 불사(佛事)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흥륜사 건립 계획을 접한 신하들은 흉년과 이웃 나라와의 전쟁이 우려되는 때에 백성을 힘들게 만들 수 있는 토목 공사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때 이차돈은 불법이 확산될 수 있도록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는데, 그가 죽을 때 목에서 흰 피가 솟아나는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이차돈의 신이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535년(법흥왕 22)에 흥륜사의 공사가 재개되었다. 이후 544년(진흥왕 5)에 흥륜사가 완공되었고 진흥왕은 절의 이름을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차돈의 흥륜사 창건 목적이 단순히 큰 절을 조성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해동고승전』 「법공전」에서 이차돈이 사찰을 지으면 온 나라가 태평하고 안정되며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구제하는 것에 이로움이 생길 것이라고 말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3 6세기 신라·백제의 교류와 흥륜사 창건

최근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의하여 6세기 백제 불교가 신라 초기의 불교에 영향을 주었다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흥륜사 초창기 기와의 문양과 제작기법을 살펴볼 때 백제 최초의 사찰인 대통사(大通寺)의 기와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다는 연구가 있어 주목된다. 한편 신라 불교에 미친 백제 불교의 영향은 당시 양국의 정세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며 한반도 남부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자 백제와 신라는 433년 동맹을 맺었다. 이후 백제의 성왕(聖王, 재위 523~554)은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538년(성왕 16)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다. 또한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 때부터 시작된 중국 남조 양(梁)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문화적 발전과 경제적 성장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양의 무제(武帝, 재위 502~549)는 본인이 불교적 이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불교적 통치 이념을 내세운 인물이었다. 이에 성왕은 불교치국(佛敎治國) 정책을 실시하여 불교를 매개로 양과 우호적 외교 관계를 맺었고, 나아가 양 무제의 전륜성왕 의식을 수용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교류의 결과로 백제는 사찰 건립과 관련된 양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백제 최초의 대규모 사찰인 대통사를 건립하였다.

이때 대통사의 건립 주체는 백제 왕실임이 분명하며 『삼국유사』에 법흥왕이 대통사의 창건 주체라는 기록은 후대에 잘못 전해진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법흥왕이 협력자로서 대통사 건립에 관여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같은 시기에 신라 왕실도 백제 성왕의 통치를 모델로 흥륜사라는 대규모 사찰을 창건하고 불교치국 정책을 추진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문헌 기록에서 527년 신라 왕실의 흥륜사 창건 계획이 백제 대통사가 완성된 시기와 동일하다는 점도 주목된다. 앞서 언급한 신라 흥륜사 초창기의 기와가 백제대통사의 기와에 영향을 받았다는 고고학적 성과도 신라 초기 불교와 백제 불교의 연관성을 밝혀주는 주요 근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법흥왕과 진흥왕도 성왕과 마찬가지로 전륜성왕 이념을 통한 불교적 이상 군주를 추구했다는 점에서도 흥륜사의 창건 배경에 영향을 준 백제 불교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4 흥륜사의 규모와 사찰의 위상

흥륜사는 절터의 전모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불사였다는 점에서 사찰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 「흥륜사 벽화보현(興輪寺 壁畵普賢)」에 의하면 흥륜사에는 불전과 탑, 남문, 동·서의 낭무(廊廡) 등이 배치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 기록에서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때 승려인 정화(靖和)·홍계(弘繼)가 시주를 받아 불에 탄 흥륜사의 남문과 낭무를 수리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921년(경명왕 5)에 제석천(帝釋天)이 흥륜사에 내려와 10일간 머무르며 신이한 일을 행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시주를 많이 하였으며 장인이 스스로 찾아와 며칠 만에 절의 수리를 끝냈다. 이후 공사가 끝나고 제석천이 떠나려고 하자 두 승려는 그의 모습을 그려 모시기를 바랐다. 하지만 제석천은 자신보다 뛰어난 보현보살(普賢菩薩)을 그리도록 하였고 이에 승려들은 절의 벽에 보현보살의 상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흥륜사의 오당(吳堂)에는 선덕여왕 때 김양도(金良圖)가 봉안한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금당(金堂)에는 아도·이차돈·의상(義湘)·혜숙(惠宿)·안함(安含)·표훈(表訓)·원효(元曉)·자장(慈藏)·혜공(惠空)·사파(蛇巴) 등 신라십성(新羅十聖)의 상이 봉안되었다고 전해진다.

544년에 흥륜사가 완성된 이후 549년(진흥왕 10)에는 양의 사신과 함께 승려인 각덕(覺德)이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진흥왕은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사리를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이는 당시 흥륜사의 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사찰과 사리 봉안의 깊은 관련성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흥륜사는 나라의 큰 법회를 주관하며 황룡사(皇龍寺), 사천왕사(四天王寺)와 더불어 신라 최대 규모의 사찰로 기능하였다. 하지만 점차 불교계에서의 위상이 떨어졌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화재로 소실되어 폐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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