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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동 고분군[高靈 池山洞 古墳群]

대가야의 지배자들이 잠들어 있는 곳

미상

고령 지산동 고분군 대표 이미지

고령 지산동 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고령 지산동 고분군(高靈 池山洞 古墳群)은 사적 제79호로 지정된 대가야(大伽倻)의 고분군이다. 고분군은 총 704기의 봉토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세기 말·5세기 초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 축조되었다. 고분군의 북쪽에는 대가야의 거점 산성인 고령 주산성(主山城)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가야 궁성지(宮城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자리하고 있다. 지산동 고분군의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으며, 발굴조사 결과 순장(殉葬)의 사례가 확인되었다. 지산동 고분군은 금관가야(金官伽倻) 이후 가야의 중심국으로 성장한 대가야의 위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2 지산동 고분군의 입지와 분포

고령 지산동 고분군(高靈池山洞古墳群)은 대가야를 대표하는 고분군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경북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산8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79호로 지정되었다. 정밀지표조사를 통해 살펴본 결과, 모두 704기의 봉토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가야지역에서 최대 규모의 무덤군이다. 봉토분은 고령 주산(主山)의 남쪽 척릉(脊稜)과 동쪽 읍내 방향의 지맥들, 그리고 거창 방향의 국도가 지나가는 덕곡재의 남쪽으로 고아동에 이르는 지맥 위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분포 범위는 대략 길이 2.4km, 너비 1km이다. 봉분의 직경이 20m가 넘는 대형 무덤들은 주로 능선의 정선부와 각가지 능선의 말단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형분은 읍내 쪽으로 뻗어 내린 여러 가지 능선의 척릉 위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소형분들은 중·대형분의 주위를 비롯하여 고분군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지산동 고분군은 4세기 말·5세기 초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 대가야에 의해 축조된 것이다.

지산동 고분군의 북쪽 산 정상부에는 대가야의 거점 산성인 고령 주산성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가야 궁성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고분군 외곽에는 규모가 작은 본관동, 월산리, 도진리, 박곡리, 월광리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06년 일본학자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처음으로 실시되었으며, 이후에도 일본학자들에 의해 몇 차례 실시되었다. 이를 통해 47호분과 절상천정총(折上天井塚)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강점기 일본학자에 의해 실시된 발굴조사의 결과에 대해서 크게 참고할 내용은 없다는 견해도 있다. 해방 이후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77년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에서 44·45호분을, 1978년 계명대학교가 32∼35호분을 발굴 조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90년대에는 경북대학교에 의한 시굴 조사를 시작으로, 94년 영남문화재연구원, 99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 의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2000년 이후에도 영남대학교, 대동문화재연구원 등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3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大伽倻)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와 『삼국유사(三國遺事)』 5가야 조 의 기록에 따르면 대가야는 지금의 고령 지역에 있었다. 큰 대(大)자를 사용하여 대가야라고 불린 것은 금관가야의 세력이 약해지고 고령을 중심으로 한 가야국이 금관가야를 대신하여 가야 사회의 중심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가야는 479년에 중국의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책봉호를 제수 받았다. 이는 대가야가 독자적인 힘으로 중국과 교섭을 가진 것을 알려주며, 이를 통해 당시 대가야의 국제적 위상을 알 수 있다.

고령을 거점으로 성장한 대가야는 남강 중상류, 섬진강 수계, 남해안 일대, 금강 상류에 걸친 넓은 권역을 형성하며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최근에는 토기, 철과 같은 필수 물자, 금동제 용봉문환두대도(龍鳳紋環頭大刀), 금동제 마구와 같은 위신재(威信材)가 생산·유통되는 범위를 볼 때, 호남 동부지역까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지배·복속 관계로 이루어진 동일한 정치·경제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지산동 고분군은 고령의 대가야가 본격적으로 국가 형성기에 들어선 4세기 말 혹은 5세기 초부터 멸망에 이르는 6세기 중엽까지 조영된 고분군이다. 이에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대가야의 위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특히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은 유형의 토기 즉 ‘고령양식’, ‘대가야양식’ 토기와 금제 귀걸이가 합천, 성주, 경남 서부 지역의 고분군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금제 귀걸이는 고령의 대가야 지배층이 지방 각지의 수장층들의 지위를 인정하는 표시로서 선물한 것으로 보이며, 토기는 지방 수장층들의 장례에 보내는 부의용 물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가야는 이런 유물들을 각 지역으로 선물하고 그에 대한 답례의 형식으로 막대한 양의 공납물을 받았을 것이다. 지산동 고분군은 고령의 물적 자원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공납물을 바탕으로 조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지산동 고분군은 금관가야 이후 가야의 중심국으로 성장한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지산동 고분군을 시간과 공간의 구조로 분석하였을 때, 북쪽과 남쪽이 별개의 집단에 의해 조영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별개의 집단은 북쪽을 상위로 하는 수직적 상하 관계가 아니라 상호 간에 우열은 있으나 기본적으로 수평적 관계이며, 이러한 집단의 성격은 신라의 부(部)와 유사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4 순장(殉葬), 지배자를 위한 장례의식

순장이란 죽은 사람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 함께 매장하는 장의행위(葬儀行爲)를 말한다. 세계적으로 순장이 시행된 지역은 이집트와 근동지방(近東地方), 스키타이 등이 유명하며 중국에서도 순장을 시행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조에 순장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순장 금지에 관한 기사가 보인다. 또한, 가야와 관련된 문헌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야 지역의 고분에서 발굴을 통해 많은 순장 사례가 확인되고 있다. 그중 하나의 사례가 지산동 고분군의 순장이다.

지산동 고분군 32호분과 34호분은 주인공이 들어가는 주실 외에 별도의 순장묘곽(殉葬墓槨)을 가지고 있는 유형이다. 순장자가 자신의 묘곽을 독립적으로 가지고 묻힌다는 점에서 주곽순장(主槨殉葬)이나 주·부곽 순장의 유형과는 다른 형태의 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순장곽 순장은 순장곽의 수가 1기뿐인 단곽순장과 순장곽이 여러 개인 다곽순장으로 분류된다. 32호분과 34호분은 단곽순장(多槨殉葬)이다.

다곽순장은 수혈식 석실의 주실 외에 부장품을 넣기 위한 부실을 만들고 이 주 · 부실을 둘러싸며 여러 개의 소형 석곽을 배치해 순장시키고 있는 순장 형태이다. 이때 순장자는 순장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실 안 주인공의 머리 위와 발아래에도 있고, 부실에도 순장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다곽순장묘는 중앙에 주석실을 중심으로 많은 묘곽을 설치하고 호석을 두른 다음, 이를 모두 한 봉토로 쌓기 때문에 묘역도 그 고분군 가운데 우세하고 봉분의 크기도 최대를 이룬다.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44호분, 45호분, 30호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44호분은 넓은 묘역 중앙에 대형 수혈식 석실을 배치하고 부실은 주실과 나란히 1개, 주실의 단벽 쪽에 직교하여 1개, 모두 2개의 부실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이 석실을 둘러싸며 부챗살 모양과 원주형으로 32개의 순장곽을 설치하고 있다. 순장자는 32개의 석곽 중 인골(人骨)이 남아 있는 것이 18기에서 22명인데, 이는 1석곽에 성인 남녀가 머리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합장된 것도 있고, 10세 정도의 여아만 합장한 것, 성인과 여아를 합장한 것도 있다. 그 밖의 석곽에서도 매장 흔적이 전혀 없는 곽과 부장품용의 곽을 빼고는 14기가 모두 매장곽이므로 결국 주위의 순장곽에서 모두 32명이 순장된 것이다.

45호분의 경우는 주실 외에 부실이 1기, 주위의 순장곽은 주·부실을 원형으로 둘러싸면서 11기가 배치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주실에 2명, 부실에 1명, 11기의 순장곽에 2기의 허장을 빼고 9명이 순장되어 있어 도합 12명이 순장되어 있다.

30호분의 경우 순장곽이 주실 바닥 1기, 동쪽에 2기, 북쪽에 1기, 남쪽에 1기로 모두 5기가 있다. 주실의 경우 도굴로 인해 순장자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지만, 주실의 크기가 32호분 주실보다는 조금 크고 자갈을 깐 바닥과 유물의 부장 양상은 거의 비슷하다. 주인공의 침향은 확실하지 않지만 남쪽 순장곽의 침향과 32호분의 침향을 참고할 때 동북방향이라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발아래 쪽인 서남 단벽 쪽에 1명의 순장자가 있었을 것이다. 부실에는 순장자의 공간이 있어 1명이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산리 30호분은 순장곽에 5명, 주실에 1명, 부실에 1명, 도합 7명 이상이 순장되었다.

30호분의 남쪽 순장곽에서는 유개고배, 장경호(長頸壺) 등 토기와 함께 대가야식의 보주형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이 금동관은 피장자가 착장한 채 매장된 상태로 출토되었으며, 두개골에 의해 1~5세의 유아이거나 6~11세의 소아로 판정되었다. 또한, 금동관의 크기도 가로 14.7cm, 폭 3.6cm의 대륜에 보주형의 입식 3개를 세우고 4개의 영락을 단 아주 소형의 금동관이다. 이 금동관 피장자는 30호분 주인공과 혈연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30호분 주인공의 아들이거나 손자가 아직 영구치가 나기 전에 불의의 죽임을 당하여 금동관을 착장하고 주인공 석실 옆에 순장곽처럼 만들어 묻은 것이다. 이에 반해 금동관 피장자가 노비나 하층계급에 해당하는 자로서 금동관을 착장할 수 있는 다른 자를 대신하여 순장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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